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한국불교사-7

제이제이 2016. 2. 3. 07:37

한국불교사-7

 

7.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불교계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혜공왕대(765~779) 후반에 귀족들의 모반이 연이어 일어나다가 국왕이

반란의 와중에 희생됨으로써 무열왕계의 왕통이 단절되고 중기 왕실은 막을 내렸다.

이후의 신라 후기 150년 동안은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어

20명의 왕이 즉위하고, 그 중 상당수가 피살당하는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왕권이 약화된 가운데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하여 자의적인 수탈을 강화하였고,

이에 못 견딘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켜 저항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감소되었고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기에 제시되었던 정치적 원리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후기 왕실의 몇 차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 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지게 되고 지방 세력인

호족이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부각되게 된다.


이들은 과거 권력 다툼에서 밀려 낙향한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주변의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기반으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의 격변 속에서 불교계도 새로운 모습을 띄게 되는데

통일기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교학불교는 점차 후퇴하고

선종을 비롯한 실천적인 수행자들이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해 나갔다.

 


-교학의 침체-

불교계의 변화는 경덕왕대(742~764)의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교학의 연구는 급속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경덕왕대에 원로로서 활동한 태현은 유식학, 화엄학, 기신론 등에 관해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태현 이후에는 새로운 교학연구나 저작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적 흐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 동안 부석사를 중심으로 실천적 신앙을 중시하고 있던 의상계의 문도들이

중앙 불교계에 등장하여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게 되었다.

 

경덕왕대 초반까지도 의상의 문도들이 중앙에서 활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중앙에서 화엄학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원효와 가귀, 표원 등은

의상의 이론보다는 중국 화엄학자들의 저술과 기신론의 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덕왕대에 들어와 의상계의 표훈이 국왕과 재상의 존경을 받으면서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표훈은 국왕의 부탁을 받고 후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 천제와 상의했다고 전한다.

재상 김대성(金大城)은 표훈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왕실의 도움을 받아

김대성이 창건한 불국사와 석불사에는 표훈과 함께 같은 의상계인 신림이 초대 주지로 초청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대 중반에 태현과 화엄학승인 법해(法海)가 가뭄에

비를 청하는 법력을 겨루어 법해가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태현으로 상징되는

중기의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그 대신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대두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중앙에 등장한 의상계의 화엄학은 신라 후기에 교학불교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며 발전하였다.

신라 후기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크게 대두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일본에 전해진

신라 불교학의 내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의상계의 화엄학과 함께 경덕왕대 후반에 대두된 실천적 신앙으로 진표(眞表)의 미륵신앙이 있다.

진표는 벽골군(현재 김제군) 출신으로 12살 때 출가하여 금산사 순제(順濟) 법사로부터

점찰법을 배운 후에, 미륵으로부터 직접 점찰계법을 전수받기 위하여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간절한 참회수행을 시작하였다.

전기에 따르면, 간절히 수행한 끝에 미륵으로부터 점찰계본과 점찰간자 189개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제8과 제9의 두 간자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 진표는 산에서 내려와 미륵에게 받은 계법에 의거한 점찰법을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진표 이후 영심을 비롯한 제자들은 점찰법을 계승하여 여러 지역에 사찰을 세우고 교화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진표가 직접 교화를 펼친 지역, 그리고 진표의 교화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지역은

대개 과거 고()신라의 외곽 지역으로서 수도인 경주에서 볼 때에는 주변 지역이었다.

진표의 불교 역시 당시 중앙의 불교에서 볼 때에는 세련되지 못한 원초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변경 지역에 그의 교화가 널리 퍼질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9세기 이후에 진표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밝혀 주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 말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했던 것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계승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선종의 수용과 전개-

신라 후기의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선종의 수용이었다.

선종은 8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며 불교계의 중심사조로 등장하였는데,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을 통해 이 새로운 사조가 신라에도 차츰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선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선종은 신라 불교계에서도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새로 등장한 지방 정치세력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학불교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신라에 선종이 처음 수용된 것은 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 유학했던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 583~654)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호거산에서 선법을 전한 것이 그 최초이다.

법랑의 선법은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에게 계승되었다.

신행은 법랑이 입적한 뒤에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선법을 전하면서 먼저 간심(看心)으로서 선을 닦게 한 후

근기가 익으면 방편(方便) 법문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북종선의 수행법과 일치한다.

법랑과 신행에 의해 전래된 선법은 신수계통의 북종선으로

후대 중국 선종의 주류가 된 남종선 이전의 선사상이었다.

후대에 중국에서 남종이 선종의 주류로 확립되자 북종선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신라에 남종선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40여 년의 중국 유학을 마치고

헌덕왕 13(821)에 귀국한 도의(道義)였다.

도의는 북한군(北漢郡, 현재 서울) 출신으로 선덕왕 5(783)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다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당에게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하는

말을 들으며 법맥을 전수받았다.

당시 백장선사는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東國)으로 가는구나라고 극찬을 하였다고 전한다.


