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10
한국불교사-10
10.고려시대/ 고려대장경과 교학의 발전
-고려대장경의 조조(雕造)-
승정제도 및 교단체제의 정비와 함께 불교계의 사상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들도 추진되었다.
그러한 노력 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기본 문헌인 경(經)렝(律)럼(論)을 집대성한 대장경의 제작이었다.
고려의 대장경 제작은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남쪽지방으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발원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의 대장경은 송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개보장(開寶藏)을 모범으로 삼았다.
개보장은 한역(漢譯)된 불경을 집대성한 최초의 한문 대장경으로서,
송나라 태조의 개보 4년(971)에 관리들을 촉(蜀)지방에 파견하여 목판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개보장에는 모두 1,078종 5,048권의 경전들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때 제작한
불경 목록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의거한 것이었다.
고려는 개보장이 완성된 직후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의 인쇄본을 구해 왔고
현종이 현화사를 창건했을 때에도 중국에서 대장경 1질을 하사받아 봉안했다.
현종대의 대장경 제작은 현종 20년(1029)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장경을 완성한 직후
국왕은 왕궁 안의 회경전에서 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대규모의 장경도량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대장경 제작은 이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전들을 대장경에 추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에서는 개보장을 제작한 이후에 후대에 번역된 경전들을 대장경에 추가하였고,
거란에서도 개보장보다 훨씬 많은 분량으로 거란대장경을 제작하였다.
거란의 대장경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개보장을 모델로 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으로 파악한 다수의 경전들을 추가했다.
이처럼 송나라와 거란에서 기존의 개보장에 새로운 경전들을 추가한 대장경을 제작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에서도 현종대에 제작한 대장경에 새로운 경전들을 추가하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추가로 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은 거란의 대장경이 수입된 문종 17년(1063)에 시작되어
선종 4년(1087)에 완료되었는데, 이 때에는 송나라와 거란에서 추가한 경전들과
고려에서 발견된 경전들을 검토하여 추가하였다.
현종대부터 선종 4년까지 제작된 대장경은 총 6,000여 권의 분량(570질)으로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가장 잘 갖춰진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 판목은 흥왕사의 대장전에 봉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서 봉안하였다.
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신심에서 대장경을 제작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대장경의 제작은 그러한 정치적 목적 이외에도 불교국가로서의
문화적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송나라는 처음 대장경을 제작한 이후 주변 국가에 인쇄본을 하사함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였는데,
이제 고려도 독자적인 대장경을 갖게 됨으로써 더 이상 중국의 대장경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의 문화적 역량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로 승려들의 중국 유학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가 경전의 구입이었는데,
불경을 집대성한 대장경판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러한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학의 발전-
대장경의 조조와 함께 불교학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교학 불교인 법상종과 화엄종에서는 교단체제가 정비되면서
자기 종파의 교학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종파의 기초 문헌들을 정리하여 간행하고,
나아가 종파의 사상적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상종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문종의 처남으로서 승통에 오른 소현이었다.
11살에 출가한 소현은 문종 23년(1069)에 승과에 합격하고서 이후 해안사와 금산사, 현화사 등
법상종의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법상종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금산사에 있을 때에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학의 문헌들을
수집려주구간행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가 현화사에 주석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노년까지 수집하고 교정하여 간행한 유식학 문헌은
규기의 『법화현찬』과 『유식술기』 등을 비롯하여 32종 353권에 달한다.
또한 소현은 법상종의 역대 조사들의 현창에도 노력하였다.
금산사 광교원 내부에 법당을 마련하고서 노사나 불상과 함께 중국 법상종의 시조인
현장과 규기의 상을 봉안하였으며, 현화사의 주지로 있을 때에도 법당 내부에 석가여래와 법장,
규기 및 해동의 법상종 조사 6인의 모습을 모시고 승려들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였다.
이 때 모신 해동 6조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소현의 비문에 특별히 신라의 법상종 조사로 원효와 태현을 언급하고 있어서
두 사람이 6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균여 이후 화엄종에서 교학의 발전을 주도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왕자로서는 처음으로 승려가 된 그는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불교이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고자 송나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송과 경쟁하는 거란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
왕실과 관료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의천은 선종 2년(1085)에 비밀리에 송으로 건너가 14개월 동안
화엄학을 비롯하여 천태학, 유식학, 선 등 주요 불교이론들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의천은 종래의 고려 화엄학과는 다른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수행법을 강조하였다.
교관겸수를 중시한 의천의 입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로 불리던 징관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심성의 체득을 중시했던 자신의 입장도 반영한 것이다.
의천은 기성 불교계를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천태종을 개창하여
고려불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교장(敎藏)의 제작-
의천은 화엄학뿐만 아니라 불교학 전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여러 불교연구서들을 총괄한 교장(敎藏)을 편집, 간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장이란 불경에 대한 각종 연구서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인데,
불경을 모은 대장경에 대한 해설서들이라는 의미에서 ‘속장경(續藏經)’이라고도 한다.
의천은 중국에 유학하기 전부터 대장경이 거의 완성되는 것을 보고서 불경의 주석서들을 모아
교장을 편집할 것을 발원하였고,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그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에 여러 종파의 연구서 3,000여 권을 수집하였고, 귀국한 이후에도
국내의 사찰을 뒤져 옛 문헌들을 찾고 또 송나라, 거란, 일본 등에 사람을 파견하여 문헌을 수집하였다.
그 성과로서 선종 7년(1090)에 확인된 불경에 대한 주석서들을 경전별로 분류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총 1,010종 4,857권의 문헌이 수록되었다.
곧이어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 문헌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교장의 간행에는 다른 종파의 승려들도 참여하였는데, 특히 법상종 승려들의 참여가 많았다.
법상종의 소현이 간행한 유식학 문헌들도 교장의 일부로 수록되었다.
교장 간행작업은 의천이 입적한 다음 해인 숙종 7년(1102)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때 간행된 책들은 송과 거란, 일본에 전해져 각 나라의 불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의천은 교장 이외에도 화엄종의 주요 문헌들을 발췌하여 편집한
『원종문류(圓宗文類)』 22권과 승려들의 비문 등을 모은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을 편집하는 등 불교문헌의 수집과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는 『원종문류』 3권과 『석원사림』 5권 등이 남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