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大乘)은 소승(小乘)에 맞서는 말로, 커다란 승물(乘物, 탈 것) Maha-yana를 의미한다.
소승 즉 작은 hina 승물(乘物)이란 열등한 승물이라는 뜻이며,
대승불교가 처음 일어났을 때 그 이전의 모든 불교를 일괄하여 소승이라고 낮추어 부른 것이다.
따라서 소승교도 자신은 이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승불교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진실한 깨달음에로 특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나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승의 길을 걷는 사람을 보살(菩薩)이라 하고, 소승의 길을 걷는 사람을
성문(聲聞) 및 연각(緣覺)이라 한다.
소승에는 이들 두 길이 있으므로 소승을 이승(二乘)이라고 한다.
대승에서 보면 이들 성문, 연각이라는 구별은 이승이 궁극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도 참으로 궁극적인 것을 구한다면 모두 대승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전 불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길이며, 그런 의미에서 일승(一乘)이라고 한다.
1. 대승불교의 성립
불탑신앙과 불전문학
불교교단은 석존이 입멸 후 약100년간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100년쯤(기원전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대한 엇갈린 견해가 발생하여
마침내 교단은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불교의 전파범위가 넒어짐에 따라 각 지방으로 퍼진 불교는 그곳의 기후, 풍토,
습관 내지 문화적 제반 사정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비구들의 생활양식이 변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법과 율에 대한 다른 견해가 생겨나 교단은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예컨대 붓다는 비구는 신자로부터 금이나 은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시대적 상황변화에 따라 그것의 완화를 요구하였다.
이로부터 불교교단은 전통적인 계율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의 상좌부(上座部)와
계율을 자유로이 해석하려는 진보적 경향의 대중부(大衆部)로 근본 분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본 분열한 불교교단은 그 후 교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분열의 분열을 한 후
불멸 400년이 지날 무렵에는 근본 2부를 포함하여 20여 부파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하며,
분열이전의 불교를 초기불교, 원시불교, 근본불교라고 한다.
나아가 이 시기의 출가자들은 수행의 최고단계인 아라한(阿羅漢)에 관한 문제를 비롯하여
불교의 일체 교법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논의하여 방대한 논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논서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하며 그로 인해 이 시기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 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란 붓다 교법에 대한 연구, 해석이라는 의미로 '부파불교'란 말이 분열된 교단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아비달마불교'라는 말은 그들의 사상적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불교는 지나치게 번쇄하고 난해하여 점차 본래의 의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연기설에 입각하여 고찰하고',
바른 지혜와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원칙 위에 교리를 세운 것이기는 하지만 점차로 실제의 수행보다는
번쇄한 교리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 반발하고 비판하는 집단에 의해 대승불교가 싹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불교가 흥기할 무렵 정통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였던 바라문교는 기원전 2세기경
사성(四姓) 즉 브라흐마나, 크샤뜨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에 대한 종교적 의무와 생활규범 등을
규정한 <마누법전>을 비롯한 각종 제사경전과 서사시가 작성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종래 베다성전이 바라문의 전유물이었다면 새로이 편찬된 <마하비라타>와 <라마야나> 등의 서사시는
일반 대중이 애호하였던 종교문헌으로 이 두 서사시를 기점으로 그 이전을 바라문교의 시대,
그 이후를 힌두교의 시대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베다>에는 보이지 않던 '시바와 비슈누'가 최고신으로 등장하는데,
다른 수많은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개성이 강한 신격(神格)이 되면서 다양한 신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마하비라타>의 일편으로 알려지는 <바가바드 기타>는 오늘날까지도 힌두교의 최고성전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바라문교의 형식적인 제사주의를 배격하고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인
신애(信愛, bhakti)를 강조하고 있다.
불탑신앙과 불전문학
아쇼카왕 이래 부파불교의 출가자들은 국왕이나 장자들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안정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선정과 교법에 대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단이 분열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붓다의 교법에 대한 부파간의 쟁론을 초래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학문적, 철학적으로 발전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의 대중들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교학은 초기불교의 교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지만,
너무나도 번쇄한 이론체계를 전개시켜 전문적으로 교학을 연구하는 출가 수행자가 아니고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난해한 교리나 엄격한 계율이 아니라 불타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었다.
