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부산3구간
답사일자: 2022.10.29
코스: 영도대교.입구(시점)-용두산공원-깡통시장-국제시장.사거리-자갈치시장-충무동.새벽시장
-송도케이블카 하부정류장-송도해수욕장-송도해안볼레길 입구/폐쇄-뉴질랜드 참전기념석
-암남공원.정문-포구나무쉼터-두도 전망대-암남공원.후문-암남공원로-감천동.팽나무공원
-감천사거리(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5.4km (두루누비기준 14.9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30분
▶ 갈때 : 부산2구간 마치고, 3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3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감천사거리.버스정류장으로 이동,
17번 시내버스타고 자갈치.지하철역에 하차후, 지하철1호선 환승하여 명륜동.지하철역에 하차,
명륜동.버스정류장에서 12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3구간 궤적

남파랑길 2구간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두루누비&트랭글 앱 다시 켜고
(11:40) '영도대교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남파랑길 3코스를 진행이다.

'영도대교'는 과거에는 하루에 총 7회 영도다리를 들어 올려 1,000톤 급 이하의 선박이
드나들었으나, 2013년 새로운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일 1회, 오후 2시부터 15분간 도개 행사가
진행되지만 선박 왕래는 불가하며,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년 4개월동안 도개 행사를 잠정 중지했다가 2022년 6월11일부터 매주 토요일 14시(오후 2시)에
도개 행사가 재개되었다.
남포동, 중앙동, 광복동이 만나는 영도대교 앞 삼거리의 '남포역 6번 출입구'옆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고~

남파랑길 이정표는 좌측으로 '남포역 7번 출구 방향'과 함께 '자갈치시장 0.5km'으로
방향 표시를 하고 있는데, 6번 출입구로 내려서서 7번 출입구로 나가서 '용두산 공원'과
'보수동 책방 골목'을 거쳐 '자갈치시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포역 7번 출입구'로 나서면, '광복로' 좌측으로 부산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광복동' 거리가 펼쳐지는데~ '광복로 97번길'을 따라 진행하고~
(11:48) '이마트 24' 편의점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용두산 공원(부산타워) 방향으로 진행이다.

부산타워로 오르는 계단길 초입 좌측에 '약조제찰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약조제찰비(約條製札碑)
조선 숙종 9년(168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쓰시마섬주와
왜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5개 조항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초량왜관(1678년~1876년)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 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양국 산인의 접촉이 많아지고 밀무역과 거래가 금지된 품목의 거래가 늘어나면서
조선과 일본 양국이 약조를 맺은 뒤 그 내용을 간추려 한문과 일본어로 새긴 뒤
왜관 수문(守門) 앞에 세웠던 것이 약조제찰비다.
비석에는 가로로 ‘약조제찰(約條制札)’이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세로로 5개 조항과 약조 제찰 내용 및 건립 연월이 적혀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대소사를 막론하고 금표한 정계 밖으로 뛰쳐나와 침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1. 노부세(路浮稅: 통행 수수료)[倭債]는 현장에서 잡은 후에는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에 처한다.
1. 개시(開市) 때 각방에 숨어 들어가 몰래 서로 매매한 자는 피차 사형에 처한다.
1. 5일 잡물을 들여보낼 때 색리(色吏)·고자(庫子)·소통사(小通事) 등을 일본인들이 일체 끌어내어
구타하지 못하도록 한다.
1. 피차의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한다.
왜관에 있는 모든 자는 만약 용무가 있으면 관수에게 보고한 후에 통찰[통행증]을 직접 소지하여야
훈도·별차가 있는 곳에 왕래할 수 있다.
각 조의 제찰을 써서 왜관에 세워 이로써 준수할 규정으로 삼는다. 계해 팔월 일.』
이 비는 숙종 9년(1683) 8월에 세운 비로, 원래 초량 왜관이 있던 용두산 공원에 있었는데,
1978년 부산광역시립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용두산(49m)
부산 시내에 있는 구릉으로서 부산 3명산 중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하였다가,
그 후 산세가 흡사 용 모양이어서 일본에서 건너오는 왜구들을 삼켜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龍頭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8·15광복 전에는 일본인들이 신사(神社)를 세웠던 산이며, 지금은 척화비 · 충혼탑 ·
4 ·19의거 기념탑 · 이충무공 동상 등이 있고, 부산타워가 세워졌다.
6·25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화재가 발생,
피난민 판자촌 약 1,093채를 불태우고 8,000여 이재민을 낸 뒤 이 산은 헐벗은 상태로 방치되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민영석이란 사람이 해방 후 옥살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사에 불을 질렀는데, 때마침 불어 온 강풍으로 인해 판자촌 일대가 몽땅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1955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雩南公園)'이라 명명하고 지금 공원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4 ·19혁명 이후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일명 부산탑이라 불리는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는 해발 69m 용두산 정상에 높이 120m로
1973년 말에 준공되었다.
또한 1997년 12월 시민들의 모금운동을 통해 '부산 시민의 종'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제야의 종 타종 등 3회에 걸쳐 타종을 한다.
(11:53) 용두산 공원에 올라서면, 앞쪽으로 부산 면세점, 부산타워와 팔각정과 함께
백산 안희제 선생 흉상이, 좌측 중앙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그 아래로 꽃 시계와 종각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부산타워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용두산 길 37-55]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에 있는 관광용 탑으로,
1973년 11월 건립 이후 현재까지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인정받고 있다.
1975년 7월 서울의 남산 타워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동양 최대의 관광탑이었다.
해발 69m의 용두산에 높이 120m의 타워로 건축되어 탑의 정상은 해발 189m에 달한다.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낸 건축가 나상기(羅相紀)씨가 설계하였으며, 탑의 꼭대기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의 보개(寶蓋)를 본떠서 만들었다.
타워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1, 2층으로 나뉘어 설치되어 있는데, 2012년 6월 타워 꼭대기에
등대를 설치하여 국내 최고 높이의 등대이자 최초의 관광용 등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망대까지 오르는 초고속 엘리베이터 2대가 설치되어 있다.
부산타워 전망대에서 부산항과 영도,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 등 부산시 중구 일대를 바라보는
전망이 뛰어나며 특히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조망된다고 한다.
'용두산공원' 지킴이 청룡상

