2015.10.10 부산/ 금정산
일자: 2015.10.10
산행코스: 범어사지하철역~504.7봉/계명봉수대~계명봉~갑오봉~금샘~고당봉~북문~의상대~범어사
인원: 홀로
GPS거리: 14.6㎞ 널 널/6시간30분
지하철1호선/범어사역5번, 7번출구사이 범어사이정표에서 시작이다.
청룡동 버스종점을 지나고…
잠시후 만나는 로터리에서 직진이다.
24시편의점에서 우측 도로따라…
경동아파트 입구에서 우측 등산로 방향으로…
도로건너 정자옆에 금정산제1등산로 안내도와 부산갈맷길 표식이 있다.
오늘 산행의 실직적인 들머리다.
산행준비를 마치고, 올라서면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등로는 이어진다.
첫번째갈림길
직진길은 양산 사송리로 내려 가는 갈맷길이고…
좌측 계명봉 봉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이후 산을 오르면서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산으로 오르는 길로 간다.
구절초
504.7봉/ 계명봉수대
계명봉수대 비문
가파른 길 올라 적정을 살피던 관측의 눈
밤 불빛 낮 연기의 급보통신
황령산은 남, 원효산은 북 중앙에 선 계명봉수대
외침을 본진에 전한 곳 나라방위의 경계거점
갓끈매고 한복 입은 옛 군인들 억새꽃 되어 조국 혼을 부르나
봉수대, 봉대, 봉화대, 연대라고도 불리는 봉수대는 봉화를
올리는 곳으로 고려 의종 때부터 시행한 통신방법이다.
하지만 이곳 계명봉수대는 찾기도 쉽지 않은데다 나무가 우거지고
억새가 무성한 곳에 봉수대 석축만 남아있는 실정이므로
적극적인 문화재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안부를 지난후 바위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바위오르막길에 있는 앙증맞은 이정표
바위전망대에 오르니 범어사일대와 금정산 주능선이 멋지게 펼쳐진다.
금정산 고당봉
금정산은 부산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산세지만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이 이루어져 있어,
부산시민들의 모태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했던 탓인지 곳곳에 기암절벽이 절묘하고,
크고 작은 금정의 봉우리들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곳에는
넓은 분지를 형성해 자리한 금정산성 마을이 있다.
산성마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금정산성안 촌락으로
해발 8백10m의 산 정상에 서서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왜 국내 최대규모의 산성을 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 하류 대저 땅과 북의 양산지계까지 내려다 보이고,
동으로 수영강과 회동저수지, 온천천, 동래읍성지역 등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탓에
왜구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 있었으니 금정산성과 마을의 역사와 전설은
곧 호국의 이념으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해운대일대와 광안대교가 잘 조망 된다.
내려다 본 범어사
계명봉 정상부
계명봉은 옛날 스님들이 새벽예불을 드릴 때 하늘의 별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는데,
흐린 날에는 기이하게도 하늘에서 닭 울음 소리가 예불시간을 정확히 알려 주었다고 해서
닭 울음을 뜻하는 계명(鷄鳴)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온다.
사배고개
고개 너머의 양산시 동면 사송리 사배마을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다.
개쑥부쟁이
갑오봉
산부추도 이젠 끝물이다.
장군봉은 후일을 기약하고 패스한다.
낙동강…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송전철탑이 너무 거슬려…
장군샘
습지갈림길
범어사기…
이곳은 범어사 절 땅이라는... 표지석이다.
우뚝 선 바위
산이 여러가지 색깔로 요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가을날 - 김 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가산리마애여래입상
잣나무 조림지와 철탑을 지나고…
고당봉이 지척이다.
금샘갈림길
일단 금샘을 보기 위해 좌측으로 향한다.
금샘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범어사 창건설화가 시작된 곳이다.
회동저수지 일대…
계명봉… 뒤쪽으로 낙동정맥의 산들이 이어진다.
장군봉 뒤쪽으로 이어지는 금정산 북릉일대…
금샘에서 바라본 고당봉
다시 금샘 갈림길로 되돌아와 고당봉으로 올라간다.
나무계단 앞
나무계단과 나선형 계단을 돌아 올라간다.
고당봉
낙동강 너머로 신어산, 동신어산, 오봉산…
장군봉, 계명봉, 천성산…
원효봉, 의상봉…
사방으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고, 북문 방향으로 내려간다.