이에 따라 법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와 논의를 위주로 하는 기존의 승원불교에 만족하지 못한 재가자와
이에 동조하는 출가자들은 점차 불탑(佛塔)에 모여들게 되었다.
불탑은 부처님의 유골 즉 사리(舍利, sarira)를 봉안한 무덤으로,
‘포개어 쌓는다’는 뜻의 스투파(stupa)에서 비롯된 말이다.
부파불교에 있어 붓다는 중생을 구제하는 이가 아니라 법으로 인도하는 스승,
즉 도사일 뿐이었기 때문에 법을 떠난 불신(佛身)의 숭배는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불상이나 불탑의 숭배 역시 그러하였다.
또한 붓다는 쿠시나가라에서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었기 때문에 진리 자체로서는 실재할 지라도
인격으로서는 실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붓다의 사리에 대한 공양과 예배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불탑의 조성은 생천(生天)을 보장하였고, 따라서 불탑의 조성과 경영은 재가신자들의 몫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불타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성도지인 붓다가야,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의 녹야원,
입멸지인 쿠시나가라 등을 성지로서 숭배하였으며 그곳에 사당을 세워 순례하기도 하였다.
기원전후의 시기가 되면 불탑의 건립이 매우 활발해지는데 여기에는 꽃이나 향 등이 바쳐지고
보물과 귀금속 등이 봉헌되었으며 춤과 노래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은 기존의 부파 교단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구들은 보통 승원이나 정사(精舍)에 머물렀으며 그곳은 불탑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들에게는 금이나 은을 받는 일, 춤추고 노래하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부파불교는 법 중심의 불교, 계율을 중시하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속의 직업에 종사하는 재가자로서는 계율을 엄격하게 지킬 수가 없고, 선정(禪定)도
충분히 실천할 수 없으며 그것을 통해 증득되는 교법의 참다운 이해는 더욱 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붓다에 대한 소박한 믿음으로 예배하고 공양함으로써 구원을 바라게 되었고,
그것이 행해진 대상은 불탑이었다.
만약 법 중심의 출가교단에 반하여 붓다 중심의 교법을 발전시킨 어떤 그룹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출가교단에서 독립하여 자신들의 교법을 발전시키고 관불(觀佛)이라는
종교행위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서 불탑을 선택하였을 것인데 바로 이같은 불탑교단의
재가성과 신앙적 성격이 대승불교 성립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 성립의 또 하나의 주요한 원인이면서 불탑 신앙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불전(佛傳)문학이다.
불탑신앙자들이 생각한 붓다는 이제 더 이상 법의 도사나 아라한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애를 거쳐 오면서 초인적 이력을 쌓을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모와 찬탄은 종래 법 중심의 이론적 교설과는 다른 형태의 문헌을 낳게 되었으며,
그것에는 논리적 설명을 초월한 비유와 은유, 혹은 우화의 성격을 띤 문학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불전문학으로 이같은 불전문학을 주도한 그룹을 찬불승(讚佛乘)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자타카>는 붓다의 전생을 설한 불전의 한 장르로서,
붓다의 성불을 가능하게 한 전생과 현생의 수행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현존하는 불전은 대개 부파교단의 문헌이지만, 그것들은 부파를 초월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상의
공통점이 있으며 이는 대승경전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2.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
보살의 수행
소승불교가 아라한의 불교라면,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대승경전은 오로지 보살의 이념과 실천에 대해 설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살이란 상세하게는 ‘보디삿트바, 마하삿트바(Bodhisattva, Mahasattva)’라고 한다.
보디삿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그리고 마하삿트바란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불타가 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고된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보살에게는 자기가 불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신념이 없으면 안 된다.
이 점이 찬불승이나 소승과 다른 대승의 독자적인 입장이다.
우선 소승과 다른 점은 소승 즉 부파불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교리를 조직하고 있다.
제자가 불타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소승불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당연히 자기에게 불타가 될 수 있는 소질 즉 불성(佛性)이 갖추어져 있다는 인식도 없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은 불타와 같이 위대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기인식의 차이가 바로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다음으로 찬불승(讚佛僧)의 경우는 불전문학을 통해 성불의 원인을 탐구하고
보살의 위대한 수행을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찬불승도 보살의 가르침을 설한다는 점에서는 대승불교와 가깝다.
