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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한국불교사-11

한국불교사-11

 

11.고려무인시대의 불교

 

-무인정권과 불교계-

의종 24(1170)의 무력반정으로 무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되었다.

기존의 지배층인 왕실과 문인관료들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이를 대신하여 무인들이 새로운 사회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의 교체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존의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연결되었던 수도 중심의 불교는 쇠퇴하고 그 대신에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지방의 결사불교가 등장하였다.

무인정권은 결사불교를 지원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무인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기존의 불교계는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서

무인정권의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 때마다 무인집정자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다.

명종 4(1174)에 개경의 승려 2천여 명이 무인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나섰다가

무인들에게 토벌되었고, 신종 5(1202) 6(1203)에는 경상도 지역의 승려들이

지방 민중과 연합하여 무인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고종 4(1217)에는 침입해 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동원되었던 개경의 승려들이

도리어 집권자 최충헌을 죽이려 하다가 최충헌의 병사들에게 진압되어 수백 명이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불교계의 중심 세력들은 거의 대부분 도태되었다.

왕실 및 문벌 출신들이 교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선종과 천태종에서도 중앙에서 활동하던 기존의 중심 세력이 밀려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새롭게 종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인정권기의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은 지방에서 일어난 결사(結社)불교였다.

개경을 떠나 지방의 조용한 곳에 함께 모여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결사불교는

무인정권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교계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불교계가 쇠퇴한 상황에서 결사불교는 이제 불교계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결사로는 화엄종의 반룡사(盤龍社)와 수암사(水暖社), 법상종의 수정사(水精社),

선종의 수선사(修禪社),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 등이 있는데, 특히 수선결사와 백련결사는 종래 불교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제시하면서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눌과 수선사-

수선결사 즉 수선사(修禪社)는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국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급 관료 집안 출신인 지눌은 어려서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였고, 명종 12(1182)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지눌이 결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명종 20(1190)이었다.

이 때 지눌은 평소 세속의 명리를 떠나서 수행에 매진하자고 약속했던 동료 득재(得才)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선종과 교종의 승려는 물론 유교, 도교의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수행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의 이름인 정혜(定慧)는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고 말한 『육조단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지눌은 명종 27(1197)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도하던 중 대혜 종고(大慧宗豈)

『보각선사어록(普覺禪師語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고서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

이후 지눌은 이러한 깨달음의 입장에서 자신의 선사상을 체계화하고 교화를 펴나갔다.

신종 3(1200)에는 보다 넓은 곳을 찾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서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폈다.

그리고 희종 원년(1205)에는 산과 결사의 이름을 조계산과 수선사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제자인 혜심(慧諶)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혜심(1178~1234)은 본래 국자감에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신종 5(1202)에 지눌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후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지눌이 입적한 이후에는

수선사의 제2대 사주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사주로 있는 동안에 수선사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으며 후원자들도 확대되었다.

 

지눌대에 수선사의 주된 후원층은 지방의 향리층들이었지만

혜심대에는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주된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당시 무인집정자 최우는 혜심을 신뢰하여 수선사에 많은 후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그 문하에 출가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왕실과 고위 관료들의 후원을 얻었던 혜심은 승과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고종 3(1216)에 대선사라는 최고위의 승계를 받기도 하였다.

 

혜심대 이후 수선사는 최씨 무인정권의 비호 아래 불교계 최고의 위상을 계속하여 유지해 갔다.

특히 몽고의 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에 자신의 원찰로서

선원사(禪源社)를 세우고 그 사주로 수선사 출신의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수선사 사주의 제자가 선원사 사주를 맡은 다음에 수선사 사주가 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은 지눌의 가르침에 입각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눌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았다.

 

스님은 늘 사람들에게는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였고, 가르침은 늘 육조단경에 의거하면서,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 종고의 어록으로 보충하였다.

수행법으로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다.


요컨대 지눌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혜능과 이통현, 대혜 종고의 사상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폈으며, 이것이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3() 중에서 성적등지문은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혜쌍수,

즉 정과 혜를 함께 닦을 것을 말한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중생들이 본래 성불한 존재라고 하는

이통현의 사상에 의거한 것으로서 자신이 부처인 것을 깨닫자는 가르침이다.

또한 간화경절문은 대혜 종고의 간화선으로서 화두를 참구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말한다.

 

-요세와 백련사-

천태종의 백련결사(白蓮結社), 즉 백련사는 요세(了世, 1163~1245)에 의해 시작되었다.

요세는 신번현(현재의 합천지역)의 호장 집안 출신으로 12세에 고향의 천태종 사찰에서

출가한 후 23세 되던 명종 4(1174)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천태학을 수학하던 중 신종 원년(1198)에 개경의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참석했다가 실망하고서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신앙결사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이 때 팔공산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던 지눌이 요세에게 글을 보내어 참여를 권유하였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정혜결사에 참여하여 참선수행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참선수행으로 만족하지 못했기에 지눌이 송광산으로 옮길 때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희종 4(1208)

월출산에 머물 때에 문득천태의 묘해(妙解)에 의지하지 않으면 수행의 120()을 어찌할 수 없다라고 했던

영명 연수의 말을 생각하고서 천태의 법화신앙에 의한 수행을 결심하였다.

