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3코스-2구간 (부산진시장-영도대교)
일자: 2013.7.27
답사코스: 부산진시장~좌천동/가구거리~정공단~증산공원~수정동/산복도로~차이나타운특구~중앙동/40계단
~용두산공원~국제시장~자갈치시장~영도대교
gps거리: 13.2km 널~널 4시간40분
부산지하철2호선을 타고 서면역에서 1호선으로 바꾸고, 범일동지하철역에서 5번출구로 빠져나와 도보로 부산진시장에 도착,
부산의 해안을 잇는 “갈맷길(263.8km)”의 제3코스 제2구간을 걸어본다.
부산진시장
부산을 대표하는 전국3대 재래시장으로 조선영조46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전하는
조선통신사가 영가대(永嘉臺)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다는데~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부산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산진성 서문 밖에 있는 미곡과 건어물의 집산지로 4일과 9일장을 열었다” 는 기록이 있어
부산진시장의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음을 알수있다.
1913년 상설시장으로 개장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백년의 전통을 간직한 혼수.의류 특화 전문시장이다.
부산진시장과 좌천동을 이어주는 지하도
좌천동 가구거리
일신기독병원옆 벽화
정공단(鄭公壇) 부산문화재 제10호/ 부산시 동구 좌천동 473번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釜山僉使) 충장공(忠壯公) 정발(鄭 發)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鄭公壇) 이라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열녀 애향,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의 단을 마련해 두었다.
조선 영조 42년(1766) 당시 부산첨사로 있던 이광국이 단을 설치하여, 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을 모두 몰수하였으나,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부산첨사 정발(鄭發
1553~1592) 자는 자고(子固), 본관은
경주(慶州)
1553년(명종 8년) 경기도 연천 출생 25세(선조 10년) 무과급제 선전관에 등용
선조 24년 절충장군으로 부산첨사에 배명
1592년 4월 14일 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많은 왜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다
무인답게 장렬히 순절하였다.
이에 성중 군민은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으로써 항전하다 모두 죽어갔다.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매우 굳세어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죽였다.
난 후 잔혹한 왜인들은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첫 싸움에서 장렬한 전투를 치루었다고 한다.
장군의 묘소는 경기도 마전에 있다.
근대 여성교육과 부산지역 3.1운동 발원지인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부산진 일신여학교는 호주장로교선교회 여자전도부 소속 맨지스와 페리 선교사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위해
1895년 10월15일 좌천동의 한 초가에 3년 과정의 소학교를 설치하므로 시작되었다.
(1905년 4월 15일에 현재의 현대식건물을 준공하였다.)
여성이 공적 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절, 초대 교장이었던 맨지스(B. Menzies, 1856-1935 (1891-1924:한국체류))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의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신념으로 버려진 아이 3명을 데리고 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신여학교는 민족과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일꾼을 키우고 자주, 자립의 자세를
키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종교적 색채를 띤 덕분으로 일제가 식민지 교육을 강화했던 1915년까지 일제의 강력한 통제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연스레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정신을 일깨우며
항일 운동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건물은 서양식으로서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례가 드물고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례와 균형미가 돋보이는 휼륭한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초기 학교 건물로는 손꼽을 만큼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으로서, 그 동안 이 건물이 교육시설로서 맡아
온 역할과
기독교의 전래과정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교육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지난구간 걸었던 길을 되집어 보고~
급경사 계단길의 시작
좌천동 행복마을의 무지개
이후 증산공원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진행하다 바라본 증산공원內에 있는 왜성의 흔적
증산공원
갈맷길 표시 리본 뒤로 산의 중턱에 형성된 동구 범일동과 진구 가야동을 잇는 산복도로
범일배수지 공원
증산 이야기
성북고개
수정동과 범일동을 넘던 고개로 아리랑을 부르며 올랐다고하여 아리랑고개라고도 하는데
6. 25 전쟁 시절 타향민들의 애환이 많이 담겨 있는 한 많은 고개이다.
이곳 성북고개에서 산의 중턱에 형성된 동구 산복도로 망양로를 따라 좌측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지루한 행군이 시작되는데, 수성초등학교, 수정배수지, 선화여중을 차례로 지난다.
수정동 산복도로
진행하다 바라본 부산항 일대
민주공원
영도방향
금수사입구에서 망양로를 벗어나 초량로를 따라 내려선다.
이후 부산고등학교 입구에서 초량성당을 지나고,
인근에 있는 소림사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차이나타운 특구지역
부산에서 유일한 중국풍 거리인 초량동 차이나타운(상해거리)와 외국인의거리 일원 11만5천 여㎥가
2007.7.16정부 (재정경제부)로부터 차이나타운 지역발전 특구로 지정받았다.
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나라가 오늘날 초량 화교 학교 자리에 영사관이 설치된 우 중국(청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면서 그 점포가 있던 거리를 "청관거리" 라 부른데서 유래되었으며~
1993년 중국 상해시와 부산시가 자매결연을 채결하여 1998년 양 도시간 상장거리를 조성키로 합의함에 따라
부산시는 이곳 초량동에 "상해거리" 를 조성하였다.
갈맷길은 차이나타운에서 중앙동 쪽으로 해서 40계단으로 이어지는데,
중앙동40계단 문화관 갈림길에 있는 조각물을 보니 잊고 있었던 나의 추억속에 한 조각들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중앙동40계단
40계단은 6 · 25사변 피난시절 많은 피난민들이 그 주위에 판자집을 짓고 살면서 부산항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파는 장터로 피난시절 애환이 많이 담긴 곳이다.
