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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31 강진/ 만덕산.깃대봉.다산초당

제이제이 2014. 8. 2. 14:47

일자: 2014.7.31

산행코스: 강진/백련사~혜월루~깃대봉 갈림길~만덕산.깃대봉~깃대봉 갈림길~다산초당~귤동마을

인원: 홀로

GPS거리: 4.5  널널/3시간30

 

백련사(白蓮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일명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며 〈사기 寺記〉와 정약용의 〈만덕사지 萬德寺誌〉에 의하면

839(문성왕 1) 선종의 구산선문 가운데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한뒤

1170(의종 24) 승려 원묘(圓妙)가 중건·주석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한다.

 

1208(희종 4)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은 원묘의 제자 원영(元營) 1211~32년에 걸쳐

80여 칸의 대가람을 완공했으며, 이곳에서 요세(了世)가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했다.

고려말에는 왜구에 의해 페허화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 아래 가람을 재건했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8명의 종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백련사에 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때 나왔으며

8종사는 조선시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도 4종사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아암 혜장선사로 두륜산 대흥사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힌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만경루·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그외 유물로는 만덕산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이 있으며,

절 주위에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이 있다.

 

만경루(萬景樓)

 

 

대웅전의 동일 축선상 맞은편에 있는 정면 5,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백련사 주출입 통로 정면에 있는 누각이다.

원래는 만경루 밑을 지나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도달하는 누하진입방식이었으나

지금은 누각 왼쪽에 난 계단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안에는 1817(순조17) 응언(應彦) 스님이 지은 '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이 걸려 있다.

자연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쌓았는데 서로 만나는 면을 그랭이해서 깨끗하게 다듬었다.

만경루에는 '백련사(白蓮寺)'라고 적힌 사액이 걸려 있고

'만경루' 편액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만경루를 지키는 견공

 

대웅보전(大雄寶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36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현판대웅보전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인데

그가 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내부에는 삼세불과 후불탱, 신장탱, 삼장탱이 모셔져 있고, 백련사의 사역을 알려주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 '해탈문중수기'가 현판형식으로 걸려있다.

 

범종각(梵鐘閣)

 

모임지붕의 정자(亭子)식 건물로 범종이 걸려 있는데

범종은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친다고 한다.

 

응진당(應眞堂)

 

대웅보전 좌측 언덕 위에 있으며,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운두가 높은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치목하였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후 익공을 짰는데 출목을 둔 이익공이다.

천장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연등천장이며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고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응진(應眞)이란 ‘존경 받을 만하다’, ‘공경 받을 만하다’라는 뜻으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16나한상과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나한이란 수행을 통하여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번뇌가 없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신 분으로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이 부처로 다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이 16분의 나한들에게 이 세상에 머물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불자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려 아직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다고 불가에선 이야기 한다.

 

천불전(千佛殿)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삼신불과 삼세불, 천불, 삼천불 등 다불(多佛)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천불에는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이 있는데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천불을 모신다.

 

현겁(賢劫)이란 불교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명부전(冥府殿)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며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지옥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 바로 왼쪽에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현재 명부전에는 1775(영조 51)에 지은

'시왕전중수기', 1942년에 쓴 '명부전중수', 1969년에 쓴 '명부전중수기' 3점의 중수기록 기문이 걸려 있다.

이를 보면 1775년에 시왕전을 중수한 이후 1942년과 1969년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때는 시왕전이 아니라 전각 이름을 명부전으로 바꿔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후 익공을 짰는데 출목 하나를 두었다.

서까래 위에 부연을 겹처마로 구성하였고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를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고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단청은 매우 간단하며전체적으로 목부재는 주칠측면 인방재만 푸른색을 칠하였고

정면에만 2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을 쳤다.

 

부도전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 안에는 있다고 하는데

 

동백나무 숲 안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부도가 곳곳에 숨박꼭질하듯 흩어져 있으며,

원묘국사 증진탑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인 강진백련사 원구형부도(康津白蓮寺圓球形浮屠),

대웅보전을 중수한 월인당 총신스님의 부도,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2기의 부도가 있다고 한다.

또한 응진전 앞에 춘파당 부도, 절 입구 축대 위에 부도, 명부전 앞에 부도의 잔해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부도전이 있는 곳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이라 들어가 볼 수가 없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

 

1962123일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백련사 앞에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다..

1.3ha에 약 1,500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주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가 곁들여 자라고, 밑에는 차나무가 있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높이가 7m에 달하며,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이 되는 것이 많고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다.

꽃은 2~3월에 피고,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꽃잎은 57개가 밑에서 합쳐져서 비스듬히 퍼진다.

동백나무는 한국의 남쪽 난온대지방 식생의 대표수종이며, 종자에서 머리기름을 낸다..

이 동백숲은 12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강진만 앞바다

 

다산과 혜장이 담소를 즐기고 우정을 쌓는 모습을 떠올리며 걷는다.

 

 

 

유배객 다산에게는 절친하게 교류한 두 승려가 있었는데,

대흥사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선사와 백련사의 혜장선사가 그들이다.

이 두 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사들이었지만 연상의 다산을 스승으로 섬겼다.

 

특히 혜장선사와의 교류는 매우 긴밀했는데, 혜장선사는 다산의 외로운 유배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으며 학문적, 사상적 교감도 무척 돈독했다.

유달리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선사에게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수 없겠나라고 책망하자

혜장이 스스로 아암(兒菴)”이라는 호를 지어 자경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혜장선사가 마흔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다산은 다음과 같은 시로

비통한 심회를 토로했다.

 

이름은 중,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를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을 상세히 연구했네

찟진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지네

장막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해남에서 서울까지삼남길

 

만덕산 깃대봉의 전경

 

혜월루 갈림길

 

쭉쭉~빵빵한 소나무가 반겨주는 조은길이다.

