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맥

땅끝기맥4차 (풀치재~죽정마을)

제이제이 2014. 7. 7. 17:41

일자: 2014.7.6

산행코스: 풀치재~누릿재~양면석불~통천문(通天門)~천황봉(天皇峯)~바람재~베틀굴~미왕재~도갑산(道岬山)

~330/땅끝기맥.주지봉갈림봉~주지봉(朱芝峰)~죽순봉~책굴~문산재~죽정마을

인원: 부산맥클럽 (39)

GPS거리: 16.8  널널/8시간30

 

13번국도와 829번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풀치재(191m)

 

일제시대에 크게 뚫린 풀치재는 한때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현재는 통행하는 차량을 볼수가 없을 정도인데

지난 2000풀치터널이 뚫리고 4차선 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버려진 도로가 되고 말았다.

예전에 풀치재. 불티재. 풋치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왔으나 최근 국토관리청이 터널이름을 짓기위해

이곳 강진. 영암 지자체와 상의한 결과 풀치재로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들머리에는 국립관리공단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출입금지팻말이 ‘출입하는 곳’임을 확인시켜 준다.

 

풀치재에서 사자봉갈림길까지는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 지역으로 산꾼들의 진입을 막고있는데

이 땅을 사랑하며 마루금을 이어가는 산꾼들에게 관계당국의 배려는 없는 것일까?

짐승이 지나가는 길도 자연보호라는 미명하에 일부러 통로까지 만들어주는 마당에

사람은 왜 못 지나가게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초반 절개지 비탈만 올라서면 산길은 완만한데 발 아래 13번국도 풀치터널을 지나는 차소리가 요란스럽다.

그렇게 처음오른 345봉 정점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는데, 길은 다시 내리막길이다.

 

누릿재 (241m)

 

영암읍 개신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를 잇는 유서깊은 고갯길이다.

고개언덕에 풀밭이 많아 가을에 누런색을 낸다하여 황토고개. 황치(黃峙). 누릿재라 불리운다.

예로부터 해남. 강진 등 남쪽지방에 거주하는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때 이 고개를 넘었고,

정치적 탄압을 받은 선비들이 남도나 제주도로 귀향하는 길목으로 이 고개를 넘어갈 때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곳이다.

 

또한 삼남의 교통적 요충지로 해남. 강진 사람들이 영암군으로 장을 보러 다녔고

특히 남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과 영암과 나주에서 생산되는 쌀과 보리를 서로 바꾸려고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 길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유배를 올때 넘어왔던 길이기도 하다.

능선을 넘어가는 묵은 고갯길에 성황당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잠시 어수선한 비탈을 살짝 넘어 내려가니 우측 사자저수지쪽에서 수렛길 수준의

조은길이 올라와 정면으로 이어지는데, 여기가 더 누릿재 답다.

 

 

정면에는 대나무로 얼기설기 발을 엮어 출입을 못하게 막아놨다만~

옆 틈으로 돌아 들어간 흔적들은 그 차단막을 비웃는 듯 하다.

 

 

 

한동안 널찍한 길 따라 올라가는데 좌측으로는 월출목장의 경계로 보인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널찍한 조은길은 좌측으로 돌아가고~

땅끝기맥 길은 산죽밭 사이로 좁은길이 나있다.

고도를 높일수록 앞 능선 너머로 삐쭉삐쭉한 암봉이 안개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지나온 능선

 

사자봉 암봉

 

키높이 산죽과 넝쿨, 온갖 잡목들이 밭을 이룬 지대를 지나면서 완전 물귀신으로 변한다.

 

GPS가 가르키는 고도555봉 정상부의 전경

 

자연석으로 된 커다란 금강거사해주최공지묘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지금은 후손들의 손길이 끊어졌는지 잡초가 무성해서 묘인지 알아 볼수가 없다.

주변에 석물들도 흩어져 있고, 옆에는 봉분인지 뭔지도 못 알아보게 풀이 뒤 덮힌채 방치되어 있다.

 

잠시후 산죽속에 [←양면석불]이라 쓰인 퇴색한 간판이 눈에 띄고~

 

산죽이 간판 높이만큼 자라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배낭을 내려놓고 간판이 가르키는 좌측 비탈 아래로 1분정도 내려가니 숲속에 양면석불이 있다.

 

 

한뼘 정도 되는 두께의 자연석판 앞뒤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가사장삼에 가부좌를 틀고...

최소한 문화재로 지정될만해 보이는데, 그대로 풀숲에 방치되어 있다.

 

주변을 살펴보니 예전에 절터라도 되는 듯 하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 진행하면 산죽은 끝이나고 암릉이 시작되고~

 

 

고사목 받침을 딛고 올라가야 되는 로프지대를 만난다.