백산기념관 /부산시 중구 동광동
백산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의 기념관이다.
안희제 선생이 세운 백산상회는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역활을 하였다.
백산 안희제 선생(白山 安熙濟 先生)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백산(白山),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졸업하고,
동래(東萊)와 의령에 각각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다.
1909년 서상일(徐相日)· 박중화(朴重華)· 신성모(申性模)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북간도와 시베리아를 돌면서 독립군 기지를 돌아보고 3년 후에 귀국,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열고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그곳을 국내 독립단체의 연락처로 삼았다.
1925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인수,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로 개칭하여 사장이 된 후
총독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다.
1933년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둥진청[東京城]에 발해(渤海)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교포의 생활안정과 청소년교육에 힘쓰는 한편, 대종교(大倧敎)의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며 종교를 통하여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구금된 후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무단장[牧丹江]병원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동광국민학교 옛터
약조재찰비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
부산 시가지와 영도(影島)가 내려다보여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아낌을 받는 부산의 명소이다.
용두산공원 내에는 부산의 지나간 역사를 반영해주듯 4·19의거 기념탑,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 국민교육헌장비 등
동상과 비(碑)가 많이 세워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용두산의 모양이 가마솥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고도 했고, 임진왜란 후에는 용과 같은 산세가
왜구들을 삼켜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용두산 신사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6·25전쟁 후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판자촌 지대를 형성했으며,
2차례에 걸친 피난민 촌락의 대화재로 울창한 숲은 민둥산이 되는 등 초라해졌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우남공원(雩南公園)이라 개칭하고
녹화사업에 힘써 다시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했으며, 4·19혁명 후 다시 용두산공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원 정상에는 1974년에 건설한 부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높이 120m의 부산탑이 세워져 있는데
시야가 좋은 날은 멀리 쓰시마 섬[對馬島]까지 보인다고 한다.
특히 부산탑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의 야경은 이곳의 큰 자랑이다.
현재 위치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에 위치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진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면서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의 반환과 함께
부산시가 인수해 2003년 7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부산근대역사관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부산의 근대거리관,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부산의 근대 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조선 수탈과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주제로 한 상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별도의 관람료는 없다.
국제시장/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속칭 “케네디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또한 부평동의 “깡통시장”은 외제물품시장으로 유명하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1990년 현재 국제시장번영회에 등록된 상인수는 750명이며, 총점포수는 1,489칸, 하루평균 이용고객수는 2~3만 명이다.
주거래품목은 의류·일용잡화·가전제품 등이며, 기계공구상·직물점이 모여 있다.
보수동책방골목
부산의 근대역사와 문화의 태동지인 보수동 책방골목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헌책방골목이다.
자갈치시장/ 남포동 남항의 바닷가에 있는 부산광역시의 대표적인 생선시장이다
1945년 광복 후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렸다.
자갈치 시장의 이름의 유래는 한국전쟁 이후 자갈밭에 있었던 시장이기에 자갈밭과 곳, 장소를 나타내는 처(處)가
경상도 사투리로 발음하게 되어 치가 되어 자갈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시장 건물의 구조는 7층으로 되어 있으며 옥상에 하늘공원이 있다.
1층은 생선.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곳이고 2층은 대부분의 횟집이 있다.
시장의 건물 구조는 1번 날개 : 도약 - (갈매기가) 육지로부터의 도약
/ 2번 날개 : 비산 - (도약한 갈매기가) 하늘로의 비상 / 3번 날개 : 활공 - (비상한 갈매기가)
푸른 하늘에서의 활공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시민들의 넓은 휴식 공간의 친수공간은 바다로의 열림,
도시로의 개방을 형상화하여 시공되었고 벽면을 전체를 유리로 시공하여 투명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해양도시 부산의 위상에 걸맞은 국제적 수산시장으로의 재탄생, 지역상권 활성화 및 부산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자리 매김하여 세계 제일 어패류 종합시장으로 국제관광 명소화의 기대 효과를 가지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또한 멋진 경관 조명 연출 및 문화 행사 개최로 시민들이 보다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자갈치아지매
남포동 건어물 종합상가
영도대교(影島大橋, Yeongdo bridge)
중구와 영도구 사이에 위치하며 1934년 11월에 길이 약 214.63m, 너비 약 18m로 준공되었다.
부산광역시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며, 일제시대와 전쟁의 수탈과 애환 그리고 이산과 실향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리이다.
개통 당시는 다리 이름이 부산대교였으나, 1980년 2월 부산대교가 개통되어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도대교는 부산 최초로 건설된 연륙교이며 한국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 형식의 다리이다.
개통 당시에는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록 인근 김해· 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1935년2월부터 영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교량위로 전차가 다니기도 했으나, 교량이 고정된 이듬해
1967년5월 2일 폐쇄되었다.
영도대교 부근에는 당시 부산제일의 명물이었던 도개식 영도대교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한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와
6.25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대중가요”‘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 건립된 “현인노래비” 등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영도대교 건너편에 있는 부산대교
이곳 영도대교에서 계획했던 대로 남항대교로 가서 갈맷길3코스 2구간을 마무리해야 되지만 너무더워 걷기가 싫어진다.
결국 나자신과 타협하고 이곳에서 갈맷길3코스 2구간을 마무리하고~
남포동 지하철역 상가內에 있는 카페에서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며 더위를 몰아낸후
아침에 진행했던 순서를 역으로 하여 개금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