'백산 안희제 선생' 청동흉상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백산무역을 경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실업가이다.
1909년 비밀 청년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자,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독립 순보』를 간행하면서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등 민족 지도자들과 국권 회복에 노력하였고,
1914년 국내로 돌아와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취급하면서
해외 독립 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연락망 역할을 하였다.
1919년 기미 육영회와 부산예월회를 조직, 부산 지역의 사회 운동과 민족 자본 육성에 노력하였고,
1920년 봄 『동아 일보』 발기인으로 참여, 1927년 『경제 운동』 잡지 발간,
1928년 부산에 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1933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발해의 고도인 둥진청[東京城]에서 독립운동 기지인
발해 농장을 열어 이주 한인 300여 호를 정착시켰다.
1934년 대종교의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이전해 오자 교주 윤세복(尹世復) 등 간부들을
대동청년단에 가입시키는 한편 대종교 간부가 되어 서적 간행과 같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일제는 대대적으로 독립운동 조직인 대종교 지도자 검거에 나서 윤세복 등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안희제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3년 8월 중국 무단장[牡丹江]
영제현 영제 의원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부산시는 안희제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 4월에 백산상회가 있던 거리를 백산 거리로 지정, 1995년 백산 기념관을 만들어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꽃시계 & 부산타워

용두산공원 꽃시계는 1973년 10월 만들어졌으며 2000년 6월에 재단장하였다.
직경은 5m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침이 있는 꽃 시계로
용두산공원의 상징적인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용두산공원 '종각'

(12:00) 용두산 공원 아래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내려간다.

모자이크 타일로 '용두산공원' 글자가 장식된 축대 벽면 바라보고~

(12:06) '용두산 공원' 북서편 출입구로 나가 '용두산 어귀 삼거리'에서 좌회전이다.

예전에 미 문화원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

부산 근대 역사관
부산의 근현대 역사와 관련한 유물을 보관·전시·연구하는 부산광역시립 박물관 산하 박물관으로,
부산 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서양식 건물이다.
2001년 5월 16일에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구(舊)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건립되어, 미 군정 이후 미국 문화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부산시는 일제 식민 기구로서의 건립 과정과 미 군정 등 외세를 상징하는 건물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2001년에 부산 근대 역사관 조성 사업을 결정하고, 개보수 공사 및 꾸미기 공사를 거쳐
2003년 7월에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별전 · 근현대 자료 발굴 · 문화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식민 통치와 미 군정 등 외세로
점철된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기관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2:12) '대청 사거리'를 지나고~

(12:14) '보수 서점' 우측 책방 골목으로 진행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함경북도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최초로 헌 잡지 등을 팔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보문 서점(현 글방 쉼터)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70여 점포가 들어서 있었다.
피난 왔던 예술인들은 용두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과였고 보수동 책방 골목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문화의 거리, 추억의 거리로 기억되어 왔으며 헌 책이 새 주인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재탄생의 창조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길을 지나, 삼거리 광장으로 나오면
책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청동 조각상이 서 있고~

청동 조각상 앞에서 좌회전 하여 '대청로' 도로를 건너
'부평 깡통시장' 방향으로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12:20) '부평 깡통시장'으로 들어간다.