그러나 찬불승에서 설하고 있는 보살은 이미 성불이 결정된 보살이다.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은 보살이다.
이에 비해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을 자기자신이다.
성불의 수기 등과는 관계없는 범부로서의 보살이다.
찬불승에서 설하는 보살은 오로지 석가보살이지만, 그는 연등불로부터
당래작불(當來作佛)의 수기를 받았다.
이 수기에 의해 그에게 보살로서의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일반범부인 대승의 수행자에게는 이러한 수기가 없기 때문에 보살로서의
자각은 다른 방편에서 얻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기에게 불성이 있다는 신념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이 점이 똑같이 보살을 설하면서도 찬불승과 대승불교가 갖는 본질적인 차이이다.
찬불승의 보살은 선택된 사람이지만 대승의 보살은 일반인이다.
보살의 수행
보살의 자각으로부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수행이 시작된다.
아라한은 오로지 자기의 완성을 위해 수행한다.
그러나 불타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으로 대자대비의 소유자이다.
그 불타가 되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은 필연적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이다.
즉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수행을 완성하는 길이다.
이것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이다.
여기서 바라밀이란 빠라미따(paramita)의 음사로서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는데 한역에서는 보통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도달이나 완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도달이고 완성할 수 없는 완성이다.
즉 바라밀은 무차별, 공에 입각한 실천이기 때문에 특정한 도달이나 완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가야 하는 것이 바라밀의 참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세속의 윤리가 종교적 덕목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바라밀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반야(般若)바라밀이다.
보시(布施, dana)란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적인 베품인 재시(財施)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법시(法施),
두려움과 근심을 함께 하고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보시할 때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와 주는 물건에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다.
즉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다.
보시바라밀은 요컨대 공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계(持戒, sila)란 말 그대로 ‘계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계에는 재가신자들이 지켜야할 오계와 출가비구와 비구니가 갖추어야 할
250계와 350계가 있지만 대승의 보살계는 10가지이다.
그런데 대승의 지계는 소승과 같은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계율지상주의가 아니라
이타를 위한 능동적이고 자율적 정신을 강조한다.
즉 계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지키며,
아울러 타인에게도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지계바라밀의 본질이다.
인욕(忍辱, ksanti)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고통이며 그러한 세계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화내지 않고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미움은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미움을 부르기 때문에 참음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virya)이란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의 실천이며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다.
대승의 공관은 결코 허무에 의한 나태가 아니다.
중생의 정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보살의 정진은 집착함이 없는 이타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선정(禪定, dhyana)의 정(定)은 삼매(三昧)란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이라고 풀이되며
세계 실상이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삼매로서 직관하여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般若, prajna)란 ‘수승한 지혜’라는 뜻으로 이 때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득(不可得)이며 무소득(無所得)이다.
이처럼 바라밀의 수행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이타에 전력하는 입장이며
성불도 도모하지 않는 끊임없는 수행이기 대문에 이 수행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다.
보살의 이 결의를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에 비유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승나승열(僧那僧涅)]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살은 무량무수의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면서도 인도된 사람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도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3. 대승경전의 성립
교단사적으로 보면 대승불교는 현재까지도 그 실체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대승경전들로 보아 대승불교가
역사상 실재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해 말할 때도 그 대부분의 자료를 대승 경전 자체로부터
얻고 있으므로 단적으로 말하면 대승 경전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따라서 대승경전의 발달사는 대승불교의 형성사와 중복되는 점이 많다.
현재 많이 보고 있는”‘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은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불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총 100권 가운데 앞의 32권이 인도찬술부이며 이것이 본래의 대장경이다.
그것은 아함, 본연, 반야, 법화, 화엄, 보적, 열반, 대집, 경장, 밀교, 율, 석경론,
비담, 중관, 유가, 논집의 1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밀교부까지가 경이며,
율과 석교론 이하의 논을 합하여 삼장(三藏)을 형성한다.
경장부분도 원래 소승경과 대승경만으로 되어 있었는데
'대정신수대장경'에서 이와 같이 구분한 것이다.
그 중 반야부 이하가 대승경에 해당한다.