 

우측 사자봉으로 오르는 안부를 넘고 좌측의 봉우리는 사면으로 진행한다.

 

 

 

달구봉(깃대봉 673Mm)은 알을 품고있는 암닭의 형상이라 하는데 뭐가 보여야 말이지~

 

조선 영조임금때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은 화승조천”(火乘朝天)의 지세라 하였다.

아침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뿜는 기상이라고~

실제 월출산은 원적외선을 방출하여 약석이라 불리는 맥반석으로 쓰이는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이다.

 

 

 

천황사를 들머리로 구름다리를 거쳐 올라온 천황봉 주등산로와 만나고~

 

보기좋은 넘들~

 

경포대삼거리 갈림길 [←경포대2.6km]

 

경포대하면 강릉에 있는줄 아는데 여기도 경포대가 있다.

월출산이 거느린 여러계곡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있는 금릉 경포대 계곡이다.

금릉은 강진의 옛이름이며 경포대는 계곡에 달 그림자가 아름답게 비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릉의 경포대와 이름은 같지만 浦가 아닌 布(베포)를 써서 鏡布臺로, 바다가 아닌 산중의 계곡이다.

천황봉과 구정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2km에 이르는 비경의 골짜기는

크고 작은 바위 사이를 맑은 물이 굽이치며 곡류와 폭포수를 빚어내는 선경을 자랑한다.

 

급경사 계단길이 이어지고~

 

통천문(通天門)

 

하늘로 통한다는 문인데, 폭은 1m도 안되어 한사람 겨우 빠져나갈 만한 굴이다.

마주보고 교행이 안되는 좁은 통로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들의 필수적인 포토라인이 되어 발길은 더 머뭇거려진다.

 

천황봉 (天皇峯 809.8m △영암26)

 

땅끝기맥 최고봉이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하나 없어 눈길 가는데로 막힘없는 조망을 선사하는 곳인데 오늘은 영 꽝이다.

 

월출산(月出山)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 또는 월내산(月來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러왔다.

천황봉(天皇峯)을 주봉으로 향로봉, 구정봉(九井峯), 사자봉(獅子峯), 도갑봉(道岬峯), 주지봉(朱芝峯) 등이

동에서 서로 하나의 작은 산맥을 형성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영산(靈山)이라 불러왔다.

 

신라 말기에는 9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북쪽의 용추폭포(龍湫瀑布), 동쪽의 구절폭포(九折瀑布),

남쪽의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 등이 절경을 이룬다.

천황봉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길이 51m, 너비 0.6m의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절벽 높이가 무려 120m나 된다.

 

예로부터 월출산 산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외감을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암에 관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動石)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인데, 이 동석 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무려 25년만에 다시 찾은 월출산 천황봉에서 추억을 한장 남긴다.

 

천황봉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주위로 바위가 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기묘하게 보인다.

 

 

 

삼장법사 바위인가?

 

다시 고도를 뚝 떨어트리고~

 

이런 곳에서는 꼭 긴장하게 된다. 혹시 조여들까봐~

 

돼지바위

 

구름속에 갇혀있는 암봉들

 

 

남근바위

 

바람재(612m)

 

금릉경포대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는 삼거리로 이름 그대로 바람이 원없이 올라오는 곳이다.

 

[→구정봉] 갈림길에 도착하고~  

기맥은 향로봉쪽으로 직진이지만 우측으로 베틀굴과 구정봉을 가리킨다.

불과 200m 거리라 그냥 지나가면 섭섭해 우측 베틀굴을 보러간다.

 

베틀굴

 

임진왜란 때 여인들이 이곳에 숨어 베를 짰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깊이나 모양으로 봐서는

베틀굴 보다도 음수굴이 딱 들어맞을 만큼 묘하게 생겼다.

안쪽에는 음수라는 샘물까지 있으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암반을 오르고~

 

우측으로 [→구정봉. 마애여래좌상]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고~

비와 안개. 거센 바람이 계속 몰아쳐 가봐야 볼게없어 구정봉은 후일을 기약한다.

 

구정봉 (九井峰 ×711m)

 

10척 높이의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졌는데, 그 넓이는 장정 50여명이 앉을 수 있다.

직경 23m 안팎의 웅덩이가 패여 물이 항상 괴어 있다.

이 웅덩이를 일러 정()이라 하고 이 정상의 암반을 신령암(神靈岩) 이라고도 하며 삼동석(三動石)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것이라 전해온다.

 

월출산마애여래좌상(月出山磨崖如來坐像)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로 국보(144)로 지정되어 있다.

 

이어지는 월출산 제2봉인 향로봉은 줄을 쳐 막아놓기도 했지만 곧추선 암봉이라 함부로 접근할 봉우리가 아니다.