부평 깡통시장
부산의 중심에 자리한 전통시장으로 국제시장, 자갈치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다.
용두산공원 주변의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신창동 등 오늘날의 부산 중구에 해당되는 지역은
개항되기 전까지 강의 입구에 위치해 갈대밭과 풀밭이 많은 지역으로 '샛디'라고 불렸다.
'부평'이라는 말은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하구의 갈대밭과 풀밭을 의미하는 평(平)이
합쳐진 말인데,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에 일본인들이 대거 중구 지역에 이주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곳은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이 도입한 서양 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된 지역으로
그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극장이다.
부평동에는 원래 '사거리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이 개설되었다.
이 사설시장이 1915년 일제가 정한 시장규칙에 따라 부산부에서 운영하는 공설시장으로 바뀌었고,
장옥도 새롭게 정비해서 '부평정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국내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0년대 들어 시장의 규모를 넓혀가며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부평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과 과자를 비롯해 다양한 물품들을 팔면서 '깡통시장'이라는
별칭을 얻어 장세를 키웠다.
부평 시장은 1970년대 베트남전쟁 특수로 크게 성장했는데, 당시 미군의 전투식량인
시레이션(C-ration)을 비롯한 다양한 외국 물품들을 판매하면서 깡통시장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또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물자를 들여와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에는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설해 세계의 전통음식들과 먹을거리를 팔면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부평 깡통시장'을 지나 '부평 2길'을 따라 계속 진행하고~

'부평 족발골목'의 '원조 한양 족발'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광복로'를 따라
'국제시장 사거리'를 향해 진행하다가, '국제시장 사거리'에서 직진해서 진행이다.
이후 '남포동 거리'로 직진하면, 좌측 편으로 '조명의 거리'와 '만물의 거리'
아치형 입구 조형물을 차례로 지나고~
(12:28) 어린이를 목마 태우고 손을 흔드는 청동 조각상을 지난다.

'아리랑 거리' 입구에서 우회전 하여 'BIFF 광장'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고~

‘아리랑 거리’
6·25 전쟁 시기인 1950년에 피난민들이 중구 신창동 3가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여
국제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미군의 군용 물자와 함께 밀수입된 온갖 상품들이 거래되었기 때문에 국제시장은
일명 ‘도떼기시장’으로 불린다.
국제시장 주변으로 특정 품목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밀집되었는데, 이 중 전통 공예품 및
특산품을 비롯하여 의류, 신발, 연예인 상품 등 특색 있는 점포 104곳이 밀집되어
특히 해외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거리가 바로 ‘아리랑 거리’이다.
'BIFF 거리'를 지나고~