 

이후 만덕산(萬德山)으로 옮긴 그는 고종 3(1216)에 백련결사를 결성하고 고종 19(1232)에는

보현도량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천태신앙에 기초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신앙과 정토신앙에 기초한 신앙결사였다.

백련결사의 중심이 된 보현도량은 법화 삼매를 닦아 정토왕생을 희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천태 지자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의 내용에 의거하였다.


요세 스스로 이에 의거하여 매일 선관(禪觀)을 닦는 여가에 법화경 전체를 독송하고,

준제(準提)다라니 천 번과 아미타불 만 번을 염송하며, 53체불(體佛)을 열두 번씩 돌며

전생의 업장을 참회하는 수행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에서참회(徐懺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천태교학에 기초하면서 정토염불신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정토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북송대 천태종의 신앙경향과 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세는 지눌이 주재한 정혜결사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선에도 이해가 깊었지만

경전과 계율을 무시하고 참선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의천의 선종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통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요세는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이야기할 때에 의천 이래

고려 천태종의 흐름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요세 이후 백련사는 제자인 천인(天因)과 천책(天址) 등으로 계승되었다.


천인과 천책은 모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출신이었는데,

고종 15(1228)에 함께 요세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중앙관료와 유학자들도 백련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는데,

그 배경에는 유학자였던 천인과 천책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천인과 천책 이후 백련사는 그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수선사와 함께

무인집권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행결사로서 그 위상을 확립해 갔다.

 

-재조(再雕)대장경-

무인집권기인 고종 18(1231)에 몽골의 군대가 고려에 침략해 들어왔다.

최씨 무인정권은 일단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맺은 뒤

다음 해에 곧바로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이후 몽골은 고종 46(1259) 고려 정부가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계속 군대를 보내서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가 겪은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는데, 불교계로서는 특히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몽골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짐으로써 현종대 이래 장기간에 걸쳐 행해졌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장경이 의미하는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태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불사가 시작되었다.

 

고종 24(1237)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이규보가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고려인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일이 힘들다고 하여 다시 만드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제 국왕과 관료들은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담당 관청을 두고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중략)

원하옵건대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전쟁이 그치어 나라가 편안하며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 주십시오.

 

대장경의 재조(再雕) 작업은 담당 관청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의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대장도감은 강화도의 본사(本司)와 함께 남해섬에 분사(分司)를 두었다.

본사에서는 대장경 제작을 위한 계획수립과 경비의 조달 등을 담당하였고,

대장경의 실제 판각작업은 주로 남해의 분사에서 이루어졌다.

남해섬은 대장경판의 재료가 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대장경 제작비용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던 무인집정자 최우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의 경제적 기반이 있는 곳으로 필요한 경비의 조달에도 유리하였다.

최씨 정권은 최충헌 이래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식읍(食邑)

하사받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정안 역시 남해섬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장경의 재조작업은 고종 38(1251)에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이 재조 대장경에는 모두 1,496 6,568(639)의 불경이 포함되었는데,

고려 전기의 대장경에 비하여 500여 권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총 81,137개이며 하나의 경판 양쪽에 경전을 새겼으므로

인쇄된 대장경의 분량은 총 16만 면을 넘는다.

대장경을 새로 제작할 때에는 단순히 종래의 대장경을 그대로 판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 대장경에 포함될 경전의 목록을 작성하고, 여러 판본을 모아 가장 완전한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록 작성과 교감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화엄종 승려인 수기(守其)였다.

승통이던 수기는 불타버린 대장경의 인쇄본을 저본으로 하고 거기에 송나라 및 거란의 대장경,

그리고 그 밖에 구할 수 있는 여러 판본들을 대조하여 최선본을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판본의 교정 내용은 그가 편집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완성된 대장경판들은 추가로 판각된 것과 함께 강화도로 운반되어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계속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은

조선 개국 직후인 태조 7(1498)에 해인사로 옮겨 봉안되었다.

해인사에는 본래 고려의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조선 개창 이후

『고려사』의 편찬을 위해 고려왕조실록을 서울로 옮긴 후 비어 있는 사고에 대장경을 봉안한 것이다.

원래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강화도의 대장경 판전은 이후 조선 왕조의 사고로 사용되었다.


고려의 재조대장경은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유일하게

판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대장경이며, 또한 다양한 판본을 대조한 꼼꼼한 교정으로

가장 완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전해지지 않는 불경들도 여러 종 수록하고 있다.

고려 대장경은 당시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고려 말 청주의 흥덕사에서 백운 경한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란 책을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인쇄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운은 역대 부처님과 조사들의 법어와 게송 등에서 선의 요체가 되는 것을 가려 뽑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금속활자를 통해 불서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선조들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선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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