대승경전 성립의 배경
당시에는 불타가 직접 설하신 경전인 <아함경>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와 달리 불타의 참뜻을 나타낼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대승불교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설하려 했던 것인가하는 문제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는 어떻게 흥기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대승불교 성립배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대승불교는 원래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불탑 공양을 통해 불타를 찬미하고
숭배한 재가 신자들을 주로 하는 집단에 의해 일어난 신운동이다.
이 운동은 재래의 여러 부파들이 승원 중심의 불교로서 아비달마 교학의 확립을 지향하여
너무 전문적인 법 중심의 불교를 발달시키고 있었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석존 신격화의 결과이다.
즉 불전과 본생담 등을 통해 점차로 발달하였던 불타에 대한 고찰의 결과,
불타는 과거에 무한의 수행을 한 과보로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하며,
인행(因行)으로서 이타행을 주로 하는 육바라밀의 행을 설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불타의 체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결심하였던 곳에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 있었다.
출가수행자들은 불타와 자신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스스로가 아라한임에 머무르고자 했음에 대해,
중생의 성불이야말로 불타의 본원(本願)이라고 주장하여 불타와 똑같은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석존의 전신(前身)과 마찬가지인 보살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중생이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대승이라는 이름을 불리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법사(法師)라고 불린다. 법사의 기원은 어쩌면 출가 수행자 중에서
재가 신자를 위해 불타의 전기나 비유를 설하는 전문가였는지도 모르지만,
부파의 기록을 통해서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대승측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재가 신자에서의 지도자이든가
혹은 출가자이더라도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승 경전이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 자체에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대승 경전에 대해 공양하고
숭배하고자 하는 요구와 법사를 존중하고자 하는 요망이다.
결국 경전이 불탑을 대신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되었다는 것이며
대승경전이라고 하는 법의 절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두번째 현상은 성불도(成佛道)로서의 보살도가 정비되고 체계화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처음에 비판하였던 부파의 아비달마 교학을 다시 도입하게 된다.
이것은 재가보살 대신 출가의 보살이 이상상으로 등장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대승불교의 이론화와 체계화는 결국 출가주의화와 아비달마화를 초래하여
이전의 불교가 걸었던 길을 답습하게 된다.
이로써 제3의 신운동으로 밀교가 일어나고, 이윽고 그 주장을 담은 그릇으로서
밀교 경전이 제작된다.
밀교 경전도 역시 불설임을 표방하지만 그것을 설하는 이가 대승 경전의 경우처럼
불타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로서의 법신(法身)이라고 했다.
밀교도 대승불교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승을 초월하여 출현한 것이라는 점은
대승이 불교이면서도 이전의 불교를 초월하여 출현하였던 것과 대비된다.
그리하여 인도불교의 최후까지 소승과 대승과 밀교가 병존하고 있었다.
대승경전의 발달구분
대승경전의 역사는 보통 3기로 나누어 논하게 된다.
제1기인 초기에는 대승의 형성에서부터 용수(龍樹)의 시대까지이고,
제2기인 중기에는 용수 이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의 시대까지이고,
제3기인 후기는 세친 이후의 후대이다.
제1기에는 경전 제작이 극대로 성행하였으며,
제2기에서는 조금 덜하였고,
제3기에서는 밀교를 제외하고 극히 드물었다.
제1기는 대체로 기원 전후로부터 3세기 전반까지로서, 북인도에서 쿠샤나 왕조가 번창하던 시대이고
남인도에서는 인드라 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제2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굽타 왕조가 흥성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7세기 후반 이전에는 순수한 밀교 경전이 형성되지 않았다.
초기의 경전은 대승불교의 교리를 최초로 저술한 인물로 지목되는 용수의 학설에
영향을 주거나 또는 인용되고 있는 경전류이다.
물론 용수가 모든 대승 경전을 열거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용수가 모르고 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지라도 용수와
유사한 교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초기의 경전에 포함되는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 발전 이전에 <반야경>이 성립되었고, 이로 인해 교리적 영향은
매우 커서 모든 대승 경전이 공(空)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여러 부처를 인정하는 신앙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그 중에서 아미타불의 신앙이 보편화되어 정토교(淨土敎)를 대표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화엄경>의 그룹이 발전하고
또한 <법화경>을 신앙하는 운동이 급속하게 퍼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리의 조직 및 체계화에 동반하여 다시
부파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나게 된다.