BIFF 거리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6가에 있는 부산 국제 영화제 출범과 함께 생성된 영화 거리로,
중구 남포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영화의 거리였다.
1914년에 영화 상설관 ‘욱관(旭館)’이 경영을 개시한 이후에 보래관(寶來館), 초량좌(草梁座),
행좌(幸座), 부산극장 등이 들어섰다.
특히 이곳은 1924년에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였던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는 등
한국 영화의 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이곳에는 극장들이 자리를 잡아 1960년대에는 20여 개소의 극장이 밀집되었다.
1996년부터 부산 국제 영화제[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개최되면서 극장가를
새롭게 단장하고 그 일대를 자연스럽게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니셜을 따 'PIFF 광장'으로
부르게 되었고, 2010년에 부산의 영어 표기가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뀜에 따라
PIFF 광장의 명칭도 BIFF 광장으로 변경되었다.
처음에는 조형물 등이 많지 않았으나 중구청이 BIFF 광장을 재정비하여 상징 조형물, 핸드프린팅,
원형 스타 문양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2006년에 영화제 기간 중 야외무대가 해운대로 이전하였고, 2011년부터는 해운대 센텀 시티에
전용 극장인 ‘두레라움’이 건립됨으로써 중구 남포동에서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다만 BIFF 전야제 행사만 개최하고 있다.
이후 '지하철 1호선'이 지하로 지나는 '구덕로'를 건너
'자갈치시장'으로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12:33) 현대식 건물로 개축된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의 옛 이름은 남빈(南濱)이었다.
남빈은 '남쪽의 물가'라는 뜻으로 주먹 크기의 굵은 자갈들이 해안가에 깔려 있는
아름다운 어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매립과 매축을 통해 남항이 건설되면서 포구, 항구가 있다는 뜻의
남포(南浦)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남빈정으로 불렸고, 남포동이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남항 주변에는 부산수산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어시장과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세운 부산 어업조합이 있었다.
1935년에는 공설시장인 중앙도매시장이 개설되면서 수산물의 집산과 유통을 통제했다.
한편 시장을 중심한 해안 일대에는 소형 고기잡이배를 통해 잡힌 해산물을 파는 노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훗날 자갈치시장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해안가에 널려 있던 자갈과 어시장에서 팔리던 물고기를 의미하는 ‘치’ 자가 붙어
자갈치라는 이름이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었고, 생계를 위해 시장 주변에서
노점을 형성했다.
해안가에는 부산어패류 처리장 건물을 중심으로 판자로 지은 가게들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노점들로 이루어진 시장이 형성되었다.
부산시는 한국전쟁 이후 판자촌을 정비하고, 1969년에 건물을 지어 1970년
자갈치시장을 개설했고, 1972년 '자갈치시장'으로 정식으로 시장 등록을 하였다.
1985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서 점포 231개가 소실되었는데, 다음 해 현대식 건물로
개축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6년에 다시 현대식 건물로 리모델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갈치시장' 건물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좌.우측으로 '판때기 장수'의
난전이 길게 줄지어 있고~
'자갈치시장'에는 과거 노점의 전통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른바 ‘판때기 장수’라고 부르는 아주머니들이다.
시장 동쪽에는 살아있는 곰장어를 구워 파는 판때기 장수가 있고, 해삼과 멍게를 파는 판때기 장수,
삶은 고래고기를 눈앞에서 썰어주는 판때기 장수, 미역이나 톳 나물 등을 파는 판때기 장수들이
촘촘하게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판때기는 널빤지의 속어로 노점을 가리킨다.
즉, 널빤지로 좌판을 만들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판때기 장수들이다.
줄지어 있는 판때기 장수들의 모습은 다른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광경이다.
흔히 자갈치 아지매로 불리는 판때기 장수들이야말로 자갈치시장의 실제적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갈치시장' 판때기 난전을 지나면,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는
'충무동 해안시장'으로 들어서고~
단골집인 '영덕집'에 들려 선지국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충무동 해안시장 상인교육관'을 지나고~

현대화된 '충무동 새벽시장' 안으로 들어서서, 우측의 입구 방향으로 나간다.
충무동 새벽시장
50년 넘은 노후 시설과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던 부산 서구 충무동 새벽시장이
최근 중소 벤처기업부 '2020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지원 사업' 공모에서 시설 현대화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사업비 약 24억 원을 투입하여 시장 내 '김해 골목'에 비 가림 시설인
길이 256m 폭 5.5m 규모 아케이드를 설치하였다.
부산 최대 상권에 위치한 충무동 새벽시장에는 농·수산물, 정육, 각종 반찬류를 주로 판매하는
310개 도·소매 점포가 상권을 이루고 있다.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한 데다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아
하루 유동인구가 1만 5천 명으로 전통시장으로서 뛰어난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다.
(12:53) '충무동 새벽시장' 출입구로 나가 '충무대로'를 만나면 좌회전이다.

(13:00) '부산 공동어시장'을 지나고~

부산공동 어시장
수산업 협동조합을 비롯한 5개 조합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어시장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직된 부산 어업조합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63년 부산종합 어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개설되었다가 1971년에
부산공동 어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3년 개설 당시에는 부산항 제1부두에 있었지만 부산항이 북항과 남항으로 나뉘고,
북항이 무역 전용 항구로 바뀌면서 197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부산공동 어시장은 100t급 어선 48척이 계류할 수 있는 항만 시설과 냉동공장,
위판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전국을 상권으로 하고 있다.
부산공동 어시장에서 출하되는 어류들은 부산, 서울, 대구의 순서로 많이 팔려나간다.
현재 부산 수산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송도 해수피아' 사우나 건물을 지난다.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져 나가는곳, 'GS칼텍스' 주유소와
'미송 하모회 장어 샤브샤브' 식당 사이길로 들어서고~

(13:12) '부산 남항' 해변 방파제를 따라 길게 진행이다.