참빗살나무
고당샘
근처 적당한 곳에 배낭을 내리고 점심 해결하면서 30분가량 휴식이다.
새로 복원된 금정산성
금정산성(金井山城) 사적 제215호.
둘레 1만 7,336m, 높이 1.5~3.2m.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으로서, 지금은 4㎞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처음으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금정산성은 조선시대에 중축한 것이다.
1703년(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 있는 동래부의 방비를 위해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둘레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4문이 있는 산성을 쌓았다.
그 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둘레 5,643의 중성(中城)을 쌓고, 시설을 보강했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서·남·북 문루를 다시 쌓으니, 그 길이가 32리였다.
산성의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고, 수구문, 보루, 암문 등이 설치되었다.
1972년에 동문과 남문,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망루가 복원되었다.
금정산탐방지원센타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성 전설을 살펴보면...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동문과 서문, 두 성문을 보다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두루 수소문 하던차에,
결국은 사제지간인 두 석공에게 성문의 재건을 의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선생에게, 서문은 제자에게 맡겨 서로 경쟁을 시켰는데…
서문을 만드는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렸으나,
동문을 담당한 선생은 원래 야욕이 많은 사람이라 욕심만 내어 그저 웅대하게만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동문, 서문은 두 사제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자가 먼저 서문을 완공한 뒤 동문의 스승을 찾아가 보았으나 스승은 아직 성문도 달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동문은 서문에 비해 규모는 웅대하지만 견고하지 못해 결국은 제자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한때는 살해할 음모까지 꾸민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북문을 통과해 범어사 방향으로 내려가다
“북문 0.6㎞”라 적힌 안내판을 지나면서 메인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우측으로 철조망을 끼고 진행한다.
“원효암”이란 조그만 현판이 걸린 문을 통과하고…
원효암 입구
참선수도 도량인 원효암에는 범어사 조실인 지유 스님이 주석해 있는 암자다.
원효암은 후일을 기약하고…
좌측으로 잠시 진행하면 바위에 로프가 매달려 있다.
의상대
범어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가 기거했다는 성스러운 자리로,
금정산에서 내려오는 “금정8경”의 하나로 의상망해(義湘望海)라고 불리는 곳이다.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글씨체로 “의상대(義湘臺)”라 새겨져 있다.
정면아래로 남산동과 회동수원지, 그리고 아홉산…
장산. 해운대 일대…
원효봉…
정면의 멋진 조망을 즐긴후 내려서면 본격적인 하산길.
2개의 갈림길을 만나고, 좌측으로 크게 꺾어 내려서면 등로는 범어사로 이어진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호국고찰 범어사(梵魚寺)
삼국통일의 화룡점정을 찍었던 문무대왕과 의상대사가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하는 일념으로
금정산에서 7일간의 기도를 한 결과 왜구를 무찌르고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
신라 문무왕때인 서기 678년 의상대사가 해동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창건한 이후
고단했던 우리 역사의 중심에서 늘 흔들림없는 한국불교의 요람으로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해 온 사찰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이 절을 사령부로 삼아 승병활동을 했고,
1919년 3·1운동 때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지시에 따라 학생과 스님들이
범어사 학림의거로 불리는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특히 전국의 만세운동에서 사용될 태극기를 범어사에서 만들었다는
일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범어사는 정세가 혼탁하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선사상의 맥을 지켜내고
불교계의 정화운동 중심 사찰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절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절을 거쳐갔던 수많은 고승들 또한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신라때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구한말 이후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이절의 맥을 지켜왔다.
구한말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선찰대본산”이라 명명하고,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스님을 조실로 모신 바 있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범어사에서 수도했고~
만해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용성 큰스님의 제자이자,
성철 스님의 스승으로서 한국 현대 불교의 정화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했던 동산 큰스님은 범어사를 상징하는 스님이기도 하다.
보제루
예불과 법요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조계문
범어사의 정식 출입문으로 일주문이라고도 불리우며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모두 통한다는 진리가 담겨있어 일명 ”삼해탈문”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산행마무리후 지나가는 신도님차에 얹혀서 편하게 범어사지하철역에 도착하고,
아침에 진행한 순서를 역으로 개금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