 

혜월루의 전경

 

혜월루에서 바라본 강진 구강포 앞바다

 

깃대봉 갈림길


여기까지 와서 만덕산 정상을 밟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것 같아

만덕산 깃대봉으로 오른다.

그렇지만 사실 900m란 거리가 마음에 더 끌렸다.

 

울창한 조릿대가 숲을 이루는 터널

 

온갖 잡풀들이 점령한 폐헬기장을 지난다.

 

깃대봉인줄 알았는데, 올라보니 아니다.

 

이후의 오름길은 바람 한점 없는 날씨에다가 습도까지 높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산성흔적인가?

 

능선에 오르고~

 

! 종전 이정표 거리에 속았다.

아직도 0.54km 더 가야한다.

 

지금은 등로 정비 중~


또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고, 낮지만 녹녹하지 않은 산길인데~

다산과 혜장선사의 기운이 서려 있는 산길이다.

 

건너편에 솟아있는 깃대봉

 

강진만 앞바다

 

다시 고도가 뚝 떨어지고. 바위지대를 우회한다.

 

보기좋은넘/ 털중나리

 

지나온 봉우리

 

보기좋은넘/ 원추리

 

이어지는 바위지대

 

깃대봉(해발 408m) 정상부의 전경

 

 

뒤돌아보니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연이어 솟아있다.

 

깃대봉에서 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건너편으로 보이는 땅끝기맥 마루금

 

원추리 삼형제의 깃대봉 오름 축하인사

 

예전, 다산선생 또한 이 만덕산을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만덕산에 관한 기록이나 시편은 보이질 않는데,

만덕산을 올랐으되 자연을 노래하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양상이 너무 고약해서 일까?

다산은 음풍영월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어느산에 올라 쓴 시인지, 알수없으나 유배지에서 지은 시 가운데에는 이런시도 있다.

 

취하여 산에 올라 목메어 우니

울음소리 푸른하늘에 울려퍼지네

옆 사람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내 한 몸 구차해서 운다고 하네.

 

다시 온길을 빽하여 깃대봉 갈림길로 되돌아 나오고~

 

정약용 남도유배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고갯마루 쉼터를 지나 이어지는 오솔길은 동백숲과 야생차가 무척 아름다운 길인데,

다산과 혜장이 서로 오고가던 길이다.

 

천일각(天一閣) 전경

 

강진만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가족을 생각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던 곳이라 하는데,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1975년에 강진군에서 이 누각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다산초당 동암(東庵)의 전경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하던 건물로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며,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으며 기거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고,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여기에서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1976년 강진군에서 서암(西庵)과 함께 복원하였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방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초당 전경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으로

초가집이었던 것을 기와로 복원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801(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사적 제107(정다산유적)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정면 5, 측면 2칸으로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 1971,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유명하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온 때는 그가 40세 되던 해인 순조1(1801)년 겨울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밖의 주막집이 유배지였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 주막집 한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어 자신을 추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1762년 음력 6 16일에 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정재원과

윤선도의 손녀인 해남 윤씨 사이에서 4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정재원은 첫번째 부인 남씨에게서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부인 윤씨에게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다.

 

그가 태어난 경기도 양주 마현은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그의 부친은 음사(陰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3대가 벼슬이 없는 선비인 포의(布衣 )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부친 정재원에게 기초적인 학문을 배웠으며,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 때문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것으로 소일했다.

 

천연두를 앓아서 그 당시 신의로 불리던 몽수 이헌길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짓고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엮었다.

정약용은 9남매를 낳았는데 6남매가 천연두로 죽고, 자신도 천연두로 고생했기 때문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훗날 홍역이 창궐하여 많은 아이들이 죽자, 그는 홍역 치료법을 기록한

<마과회통>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국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 과학지식을 도입하였다.

1910(융희 4) 규장각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다산초당 옆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만덕산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서 연못 가운데 탑처럼 쌓았으며,

나무 홈을 파서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그 못으로 폭포수가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못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게 하였다.

그 탑의 이름이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하늘이 나를 보내 이 동산에 살게 하니

봄잠 자고 술에 취해 사립문 닫았노라.

산속뜨락엔 두루 덮인 푸른 이끼

때때로 사슴이 다녀가 흔적을 남기네.

~다산화사 중에서~

 

정석(丁石)

 

다산이 손수 써서 새긴 글로써 다산초당의 제1경이며,

다산의 단아한 성품과 이곳에서 생활에 대한 결의를 느낄 수 있다.

 

약천(藥泉)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촉촉히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물이 솟아나왔다고 하는데,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히고 묵은 병을 낮게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조(茶竈)

 

앞마당의 넓적한 바위

이 바위는 그가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라 하여 다조(茶竈, 차 부뚜막)라 불린다.

 

칡넝쿨 우거진곳 햇볕도 고운데

차 달이는 풍로 연기 가늘게 피어나네

어디서 꺽 꺽 꺽 두세 마리 꿩 우는 소리

창 밑에 잠시 든 잠 곧잘 깨우네

~다산팔경사 중에서~

 

다산초당 서암(西庵)

 

1808년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재축하였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명의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차와 벗하며

밤 늦도록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한다.

 

돌계단을 내려서고~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공존하는 오솔길은 뿌리의 길이다.

 

귤동마을 갈림길 안내판

 

 

이후 강진읍으로 이동하여 제일먼저 목욕탕에 들러 땀냄새 제거하고,

남도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점심식사후 강진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부산行버스에 몸을싣고,

이후 꿈나라에 헤메다 눈을 뜨니 부산이 지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