방파제 너머 테트라포드에 오르지 말라는 섬뜩한 포스트

이후 교량 위로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남항대교' 아래를 통과하고,
갈맷길 4-1구간 안내도와 이정표를 지나, 송도 해상 케이블카 하부 정류장 방향으로 진행이다.
(13:20) 도로 건너편으로 '송도 케이블카 하부정류장'을 지나고~

송도해상케이블카
우리나라 제1호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의 옛 명성을 되살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통해
2017년 6월 ‘부산에어크루즈’라는 브랜드로 재탄생하였다.
최고 86m 높이에서 송도해수욕장 동쪽 송림공원에서 서쪽 암남공원까지 1.62km 바다 위를
가로질러 운행함으로써 바다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짜릿함과 동시에 송도해수욕장, 부산 영도와
남항대교, 송도 해안둘레길, 파도치는 기암 절벽까지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거대한 공룡들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다이노 어드벤쳐’와 국내 최초의 케이블카
뮤지엄 ‘송도도펠마이어월드’, 아시아 최초의 공중그네 ‘VR스카이스윙’ 등 다양한 체험시설과
테마시설을 통해 관광형 케이블카로써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북섬' 입구에 도착하니 태풍 피해로 통행이 제한되었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할수밖에~

거북섬(龜島)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의 송도 해수욕장 동쪽 앞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북쪽으로 소나무로 뒤덮인 송림 공원과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3,129㎡로 섬의 모양이 거북과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섬은 본래 바다로 둘러싸여 있던 소나무가 자생하는 낮고 작은 섬으로 송도(松島)라고도 불렸다.
일제 강점기 일본 거류민들에 의해 송도해수욕장이 개발되고 ‘수정(水亭)’이란 휴게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현재 옛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거북섬 둘레에 남은 반석으로
옛날의 윤곽만을 추정할 수 있다.
1970~80년대에는 다이빙대와 보트, 송도 주위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오르내렸던 케이블카,
송도와 거북섬을 연결한 구름[흔들] 다리가 있어 신혼부부들의 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서구청의 송도 지역 관광지 종합 개발 계획으로 주변 환경 정비가 이루어졌다.
구름다리는 2002년 4월 철거되고 70m의 연륙교로 바뀌었으며, 한때 거북 바위 위에 난립했던
음식점들도 철거되었다.
섬 주위의 갯벌은 조개를 채취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거북섬 위의 콘크리트 구조물도
모두 정비되어 송림 공원과 함께 해안 친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굴 통로를 지나 거북섬에 오르면, 이 섬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한
'젊은 어부와 인용(人龍)'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 손에는 여의주를 든 아리따운 인용(높이 약 1.8m)과 헌헌장부로 표현된 젊은 어부
(높이 약 2m)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며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전설 탓인지 청춘 남녀가 거북섬을 찾아 고백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어부와 용왕 딸의 사랑 이야기'
『옛날 송도에 홀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는 효성이 지극한 어부가 살았는데 고기잡이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큰 파도를 만나 용이 산다는 용굴로 잠시 피신을 하였다.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던 어부는 큰 상처를 입고 용굴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용왕의 딸로 송도 앞바다를 지키는 용이었는데, 악행을 일삼는 바다 괴물과 싸우다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어부는 육지를 오가며 약초를 구해와 그 여인을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여인은 어부를 사랑하게 되었고, 두 사람을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용왕은 처음에는 노하였지만 이들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된 뒤에는
결혼을 허락하고, 딸에게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용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달의 기운을 받아 천 일을 기도하되 햇빛을 보면 안된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달빛이 스며드는 용굴 안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 지 999일째 되는 날 갑자기 나타난 바다 괴물에게 쫓겨
그만 햇빛을 보고 만다.
결국 용왕의 딸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용인 인용이 되고 만다.
뒤늦게 배를 타고 온 어부는 괴물과 싸워 괴물의 가슴에 칼을 꽂아 죽였지만 어부도 상처를 입고
송도 깊은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용왕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죽은 어부를 거북바위로 만들어 영생하게 하였고, 이들의 사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거북섬을 찾는 남녀에게 사랑을 이루게 해 주고, 또한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는 재복과 장수를 준다고 한다.』
'송도 구름 산책로' 또한 태풍 피해로 통행이 제한되어 탐방 생략이다.

(13:25) '송도 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앞바다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설치한 해상 조각 작품인
고래 조형물이 머리와 꼬리만 물 위로 내밀고 있고~

송도해수욕장(松島海水浴場)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1913년에 개장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으로,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송도유원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해수욕장을 개발한 것이 시초이다.
1987년과 2003년에 태풍 ‘셀마’와 ‘매미’로 인해 다이빙대가 유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하여
해수욕장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기도 하였다.
2013년에 해수욕장 개장 100주년을 기념하여 송도 100년사 편찬, 추억의 다이빙대 복원,
전국 해양스포츠제전, 국제 콘퍼런스 등의 사업이 펼쳐졌다.
송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해수욕장 주변의 산에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거북섬에 소나무가 많아 송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는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작은 반도를 야망대(夜望臺)라 불렀는데 이곳에 소나무가
울창하다는 데에서 송도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도 하며, 송도로 불리기 이전에는
거북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송도해수욕장의 백사장은 길이 약 800m, 너비 약 50m에 달한다.
해수욕장의 파도가 조용하고 물이 깊지 않아 천혜의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송도해수욕장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모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백사장 유지를 위해서는
매년 모래를 공급해야 한다.
대형 원형 분수대 앞을 지난다.

