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해-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4 (6)
-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4 (6)-
간단한 것은 이해를 쉽게 하지만 정작 인간 관계, 특히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관계에 오면 '내 자식은 이러 이러해야 한다', '내 남편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내 아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기준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그만 상처 받아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苦)의 바다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모를 때에는 상처를 받으면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멀리는 조상 탓, 크게는 주변 환경, 사회 제도를 탓하고,
가까이로는 늘 상대하는 가족, 친구, 친척을 탓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어리석고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 가슴 아팠던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내가 잘못 생각하여
그런 것이지 상대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설사 상대가 백 퍼샌트를 잘못 하여 내가 상처 받았다 하더라도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냐 하는 바른 자세가 되어 있다면
상처가 상처일 수 없습니다.
참다운 반야지(般若智)로서 '오관(五官)으로 판단되는 나'를 초월해 보면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우리들 속에 있는데
조그만 현상에 매달려 상처 받고 살아갈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평생 이 문제를 가지고서 이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이 변화하고 무상한 현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햇빛이 환히 비치는 곳에서 밝은 눈을 가지고 사물 하나하나를 삺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환히 밝고 거기에다 햇빛까지 더없이 밝게 비추어 주니
사물사물이 학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이아몬드인지 돌덩이인지 흙덩이인지 확연히 분별할 수 있으니
창고에 들어가서 값진 다이아몬드만 들고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계단이 가파르고 태산 같은 장애물이 곳곳에 있다 하더라도
밝은 눈만 있으면 한 번도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아니하여 상처받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가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 주위에는 상처 줄 거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대로 밝은 눈이 있어 가슴 아픈 일을 넘길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깨어 있는 삶의 길을 가고저 하니
그런 대로 우리 인생길을 평탄하게 다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밝은 대낮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이것도 인연소치지'하며
빨리 장독 뚜껑을 닫고 빨래를 걷어 소나기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이렇게 밝은데 왜 소나기가 쏟아져야 하나, 이상하다.'하고
소나기만 탓하고 있으면 손해볼 일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습니다.
포살할 때 사리불과 목건련의 자리에 당겨 앉아야 하는데
다른 제자들이 너무 마음이 아파 감히 당겨 앉지를 못합니다.
부처님을 모시기 전부터 사리불과 목건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목련존자가
열반에 들었을 때에도 반복하여 법문을 주십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지언정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어찌 보면 냉정한 말씀 같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단 십 미터도 자유로이 갈 수가 없고 밝은 곳에서는
갖가지 사물을 즐기면서 어디든지 얼마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살짝 건드려 놓았지만 이 속에는 이렇게도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길의 밝고 바른 길과 어둡고 잘못된 길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이 悉見是人하야
수지독송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하리라."
선재(善財)동자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오십삼 선지식을
친견하는 끝없는 구도의 길에 오릅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마지막 처소인 미륵보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기는 작은 소리에 그동안 낱낱의 처소에서
정진한 깨달음을 얻게 된 성취를 모조리 다 잊게 되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낙담을 하며 미륵보살에게 묻습니다.
"미륵보살이시여, 저는 지금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더 있겠느냐.
다시 처음부터 문수보살을 만나고 차례차례 오십삼 선지식을
다시 밟아 올 수 밖에 더 있겠느냐."라는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포기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낙망하거나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그 먼 일백 육십 유순을 돌아가 문수보살을 향해 걸음을 내디딥니다.
문수보살이 그것을 보고 오른손을 뻗어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축복을 내려 줍니다.
"선재 선재라, 네가 어찌 그 순간에 싫어하지 아니하고 싫증내지 아니하고
해태(懈怠)하지 아니하고 그 길고 먼 과정을 다시 밟으려고 하는가?" 하는
거룩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한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이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끝없는 구도심으로『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금강경 도리를 깨쳐가면 참다운 밝은 지혜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시비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되어
인생사의 모든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반야바라밀행자(般若波羅密行者)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를 믿고 공부한 보람으로 한량없고 참다운 공덕(功德)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삶에 대한 참된 지혜가 구절구절마다에서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