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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여행

2015.10.24~25 소백산

산행일자: 2015.10.24~10.25

산행코스: 죽령~2연화봉~천문대~연화봉~비로봉~국망봉~석륜암터(야영)~초암사~죽계구곡~배점리

GPS거리: 21.35km 

산행시간: 그다지 의미없는 시간/ 11시간50/ 휴식시간 포함. 진짜로 널널~산행

 

am05:30 부산 개금집에서 출발,

죽령에 도착하니 08:35인데 날씨는 비가 내리기 일보직전이고

일기예보상으로는 흐리다가 맑다고 했는데,

오늘 또 한번 구라청에 속은 느낌이다.

 

죽령(竹嶺)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경계에 위치한

높이 696m의 고개인데, 국도 제5호선이 이곳을 통과한다.

신라 아달왕 5(158) 죽죽에 의하여 개통된 이래 숱한 사연을 남기며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있다.

원래 목적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개통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의 시원지 영남지방의 양반과 생원, 진사대감의 행차길 이었고

영남에서 서울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조령을 넘으면 관직의 명이 길지 않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이화령과 죽령을 많이 넘었다고 하는데,

죽령도 대나무같이 미끄러져 과거급제가 어렵다는 설이 있으나

대쪽같이 곧은 절개와 신의를 생각하며 많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죽령주위

 

산행준비를 마치고...

소백산천문대로 이어지는 시멘트임도길을 따라서 산행시작이다.

 

죽령탐방지원센타 통과하고

 

죽령은 이제 가을은 끝이 나고, 초겨울에 접어들은 것 같다.

 

1km가량 진행했을까

죽령에서 예상한데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배낭카바 씌우고 다시 진행하는데, 올해 처음으로 박배낭을 메고보니

초반부터 어깨에 묵직한 중량감이 계속 느껴진다.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지리가이자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1509~1571)

죽령을 넘어 가다 소백산을 보고는사람 살리는 산”, 즉 활인산(活人山)이라 말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정감록>의 십승지지의 첫 번째 장소가 바로 소백산 아래 풍기 차암 금계촌이다.

실제로 풍기엔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는데,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천왕성,바람고개전망대

 

풍기읍내가 잘 보이는 장면인데, 오늘은 조망 꽝이다.

 

소백산강우레이더관측소아래 삼거리

 

2연화봉 정상부는 현재 출입금지구역이라 오르지 못한다.

 

백두대간 제2연화봉 표지석

 

좌측으로 우회하면 잠시만에 멋진 전망테크가 나타나는데,

토성.고리전망대이다.

 

단양읍내 방향이 잘 보이는 장면인데. 이곳역시 조망 꽝

 

2연화봉아래 안부쉼터

 

준비해온 따뜻한 차와 빵으로 간식을 해결하고

 

뒤돌아본 제2연화봉 방향 역시

 

이후 은근히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올라 화성.별동산쉼터를 지난다.

 

소백산 천문대

 

지구마을.쉼터를 지나고

 

비로봉으로 질러가는 길을 버리고 연화봉으로 오르다 수성.야생화밭을 통과한다.

 

소백산 연화봉(蓮花峰:1,394m)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단양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단양군이 1987 5 31일 제5회 소백산 철쭉제를 기념하며 세운 표시석이 있다

연화(蓮花)란 불교의 연화장 세계에서 가져온 용어로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

『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 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

이곳을 연화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소백산 철쭉을 유명한 곳인데

철쭉이 피었을 때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연화봉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태양.해맞이 전망대

 

태양계의 크기를 체험하자.

 

이런 사진과 같은 모습을 기대했건만

 

연화봉을 내려와 산죽지대를 지나고

 

날이 궂으니 모든게 을씨년스럽게만 보인다.

 

1연화봉 아래 안부에 있는 안내판

 

1연화봉을 향한 급경사의 계단길이 시작되고

 

1연화봉 알림 이정표기둥

 

좌측으로 몇십m만 오르면 제1연화봉 정상이지만, 이 날씨에 올라가본들

 

여기에서 정면으로 비로봉을 바라보며 가야하는 장면인데

 

가끔씩 좌우로 나타나는 바위들이 어느 지점을 지나는지 알려준다.