(13:35) '현인' 동상이 세워진 '현인 광장'

'송도 100주년 기념공원' 타임캡슐 매설 표시 조형물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 개장 100주년을 맞아 해상 케이블카,
구름다리, 해상 다이빙대, 포장 유선[해상 놀잇배] 등 송도해수욕장 4대 명물의 미니어처와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 등을 전시하는 기념공원이 2013년 개장되었다.
해상 케이블카는 1964년 우리나라 최초로 420m 구간의 해상 케이블카가 운행되었고,
구름다리는 1965년에 송림공원에서 거북섬 간 150m 길이로 설치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이용했지만 시설 노후 및 잦은 태풍 피해로 2002년 4월 철거되었다.
'서구 종단 트레킹 숲길 안내도'

'송도 해안 볼레 길 안내도'

'송도 해양 레포츠센터'를 지나고~

(13:40) 갈맷길 이정표와 서구 관광안내도를 보면서, 좌회전하여
'오션파크 광장'으로 들어간다.

송도 오션파크 광장의 'Sing a 송도' 조형물과 달과 토끼 형상 조형물

'송도어항방파제'

'해안 볼레길' 입구

이곳 또한 태풍 피해로, 현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해안 볼레길'은 부산 지질공원의 멋진 절경을 볼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우측 우회로로 진행한다.
(13:47) 급경사 계단길을 올라서고~

(13:50) '암남공원로'로 올라서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좌측 아래로 내려보면 '송도어항방파제'과 '해안 볼레길' 테크 탐방로가 보이고~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인 손동인(孫東仁) 의 '아침' 시비를 지난다.

(14:00)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기념석

거북 바위(The Turtle Rock)는 1950년 12월 31일 6․25전쟁에 참전한 뉴질랜드
「SS올몬드」 군함이 부산에 도착하여 첫번째 캠프를 설치한 송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뉴질랜드 오클랜드로부터 전달받은 '거북이' 형상의 기념석이다.
'기다리는 마음' 시비

(14:04) '암남공원' 입구 표지석

(14:05) '암남공원' 정문

암남공원(岩南公園)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진정산 일대에 조성된 자연공원으로, 군사 보호 구역에 묶여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7년 4월 시민들에게 완전히 개방되었다.
‘암남’이라는 지명은 아미골, 아미산의 남쪽이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암남공원은 산책로 1.9㎞, 해안 산책로 1.2㎞를 포함하여 총면적이 553,277㎡이다.
천혜의 해안 절경을 자랑하는 암남공원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안을 따라
바다를 보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약 1억 년 전 형성된 퇴적암, 원시림, 100여 종의 야생화와 370여 종의 식물 등
도심에서 보기 드문 자연 생태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원시 자연공원으로,
해양성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암남공원에는 용이 살았다고 전하는 용굴, 사람의 콧구멍과 같이 두 개의 굴이 나란히 있는 코굴 등
10여 개의 해식 동굴이 있다.
공원에는 부산 비엔날레에 출품된 조각 작품[14점], 광장 2곳, 구름다리, 팔각 정자, 낚시터,
전망대, 관리 사무소,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의 체육 시설을 비롯하여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밖에도 공원의 해안선 일대에는 공룡 발자국과 신석기 시대 흔적이 남아 있다.
'송도 용궁 구름다리' 또한 태풍 피해로 입장통제 되었음을 알린다.

‘안드레아스 킬린’의 <열린 문> 조각 작품
2002년 해운대 올림픽 동산에 전시되었던 부산 국제 비엔날레 전시 작품들이다.

《열린 문》 - 안드레아스 킬린(독일의 대학교수)
작가는 비슷한 <열린 문> 시리즈를 많이 제작했다고 한다.
독일이 통일된 후에도 생겨나는 갈등과 통합, 그리고 소통의 문제의식을
<열린 문>이라는 개념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서로 상충하고 보완하는 양상을 띄면서 분단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또 다른 소통의 문제를 "열린 문"이라는 개념 설정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특히 이 작품은 한국의 분단 현실을 대입하여 해석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평화의 메시지' 안치홍, 2003년, 재질 :브론즈