길을 따라 우측으로 향로봉 사면길로 돌아가는데 눈길 가는데 마다 기암이다.

 

 

 

헬기장을 지나고~

 

미왕재 (546m)

 

미왕재라는 이름보다 이정표에는 억새밭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정작 억새는 별로다.

우측으로 [→도갑사2.7km] 이정표가 있는데, 북쪽 천황사를 들머리로 하여 여기서 도갑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일반적인 월출산 하루코스다.

 

도갑사(道岬寺)

신라말의 도승(道僧)으로 알려진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지었고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도갑사 입구에 고려 선종 7(1090)에 만들어진 국장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고

11세기 후반에 번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세조 3년∼10(14571464)에 수미왕사가 크게 다시 세웠으며, 여러 차례 수리·복원하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그외 도갑사해탈문(국보 제50),

도갑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 도갑사소조동자상(보물 제1134), 도선수미비, 오층석탑,

수미왕사비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다.

 

이제 월출산 주등산로에서 벗어나 기맥길로 들게 되는데, 정면 기맥길은 탐방로가 아니다.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출입통제] 간판과 나무울타리로 막아놨다.

 

일단 주변탐색과 동시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도리없이 점잖지 못한 자세를 연출하며 넘어선다.

두어시간 전 탐방로 아닌데서 나왔다가 다시 탐방로 아닌데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잠시후 작은 헬기장과 깨끗한 묘터를 지나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무위사로 연결되지만 특별보호역으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무위사(無爲寺)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로 국보 제13호 극락보전과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편광탑비와

3층석탑 백의관음도와 아마타삼존도를 포함 29점의 벽화를 보존하고 있는 벽화보존각이 유명한 사찰이다.

 

한차례 내림길이 다한 안부에는 대나무로 발을 엮어 막아놨는곳을 누군가 박살을 내놨다.

점잖게 무사통과 하고~

 

미왕재 이후 산길은 푹신한 육산길로 변하는데, 이후 무릎높이의 산죽밭이 나타나고~

 

가야할 땅끝기맥길

 

몇 개의 잔봉을 지난후 올라선 ×425봉은 정면으로 뚜렷한 길이 나있지만,

기맥길은 좌측 바위 뒤쪽으로 연결된다.

키높이 산죽과 잡목의 합동공격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등로는 가시잡목과 거미줄이 걸리는 전형적인 기맥길이다.

다시 비.바람이 몰아치고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진행하다 도착한 도갑산(道岬山 375.8m)은 이렇다할 특징도 삼각점도 없고,

그냥 평범한 봉우리라 그대로 지나친다.

지도상 주지봉 갈림길은 아직도 몇개의 봉우리를 더 지나야하고...

생각보다 너무 멀다.

 

주지봉 갈림봉 (330m)

 

T자를 이루는 갈림길. 우측은 주지봉, 문필봉이고 기맥길은 좌측으로 꺾어진다.

여기까지 국립공원구역인데, 국립공원 경계는 주지봉에서 월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함께 간다.

오늘은 이곳에서 기맥길을 접고 좌측 주지봉으로 향한다.

 

언듯 좌측으로 발딱솟은 문필봉(文筆峰)이 보였다 사라지는데, 날씨도 안받혀주고

게다가 컨디션도 다운되니 문필봉은 후일을 기약한다.

 

금 평탄하게 이어진다 했더니 주지봉 오름길도 장난이 아니다.

발딱선 무명봉 두개를 지난후 우측사면으로 잠시 이어지더니 다시 좌측으로 급경사 오르막길은 계속되고

정면의 바위봉은 바로 오를수 없어 우측사면으로 떨어졌다 다시 오르게 되어있다.

 

주지봉(朱芝峰 490.4m)

 

월출산의 위용에 가려 그 빛을 발하지는 못하지만 월출산 못지않은 걸출한 산이다.

주지봉의 형세는 영암벌 건너의 은적산과 마주 보며 은적산이 옥룡지세인 반면 주지봉은 음기어린 월출산과는

다르게 첫날밤을 앞둔 새신랑의 모습과도 비교되어 한껏 양기 넘치는 봉우리다

해서 옛부터 은적산(첫날밤을 앞둔 새신부)과 주지봉(새신랑)사이의 서호면과 학산면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한다.

또 두 산의 양기와 음기가 마주쳐 구림과 서호,학산 일대에는 자주 화재가 발생하기에 저수지를 많이

만들어 두 기운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주지봉(491m) 정상의 삼형제바위가 산자(山字모양을 하며 나란히 서 있다.

