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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한국불교사-12

한국불교사-12

 

12.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의 불교계

 

-불교계의 친원화(親元化)-

무인정권이 몽골과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고 부처님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대장경 제작에 열의를 기울였지만, 고려는 결국 몽골에 굴복하고 말았다.

고려가 항복한 직후 몽골은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새로운 복속국이 된 고려를 자신들의 뜻대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했던 무인정권은 원의 압력으로 붕괴되었고 국왕 중심으로 복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에서 파견된 관료 및 원의 지배층과 결탁한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왕실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나라 권력자들의 의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에 의하여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었고 고려 왕실 내부에서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원나라 지배층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 또한 원의 통치에 순응하는 형태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의 간섭 아래 고려 정부가 독자적인 정치운영을 하지 못하고

부용국 체제에 맞춰 운영되었던 것처럼 불교계도 원나라에 복속된 모습을 보였다.

모든 법회 의식에서는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기에 앞서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안녕이 축원되었고,

주요 사찰들은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의 원찰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원나라는 불교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원 황실과 귀족들의 원찰로 지정되면

정치적 보호와 함께 경제적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불교의 오랜 전통인 담선(談禪)법회도 원의 압력에 의해 중단되었다.

태조 때에 시작된 담선법회는 선사상의 홍포와 함께 외침을 당하였을 때

이를 극복하는 의미를 담아 국가적 규모로 행해져 왔다.

그런데 충렬왕대 초기에 일부 친원파들이 원나라 조정에 담선법회는

원나라를 저주하기 위한 행사라고 모함하여 고려가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공민왕대까지 담선법회는 개최될 수 없었다.


또한 고려불교의 최고 명예직인 국사라는 호칭도 원나라의 국사 칭호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국존(國尊) 또는 국통(國統)으로 바뀌었다.

무인집권기에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결사불교도 그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최씨 정권 아래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수선사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원나라 황실의 비호를 받는 사찰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결사불교마저 변질되는 가운데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승려는 일연(一然, 1206~1289)이었다.

특히 그는 문헌편찬에 몰두했는데, 불교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의 역사적 일화들을 모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여러 저술을 남겼다.

원 간섭기에 고려 사회와 불교계가 정체성이 흔들릴 때 사상적 기반을 확인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일연의 작업은 민족사와 불교사에 공히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새로운 사조의 수용-

원 간섭기에는 원과 고려 사이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므로

불교계에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원 간섭기 초기에는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황제의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온 인물 중에 티베트 승려들이 있었으므로

고려는 이들을 통하여 티베트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된 이후에는 공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티베트불교는

공주의 수행원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을 중심으로 신앙되었다.

고려 왕실에서도 충렬왕과 충선왕이 티베트 승려로부터 보살계를 받기도 하여,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고려 출신으로 원에 들어가서 티베트불교의 승려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중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하지만 고려에서의 티베트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불교계나 일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

고려인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고려의 불교가 원나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원에 거주한 고려인들은 티베트불교보다는 전통적인 중국불교의 신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독자적으로 사찰을 세우고 고국에서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활동은 원나라 고관들과 결혼한 고려의 여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황제의 후궁이나 내시들도 참여하였다.

고려인들이 세운 사찰은 이후 고려에서 유학 온 승려들의 활동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고려의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 조정에서 활약한

충선왕의 불교 후원 활동도 중국불교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황실의 대표로서 여러 종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승려들을 후원하고

백련종(白蓮宗)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연경과 강남지방의 주요 사찰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시납하고,

임제종의 고승 중봉 명본(中峰明本)과도 교유하였다.


강남지역을 순회할 때에는 의천이 유학하였던 항주의 혜인사(慧因寺)를 방문하고

토지를 시주하여 중흥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려인들에 의해서 고려의 불교성지가 원나라 지배층에 알려져 특별한 존중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법기(法起)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진 금강산은 원나라 황실과 고관들의 불사가 계속되었고,

다른 유명 사찰들에도 원의 고관과 연경 거주 고려인들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고려 말의 불교계-

13세기 말에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1308)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널리 확대된

간화선의 수행법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려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원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전통적 종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선종만이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었던 점도 고려에 간화선이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간화선풍이 불교계의 일반적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가 신자들의 화두참구도 성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귀족 자제들이 선종으로 출가하는 예가 점차 많아졌다.

급기야 선종은 명실상부한 불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교학불교의 승려들도 참선을 주로 하게 되어,

결국 선종과 교종의 구분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본래 선문의 규범으로 정해진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원나라에서 수입되어

불교사원 전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종파를 넘나드는 승려들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오늘날 한국불교조계종의

법맥과 종풍을 정립한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태고는 고려 충렬왕대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양주 회암사로 출가하였다.

19세부터 화두를 참구하였으나 선교를 겸수하여 26세에는

화엄종 승과에 합격하였던 만큼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후 다시 선에 정진하여 37세에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들어 마치

세상을 크게 버리고 죽은 사람인 듯 보였는데 38세에 활연대오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태고는 깨침 이후 46세 되는 1346년 원나라로 향해 당시 선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가서 순례하던 중강호의 진정한 안목은 석옥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석옥 청공(石屋淸珙, 1257~1352)을 친견하고 깨침을 인가 받았다.


석옥은 조계 혜능, 마조, 임제의 법을 이은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로,

태고는 임제선법의 증표로 의발을 받아 돌아왔다.

태고는 56세 되는 고려 공민왕대에 왕사로 추대되어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거듭된 청으로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당시 각각의 문중으로 화합하지 못하던

구산선문의 통합을 추진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였다.


태고의 이러한 뜻은 선종은 본래 하나인데 구산으로 나누어져

화합하지 못하는 병폐를 치유하며 나아가 의천에 의해 약화된 선종을 중흥하여

『백장청규』의 정신을 되살리고 간화선풍을 드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은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역시 태고 보우와 동시대인으로

고려 말 선풍을 떨친 대선사였다.

흔히 한국불교계 삼화상(三和尙)하면지공ㆍ나옹ㆍ무학을 꼽고

사찰의 삼성각에 진영을 모시어 둔 곳이 있을 정도로 이름난 고승들이다.


나옹은 20세에 문경 사불산 묘적암으로 출가하여 화두 참구를 하였으며

양주 회암사에서 깨치고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평산 처림과 지공, 두 선사로부터 전법인가를 받아 각각 가사와 불자를 받고 돌아와 간화선풍을 떨쳤다.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추대하였고, 나옹의 제자로는 고려 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무학 등 100여 명이 있다.

 

이와 같이 불교계가 간화선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가운데 불교계 밖에서는

성리학이 신진사대부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들도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사찰이 왕실 및 권문세가와 연결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승려가 되어 수행자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찰재산의 축소와 승려자격의 강화가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실시되지 못하면서

점차 불교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었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사대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진보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들은 모든 사찰을 철폐하여 관청과 학교로 사용하고 승려는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하자는 척불론을 주장하였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심각한 대립 끝에 진보파 사대부들이 승리하여 조선 왕조가 열리게 되었고,

척불론은 사대부들 사이의 명분으로 확립되었다.

비록 일부 국왕의 불교에 대한 호의와 전통적 신앙에 대한 민심의 고려로 척불론이

온전히 실시되지는 못하였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궁극적으로 척불의 완성을 지향하며 정책을 추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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