 

小白山連太白山 逶迤百里揷雲間  (소백산연태백산 위이백리삽운간)

分明劃盡東南界 地設天成鬼破慳  (분명획진동남계 지설천성귀파간)

 

소백산 태백산에 이어져 구불구불 백리길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서 거정-

 

 

두나무가 붙어서사랑의 나무 연리목(連理木)

 

천동리갈림길

 

좌측으로 주목 군락지를 지나고

 


천년기념물 제244호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주목은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주목(朱木)'이란 이름은 나무의 껍질이 붉은 색을 띠고 목재도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이가 오래가고,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제1연화봉 사이에

주목 3,798그루(2007년 기준)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비로봉 아래쪽 주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을 울타리를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소백산의 주목은 고지대의 입지 특성 때문에 강한 바람과 겨울철 강설(强雪)로 인해서

대부분의 줄기가 비틀리고, 가지가 휘어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무의 높이는7m 정도이고,

둘레는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에서 밑으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다.

예전 통제하지 않던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망봉과 비로봉~연화봉 능선을 따라

3만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중간중간 폐타이어로 만든 발판을 지나는데, 오늘 같은 날에는 걷기 괜찮네!

 

소백산 비로봉(毘盧峰/1,439.5m)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 최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이 세상에 몸을 입어() 드러난 법신불(法身佛)

'()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이다.

 

백두산에서 남하해 금강산을 지나 동해안 따라 내려온 대간은 태백 땅에 들어서면서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어 함백산과 태백산으로 이어진다.

이후 속리산과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내륙 한복판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대간의 중추적 위치에 자리한 산줄기가 바로 소백산이다.

소백산은 예로부터 지덕(地德)이 높아 십승지지(十勝支地)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제 국망봉으로

 

좌측:어의곡/ 우측:국망봉 갈림길

 

수리취

 

초여름에 이곳 철쭉이 참 멋있는 곳인데

 

소백산을 대표하는 풍광은 역시 철쭉꽃이 아닐까싶다.

이미 460여 년 전 퇴계선생은 산릉을 따라 8, 9리 길이로 이어지는 철쭉 풍광에 대해 언급했다.

석름(石凜), 자개(紫蓋), 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 철쭉 숲길이

마치 비단 장막 사이를 거니는 듯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것 같기도 하다

봉우리 위에서 술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소백산 철쭉꽃에 흠뻑 취했던 당시의 전경을 전하고 있다.

 

이곳 역시 가끔씩 나타나는 바위들이 어느지점을 지나는지 알려준다.

 

초암사 갈림길

 

소백산 국망봉(國望峰 1,420.8m)

 

참! 전설 같은 얘기지만 “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은 나라를 왕건에게 빼앗기고

천년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과 대찰을 찾아 제원군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라는 궁을 짓고 머물러 있었다.

왕자인 마의태자는 신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슬피 울었다 전해진다.

그 장소가 바로 나라를 바라본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닌 봉우리인 국망봉(國望峰)인 것이다.

 

국망봉 뒤편 여러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 올라서보고

 

남서쪽으로는 비로봉

동북쪽으로는 상월봉

북쪽으로는 신선봉에서 구인사로 연결되는 능선이 잘 보이는 곳인데

 

다시 초암사갈림길로 되돌아 온후 초암사하산길로 내려선다.

 

예전의 등로가 아니라 걷기좋게 등로를 싹 바꿔 놓았다.

 

차츰 무섭게 휘몰아치던 비바람도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초겨울의 정취가 살아난다.

 

돼지바위

 

옛 석륜암터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지은 기영남산수(記嶺南山水)를 보면~

소백산은 영주와 풍기 사이에 있다.

죽계를 따라 십여 리 오르면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한데 안평교를 건너면 백운대가 나오니,

청류와 격단(激湍: 매우 빠르게 흐르는 여울)이 흘러 깊은 못을 이루었다.

태봉의 서쪽에서부터 시내 하나를 건너 앞으로 가면 철암과 석륜사가 있거니와 철암이 가장 소쇄하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 암석 사이에 솟아나는데 물맛이 매우 달면서도 차갑다.

석륜사의 북쪽에 암석이 있는데, 매우 기이하니 마치 커다란 새가 머리를 들고 날으려 하는 모습이다.