《평화의 메시지》
전쟁이라는 무모한 행동으로 인류는 공포의 떨고 있다.
죽고 죽이는 슬픈 현실을 언제까지 머릿속에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나의 작은 표현으로 인류가 원하는 평화를 염원해 본다. [작품 설명석 내용]
'암남공원'에서 바다 건너 '동섬' 상부를 연결하는 127m의 '용궁 구름다리' 갈림길 앞 포토존

'송도 용궁 구름다리' 또한 태풍 피해로 입장통제되어 탐방 생략이다.
송도구름다리
1965년에 송림공원에서 거북섬 간 150m 길이로 설치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이용했지만 시설 노후 및 잦은 태풍 피해로 2002년 4월 철거되었다.
18년 만에 이곳에 복원된 '부산 송도 용궁 구름다리'가 2020년 6월 4일 개장했다.
송도 해상 케이블카 갈림길 앞 암남 공원과 바다 건너 작은 무인도인 동섬 상부를 연결하는
송도 용궁 구름다리는 길이 127.1m, 폭 2m에 달한다.
(14:10) '두도전망대' 방향의 계단길을 올라간다.

제법 흔들리는 '흔들 다리'를 건너간다.

'암남공원' 해안 절벽 바라보고~

'6번 이정표'의 희망정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급경사 오르막길이 계속되고~
오늘 구간 최고 고도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다.

(14:30) '포구나무 쉼터'를 지난다.

포구나무 쉼터
이곳 암남공원 포구나무(일명: 팽나무)는 예부터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처녀는 물론
해안가 초병들이 유일하게 식수를 구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
또 그 옛날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아낙네들이 고개 너머 이곳 포구나무 아래까지 찾아와서
먼바다로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면서 흰색, 붉은색 천을 나무에 두르고
시원한 샘물 한 잔을 정화수로 받쳐 기원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팽나무는 남부 지방에서는 폭나무, 포구나무 등으로 불리며, 제주에서는 폭낭으로 불리는데,
민가 근처 평지에서 자란다.
포구 나무란 이름은 주로 포구(浦口)에서 방풍림으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인간과는 늘
함께해 온 친숙한 나무이면서, 고목은 마을의 당산나무로도 여겨지는 나무다.
또 다른 '희망정' 갈림길에서 좌측의 '두도 전망테크 0.8km' 방향의 내리막길이다.

사랑계단 포토존

기억나무 포토존

'두도 전망테크 갈림길'의 암남공원 안내도

이곳에서 남파랑길은 직진 방향 '두도 전망대'를 다녀와서,
우측 아래에 있는 '암남공원' 후문 방향으로 진행해야 된다.
송도 반도 하부다대포층


8천만 년 전 이곳은? - 하부다대포층
약 8~7천만 년 전 송도 반도 지역에는 지각이 벌어지고 갈라지면서 그릇 모양의
다대포 분지가 만들어졌고, 이 분지에는 다대포층이라는 퇴적층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흐르는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하부다대포층이 이 분지에 퇴적되고 그 후
분지가 깊어지면서 호수로 변화하여 상부다대포층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부다대포층이 해안절벽을 따라 연속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부다대포층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강에서 운반된 퇴적물이 퇴적된 붉은색의
사암 및 실트암, 회색의 역암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화산성 물질이 많은 상부다대포층과는 달리, 화산성 물질의 함량이 적은 특징을 보입니다.
붉은색 지층에서는 환원점, 생물교란 구조, 캘크리트 등의 다양한 지질 기록과
역암에서는 쳐트편, 사층리, 깎고메운구조 등의 흥미로운 지질 기록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 쳐트 : 스페인 지명 Chert/ Xert에서 처음 이 암석이 추출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규질 미화석(방산충 연니, 규조질 퇴적물 등)이 석화한 것으로 굳고 단단해서 원시인들이
불을 만들 때 사용한 부싯돌(flint)이라고도 한다.
또한 원시인들이 이돌로 화살촉, 돌도끼 등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허그나무 I LOVE YOU 포토존

(14:42) '두도 전망대' 도착이다.

