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27
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27
♧열반은 하루의 품삯 ♧
강의: 앞서의 궁자의 비유를 들고나서 수보리는 자신이 과거에 수행하면서 생각하였던 것과
오늘의 깨달음과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지난날의 오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경문이 이어집니다.
불교의 여러가지 교의를 바르게 이해하고 궁극에는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이어서 읽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경문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 때문에 여러가지
시끄러운 번뇌에 시달리면서도 미혹하고 지식이 없어 소승법(小乘法)만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존은 저희들로 하여금 모든 법의 희롱거리인 거름을 치도록 하였고,
저희들은 그 가운데서 열심히 정진하여 열반에 으르는 하루의 품삯을 얻고서는
'불법 가운데서 부지런히 노력한 소득이 매우 크다.'고 기뻐하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존은 저희들의 마음이 용렬하여 소승법을 좋아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도
여래의 지견(知見)인 최상의 보배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방편으로 지혜를 말씀하시었을 뿐 입니다.
이제야 세존께서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아낌이 없으신 줄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이 본래부터 참으로 부처님의 아들이면서도 소승법만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희들이 대승법을 좋아했더라면 부처님 저희들에게 대승법을 말씀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이 경에서는 일불승(一佛乘)만을 말씀 하십니다.
예전에는 보살들 앞에서 성문들은 소승법을 좋아한다고 나무라시었으나
부처님은 실로 대승으로써 교화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본래부터 희구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이제 법왕(法王)의 큰 보배가
저절로 와서 부처님의 아들로서 얻어야 할 것을 다 얻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강의: 위의 경문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진정한 불자의 이상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재산인 지혜를 나의 것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 외의 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란 사람은 본래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부처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일입니다.
성문들은 마음이 용렬하고 무지하여 소승법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은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일불승의 가르침을 두고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는 오직 일불승만을 설할 뿐이며
그것은 법왕의 가장 아끼고 비장하여 두었던 교의(敎義)야 말로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최후로 일러주고자 했던 가장 값진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처럼 이제는 비굴한 정신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불성(佛性)을 부정하고, 부처님을 부정하고,
나아가서 부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생사를 초월하고,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름을 치워주고 그날 그날의 품삯을 받아
연맹해 가는 못난 궁자의 신세일뿐 입니다.
당당하게 장자의 재산을 가지고 우리 또한 장자로서 살아갈 일입니다.
무궁무진한 재산을 마음껏 쓰면서 영원한 생명으로서 대자유를 누리며 살 일입니다.
법화경은 그러한 이치를 전하고자 시종일관
"오직 일불승만 있을 뿐 이승도 삼승도 없다."라고 설합니다.
부처님은 어쩌면 "사람이 부처님이다"라는 한마디를 전하려고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해품이란 모든 사람이 진정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확신하고 아울러 깊고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고 이해하는 품입니다.
수보리와 네 성문들은 요지부동의 확신과 깊고 소상한 이해를 통하여 스스로
부처님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환희와 감동과 찬탄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어느 해 가을 송광사 문수전에서 정진을 하였습니다.
수선사에서는 3년 결사가 진행되고 문수전에서는 3,4명이 앉아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정진을 하면서 문수전 옆에 있는 관음전 법당의 부전소임도 맡아서
조석예불을 드리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3시에 일어나 새벽예불을 하려고 법당에 가려는데 너무나 어두어서
아예 눈을 감고 법당에 가려는데 너무나 어두워서 아예 눈을 감고 법당에 들어섰습니다.
늘 하던 일이라 탁자 앞에서 손을 내밀어 성냥을 찾아 불을 켜는 순간,
그 칠흙 같은 어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문은 닫혀 있었고 어둠이 나갈래야 나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둠은 없습니다.
나는 그 순간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어둠이 곧 밝음이고 밝음이
곧 어둠입니다.
번뇌 무명과 보리 열반이 둘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 허망한 육신 이 그대로 법신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무지 몽매한 보통 사람 밖에 따로 부처님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일찍이 애송하던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
이라는
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해품의 신해(信解)란 바로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