(후략)”

 

석륜암터의 봉바위

 

소백산 낙동강 발원지 표지석

 

예전에 없던 표지석인데

세종실록 지리지와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에 나와 있다고

 

석륜암골 시작 지점인듯

 

시원한 식수가 콸콸 흐르고 있다.

 

석륜암터 주위풍경

 

이곳 한켠에 잠자리 마련하고, 오늘 하루 이곳에서 묵어간다.

 

이후 저녁 먹고, 해도 지고 깜깜한데 할 일이 있나, 잠이나 자야지

그렇게 저녁8시 무렵부터 시체가 되어 눈을 뜨니 새벽540분이다.

무려 9시간이 넘게 잠을 자다니어제 하루 상당히 피곤했나 보다. ㅎㅎㅎ

 

보람찬 하루 해가 시작된다.

 

아침 해결하고, 텐트 걷고아니 온 듯 흔적을 남기지 말자.

 

석륜암골로 하산 하는 중에

 

그렇게 나타나는 풍광에 취해 내려가다보니 어디가 등로인지, 물길인지,

분간이 잘 안된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놈들 땜에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쇠자우골/달밭길 초입

 

소백산에도 여러길이 있네

 

죽계구곡 1곡 안내판

 

1/ 금당반석

 

초암사(草庵寺)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세우고자 부석사 터를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으로, 부석사를 세운 뒤 초막을

지었던 곳에 다시 절을 지어 초암사라 했다.

의상대사의 10대제자 중 한사람인 진정스님이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창건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20세기초에 김상호 스님이

조그마한 초가를 짓고 안거하였으나 6.25때 전소되었다.

그 뒤 쇠락해 있던 것을 이영우 스님이 법당을 짓고 기거하였고,

다음에 민덕기 스님이 부임하여 주석하다가 비로사로 옮겼다.

이후 면면히 법등을 이어오던 초암사는 법당1동이 있을 때 비구니 보원스님의

각고의 노력끝에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된 청정도량이다.

 

삼층석탑(높이3.5m)

 

방형의 지대석에 이중기단을 하고 위에 삼층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이다.

상층기단부와 탑신부에 우주를 제외하면 장식이 거의없어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죽계구곡 2곡 안내판

 

2/ 청운대 주위

 

뒤돌아본 초암사

 

죽계구곡 3곡 안내판

 

3/ 척수대

 

죽계구곡 4곡 안내판

 

4/ 용추

 

초암탐방지원센타를 지난다.

 

죽계구곡 5곡 안내판

 

5/ 청련동애

 

죽계구곡 6곡 안내판

 

6/ 목욕담

 

죽계구곡 7곡 안내판

 

7/ 탁영담

 

과연

 

죽계구곡 8곡 안내판

 

8/ 관란대

 

거북바위

 

여기가 이화동일까

 

죽계구곡 9곡 안내판

 

9/ 이화동

 

배점리주차장도 거의 다와 간다.

 

배점리의 지명과 연계해서 기억해도 재미나다.

 

배점리는 인근에 살던 대장장이 배순의 이름에서 왔다.

그는 천민이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퇴계 이황이 제자로 들였다.

뒷날 퇴계가 죽자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지냈으며, 《퇴계문도록》에 제자로 이름을 올렸다.

배점(裵店)은 배순의 대장간을 의미한다.

그는 스스로 선비라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선비 이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죽계구곡 안내판

 

죽계구곡

 

안축의죽계별곡에 근거해 지어졌으며 죽계구곡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다.

죽계구곡에 관한 내용이 「죽계지」와 「흥주지」에 나온다.

그런데 그 후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申弼夏)에 의해 죽계구곡의 명칭이 바뀐다.

그리고 구곡의 상하가 뒤바뀌고 전체 길이도 짧아진다.

「순흥지(順興誌)」의 기록에 따르면, 신필하가 명명한 죽계구곡은

초암사 위쪽에 있는 금당반석(金堂盤石) 1곡으로 하고,

내려가면서 순서를 정해 하류의 이화동(梨花洞) 9곡으로 했다.

이때 이후로 죽계구곡에 큰 혼란이 생겨났다.

누구의 것을 따라야 하는지도 문제지만, 구곡의 위치와 명칭에도 문제가 생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위치와 명칭에 대해 웹상에 떠도는 정보도 많고

지역 사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배점리주차장에 도착하니 어제 영주에서 동창회를 보낸 아내가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