821년 법맥을 전수받고 귀국한 도의는 선풍을 널리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신라는 교학 중심이라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교외별전,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선풍을 이해하지 못하여 도의를 배척하였다.

결국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고 후일을 내다보며 스스로 수행하면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선을 전수하여야 했다.

오늘날 도의국사는 우리나라 선법을 가장 먼저 전수한 분으로 평가되어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추존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선종은 아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기존 불교계로부터 배척당하여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8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수학한 다수의 승려들이 귀국하여

선법을 선양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중국 불교계에서 선종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이 알려지고 선종에 대한

이해가 점차 확대되면서 선종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선사들의 교화력이 증대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사들의 활동 모습을 통하여 선종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홍척(洪陟)

흥덕왕대(826~836) 초기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법을 펼쳤다.

명성이 알려져 왕실에 초청되기도 하였던 홍척은 국왕 부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왕실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선찰이 되는 실상사를 창건하고 많은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금마(金馬) 출신의 가난한 상인이었던 혜소(惠昭, 774~850)는 애장왕 5(804)당나라로

들어가는 사행선의 뱃사공으로 중국에 들어간 후 창주 신감(滄州神鑑)의 문하에서 출가, 수학하였다.

흥덕왕 5(830)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상주의 장백사에서 교화를 펼쳤는데

점차 대중들이 많아지자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겼고,

만년에는 보다 넓은 장소를 구하여 화개곡 근처에 옥천사(현재의 쌍계사)를 창건했다.

왕실에서도 그의 교화에 주목하여 경주 황룡사의 승적에 올려 주고 우대했다.

 

혜철(慧徹, 785~861)은 삭주(현재의 춘천) 출신으로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후

헌덕왕 6(814) 중국에 들어가 서당 지장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신무왕 1(849)에 귀국하여 곡성 태안사에서 교화를 펼쳐 명성을 얻었고 왕실의 귀의를 받았다.

 

절중(折中, 826~900)은 휴암군(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처음에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도윤을 만나 선으로 전향하였다.

전란을 피하여 영월의 사자산에 주석하여 천여 명의 제자를 두었고 왕실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웅진(공주 지역) 출신의 체징(體澄, 804~880)은 설악산에서 도의의 제자인

염거(廉居)에게 수학한 후 희강왕 2(837)에 동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여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의의 선풍을 선양하였는데, 이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그의 문도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에게도 이어졌다.

 

이상에서 보듯 830년에서 840년대에 걸쳐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은 여러 지역에

산문을 개창하여 적극적인 교화를 펼쳤고, 그 흐름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계속 발전해 갔다.

또한 이들 이외에도 지력문(智力聞), 신흥언(新興彦), 용암체(涌岩體), 진구휴(珍丘休),

보리종(菩提宗) 등으로 알려진 선승들도 같은 시기에 각기 산문을 개창하고 선풍을 떨쳤다고 한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선승들이 여러 지역에서 선법을 펼침으로써

선종은 이제 신라 불교계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불과 얼마 전에 도의가 기존 불교계에 의해 배척되어 설악산으로 은거하였던 것에

비교하면 단기간에 불교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간에 활동한 선승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마조 문하의 제자들로부터

선법을 수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후 한국의 선사상은 마조의 선에 토대를 두고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이 단기간에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선사들의 이러한

사상적 동질성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풍수지리설의 유입-

선종의 수용과 함께 새로운 문화사조들도 수용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수도를 정할 때라든지 대형 건물을 세울 때에 주변의 산세와 하천의 방향을 고려하는 등의

풍수적 관념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을 덧붙여서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이 확립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선종의 수용이 본격화되던 9세기 중반 이후였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선승이었던 도선(道詵, 827~898)이라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도선이 직접 중국에 유학하여 선과 풍수지리의 이론을 배워 온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고려 의종 4(1150)에 편찬된 도선의 비문에는 도선은 본래 혜철이 동리산에서 선법을 펼칠 때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어느 신비한 사람으로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도선은 광양의 옥룡사에 산문을 세우고 선을 교화하면서 동시에 세속 사회에 풍수지리의

이론을 전하였는데, 특히 개경지역을 방문하여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예언하였다.


도선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신비적인 이야기들이 적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풍수지리설의 전개에 선승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당시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선의 비문에서 그에게 풍수지리를 가르친 사람은 그 이전에 중국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을 터이고, 도선은 이러한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을 것이다.

선승들이 풍수지리설을 전개한 것은 이들이 중국에 유학하는 과정에서 당시 발전하고 있던

풍수지리의 이론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중국과 신라에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리에 대한 지식을 몸에 익히고 이를 이론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선이 전개한 풍수지리설은 풍수이론을 불교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서

지리적 결함을 사찰이나 탑을 건립하여 보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른바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풍수지리 이론에 의할 때 사찰은 단순히 불교신앙의 터전일 뿐 아니라

국토의 안정을 보장하는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단순히 지형의 우열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지의 균형적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이론으로도 활용되었다.

왕건의 왕조 개창 과정에서 보듯이, 지역의 지리적 결점을 합리적으로 보완하면

오히려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