즉 부파불교의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워진 것이다.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대체로 “여래장 사상과 유식 사상”에 관련된 것이다.
여래장계 경전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如來藏) 즉 불성(佛性)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인데,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대방등여래장경>을 선두로 하여 담무참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대운경>,
<금광명경>,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승만경>, <앙굴마라경>, <대법고경>, <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
보리유지가 번역한 <부증불감경>, 진제가 번역한 <무상의경> 등이다.
유식계의 근본성전은 <해심밀경>인데 이의 전모는 보리유지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으나,
부분적으로는 구나발타라에 의해 번역되어 있으므로 4세기 말까지는 성립되었을 것이다.
이외에 <유가사지론>, <대승장엄경론>, <섭대승론>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경전과 논전과의 구별이 어렵다. 더욱이 이 시기의 경전에는 논전을 기초로 하여 개작된 것도 있다.
대승 경전의 제작은 후대에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수는 갑자기 줄어들게 된다.
대신 밀교 경전이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650년을 전후로 <대일경> 의 성립을 통해 현교(顯敎)인 대승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또한 <금강정경>에 의해 그 교리가 확립되었던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4. 대승사상의 전개
반야바라밀의 이념 아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지향하는 대승불교의 이론은
서력 기원후 2에서3세기 무렵에 출현한 용수(Nagarjuna, 龍樹)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그는 불교 최고의 논사로 제2의 붓다로 칭송되고 있는데,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밝히기 위해 수많은 논서를 저술하였다.
특히 그의 주저인 <중론(中論)>에서 불교의 근본진리인 연기를 생멸(生滅),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차별적인 대립을 넘어선 것[팔불중도(八不中道)]으로 해석하여
어떠한 견해에 대한 집착도 부정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일체는 공하다고 풀이하고 있다.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공(空)의 이론'을 확립하여 대승불교의 기반을 다졌다.
용수에 의해 일단 종합 정리된 대승불교는 교리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경전의 제작이 요구되었다.
이들 새로운 경전에서는 앞 시대에 수립된 공사상에 입각하면서, 미혹과 깨달음의
주체문제로서 마음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즉 마음은 한편으로는 깨달음의 세계를 낳는 원천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마음은 보리(菩提)의 바탕인 동시에 윤회의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전자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이상적 측면에서 고찰한 여래장설이고,
후자는 마음의 현실적 기능의 분석에서 출발하는 유식설이다.
유식사상은 일체의 분별망상이 비롯되는 장(場)으로서 인간의 의식자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전환을 통해 진여(眞如)와 열반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이론으로 3, 4세기 무렵 출현한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아가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동일시하여 양자간의 융합을 모색하려는 경전과 논서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같은 새로운 경전이 제작되고 연구되는 시기를 '중기 대승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중기 대승불교의 이론은 아비달마불교처럼 대단히 번쇄하고 어려워
불교학자들조차 이해하기 힘들 지경이 되어 자연히 초기 대승불교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같은 사정에 따라 '후기 대승불교'라 할 수 있는 밀교가 출현하게 된다.
밀교에서는 불타의 깨달음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 만다라(曼多羅) 등의 상징으로 나타내며,
의례를 중심으로 한 신앙실천의 중심의 불교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힌두교의 의례와 유사하게 되어 그것에 동화되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불교사원을 파괴함으로써
불교는 13세기 무렵 마침내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불교는 서력 기원전 후 동쪽으로 진출해서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수(隨) 당(唐)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론들이 번역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즉 인도의 불교는 오랜 시간동안 넓은 지역에 체계적으로 전파된 것이었으므로
중국의 불교인들은 번역된 온갖 경론들에 대해 체계성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불교의 일체 경론을 분류하고 해석하였는데,
이를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이같은 교상판석에 따라 마지막으로 설해진 또는 가장 뜻이 깊은 것으로
간주된 경론들을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종파들이 성립하게 되었다.
불교의 종파는 이미 동진시대나 남북조시대에 여러 경론이 번역되고
그것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수많은 종파가 성립하게 된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13종파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 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법화경>의 일승(一乘)을 대승불교의 근본으로 간주하는 천태종(天台宗),
<화엄경>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法界)를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하는 화엄종(華嚴宗),
정토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토종(淨土宗),
그리고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앞의 여러 종파와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禪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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