'두도' 바라보고~

불의 신(VULCAN)이 사는 호수 - 두도
두도 지질명소는 부산광역시 서구에 속한 섬으로, 송도 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무인도입니다.
동백나무, 비쭉이, 해송 등의 다양한 자생식물과 바다 산호, 부산의 상징 새인
갈매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려한 한려해상의 경관을 만끽할 수 있으며, 해안절벽을 따라서는
백악기 말에 퇴적된 하부다대포층과 화산암들이 절경을 이룹니다.
두도를 이루고 있는 하부다대표층에는 공룡알 둥지 화석, 석화목,
석회질 캘크리트 등의 퇴적 기록과 정단층 및 주향이동단층, 꽃다발 구조, 암맥 등의
독특하고 다양한 지질구조들도 관찰되며, 해안가를 따라서는 해식절벽,
해식동굴 등의 다양한 침식지형들이 잘 나타납니다.
새들의 땅, 두도
두도는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섬입니다.
이 땅 역시 빙하, 화산, 지진, 해일로 지표면이 수많은 침강과 융기를 반복했겠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바닷가에 두루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서남해안 일대는 거대한 초원이나 호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암남공원 일대도 장엄하고 변화무쌍한 해안단층과 암반이 분포되어 있고
갯바위에는 공룡발자국을 연상시키는 작은 웅덩이나 구멍들이 산재하며 특히 저 두도에는
학술조사결과 공룡알과 씨앗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한자의 섬도(島) 자는 뫼 산(山) 자 위에 새조(鳥) 자를 얹어 놓은 것입니다.
독도처럼 인적 없는 섬들이야말로 수많은 바닷새들이 자유롭게 비상하며 짝을 짓고
알을 품는 가장 안전한 서식지인 것 같습니다.
두도민이라도 본래의 주인인 재갈매기와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치고 민물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철마다 찾아오는 21세기 원시의 섬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두도'와 '감천항' 앞 '뜬(일자) 방파제'

감천항 바라보고~

딱! 살기좋은 도시 서구... 과연 그럴까???

서구 36번 산불 초소 옆을 지나는데, 이 녀석이 얼마나 살갑게 구는지~
녀석과 잠시 놀다가 간다.

'암남 공원 안내도'가 있는 갈림길로 되돌아 나가,
갈맷길 14번 이정표의 '암남공원 후문' 방향으로 간다.

비밀의 화원... 엄동설한에도 황금술잔을 볼수 있는곳이다.

(15:02) '희망정'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콘크리트 구조물...

'안시형' 작가의 '숨 쉬는 돌(2003)'이란 작품이다.
돌 사이를 드나들 수 있게 하여 푸른 숲에서 웃고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 본다.
부산국제수산물도매시장 갈림길을 지난다.

원형 철재를 돌이 짓누르고 있는 형태의 조각인데...

인간 존재를 위하여 버리는 것은 가능한가?(2002) / 토다 유스케(일본/ 1962)
가공된 철재와 채석된 그대로의 석재를 사용하여 물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개의 상이한 재료가 함성(物性)의 대비와 아울러 행위와
그 결과 또는 원인과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두 존재 간의 역동적 상호 교감이
미니멀리즘과 같은 단순한 미학적 논리와 인과(因果)의 법칙과 같은
동양적 불교사상의 통합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풍차 모양의 화장실을 지나고~

'해원 냉장' 앞, 멋진 해송이 있는 쉼터 정자 앞에서 우회전 하여 내려간다.

(15:12) '암남 공원 후문'

'원양로'로 나가 우측 감천항 방향으로 진행하고~
'모지포 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후 우회전하여 올라간다.

좌측으로 '호텔쿼츠', 우측으로' 장군성숯불갈비집' 사이로 이어지는
'암남공원로'를 따라 길게 진행이다.

이 '암남공원로'는 우측의 진정산과 장군산 산허리를 감아도는 임도다.


'감천항' 동편 부두 바라보고~

(15:37) 은근한 오르막길이 끝이나고,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 '암남공원로'는 간혹 순찰을 도는 경찰 차량이 오가는 것 외에는
일반 차량 통행은 매우 뜸한 도로다.
(15:43) '부산'서구 에코센타'를 지나고~

시원물산(주), (주)부산냉장 건물을 연달아 지난다.

서구 경계지역을 지나고~ 행정구역이 '사하구'로 넘어간다.

(15:50) 도로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나가는 갈림길에서,
'암남공원로'를 버리고 좌측 아래 주택가로 이어지는 등로로 내려간다.


잡풀이 무성한 등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면,
갈맷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우측으로 진행하고~

(15:54) 감천동 마을길(원양로 356번 길)로 내려선후 좌회전하여 골목길을 이어간다.

(15:57) '원양로'를 만나면 우회전하여 도로를 따라 간다.


(16:00)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나무(수령 400년의 팽나무)를 지나고~



서부 안심수영장, 서부 풋살센터 건물이 있는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감천 사거리 방향으로 진행이다.

(16:07) '감천 사거리'

(16:10) '남파랑길 부산3코스 종점'인 감천 나누리파크&부산빛드림본부입구 도착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3구간 답사 마무리를 한다.
이후 감천사거리.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고,
17번 시내버스타고 자갈치.지하철역에 하차후,
지하철1호선 환승하여 명륜동.지하철역에 하차,
명륜동.버스정류장에서 12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