 

주지봉을 지나 이어지는 능선은 멋진 암봉의 연속인데, 날씨가 안받혀주니

 

 

 

죽순의 모습을 닮았다해서 죽순봉인가?

 

이어지는 바위능선

 

 

 

월대암에서 바라본 영암 서호면 구림리 일대의 전경

 

월대암에서 바라본 월출산 노적봉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질 않는다.

 

시멘트로 봉분을 쌓아서 묘를 만들었는데, 튼튼하게 보이지만 보기에는 좀 그렇다.

 

왕인박사가 공부하였다는 책굴

 

왕인석불입상

 

문화유적 총람에는 "석인 입상"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왕인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왕인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부정할 근거는 없다.

입상은 총고 257cm, 어깨폭 70cm로 존상의 머리 위에 나발이나 육계가 아닌 유교풍의 문관 또는 유건을

쓰고 있는 상이며 얼굴이 풍만하기는 하나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두 팔은 앞으로 팔장을 끼어 공손히 읍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라고 표현하여 왕인상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방형 돌기둥에 새겨진 불상은 광배를 조성하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발은 별석이다.

문화재 총람에 유건을 착용했다고 기술했으나 소발에 낮은 육계가 보인다.

눈은 반개한 상태이며 코는 낮고 입술은 두텁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좌우 대칭이며 수인은 대의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다.

고려초기 불상으로 해석한다.

 

백제는 왜국과 오랜 교섭을 가졌고 많은 인물이 직접 건너가서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

왕인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측 기록에만 실려 있다.

그러나 기록마다 연대를 비롯하여 이름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활동연대는 대략 근초고왕대(346~375)에서 아신왕대(392~405) 사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지키 古事記〉에는 화이길사(和邇吉師)로 되어 있는데, 길사는 백제 인명에 붙는 존칭이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에는 왕인으로 되어 있다.

화이와 왕인은 발음이 모두 '와니'(Wani)이다.

근초고왕대에 건너간 아직기(阿直岐)가 왜국으로 건너가서 말을 기르는 일을 하다가 경서(經書)에 능함이 알려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태자 우치노와 키이로츠코[兎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왜왕이 아직기에게 "(백제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는가" 하고 묻자 "왕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우수하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왜국에서 학덕이 높은 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백제에서는 제철기술자·직조공·양조기술자 등을 함께 보냈다.

왕인은 우치노와의 스승이 되었고, 경서에 통달하여 왜왕의 요청에 따라 그 신하들에게 경()과 사()를 가르쳤다.

그의 후손들은 일본의 가와치[河內] 지방에 살면서 문서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일본 히라카타[枚方]에는

그의 무덤으로 전하는 장소가 있다

1938 5월 오사카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초 왕인문화축제 첫째날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인박사가 공부했던 옛서당인 문산제

 

왕인박사가 후학을 양성하며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양사제

 

지침바위

 

종이가 흔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급자족 하던 때에 주변에 자생하던 닥나무를 채취하여

이 바위에다 놓고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다.

여기서 만들어 낸 종이를 학습지로 사용하여 기록, 저서, 서예 등의 용지로 삼아

수 많은 학자와 문필가 그리고 화가가 배출되었다.

이바위는 높이 8m 둘레 25m 되는 큰 바위로 약간 오목하면서 반반하게 패여져 있고

오르내린 발자욱도 남아 있으며 지금도 이마을 사람들은 고마운 지침바위를 애지중지 하여

환경을 깨끗히 정비하고 어린이들의 장난을 금지 하고 있다"

 

닥나무는 한방에서 열매를 양기부족,수종의 치료제로 쓰이며 어린 잎은 식용한다.

옛날에는 닥나무 껍질의 섬유로 저포(楮布)라는 베를 짰다.

닥나무를 종이 원료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데 조선시대에 본격화되어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였다.

닥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려면 먼저 줄기를 12m 길이로 잘라 밀폐된 솥에 넣고

증기로 두 시간 정도 찐 다음 꺼내어 껍질을 벗긴다.

이것을 그대로 말린 것을 흑피(黑皮)라 하고, 흑피를 물에 불려서 표피를 긁어 벗긴 것을 백피(白皮)라 한다.

흑피는 하급지의 원료로 쓰이고 백피는 창호지, 서류용지, 지폐 등의 원료로 쓰인다.

 

산행날머리

 

죽정마을로 향하면서 바라본 죽순봉의 전경

 

죽정마을

 

산행마무리를 하고, 선두팀이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으로 오늘 산행의 피로를 날려버린다.

이후 강진읍으로 이동하여 제일먼저 목욕탕에 들러 땀냄새 제거하고, 남도백반으로 저녁을 해결후

꿈나라에 들어가고, 눈을 뜨니 부산이 지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