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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가

토굴가     -나옹선사-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 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 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默默)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期限定)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 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 제불회상(靈鷲山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는데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커든 세욕(世慾)인들 있을소냐.

욕정(欲情)이 담박(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업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뜻 올라

무공저(無孔笛)를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 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 제

무착령(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靈山會上佛菩薩)

 

 

-토굴가 풀이-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골에 한 칸의 토굴을 지어 놓고

소나무 문을 반쯤 열어 놓고 돌밭 길을 천천히 산책을 하니

시절은 버들가지 푸른 춘삼월 봄날에 훈훈한 봄바람이 건듯 불어오고

뜰 앞에는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이 여기저기 만발하였는데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봄날의 싱그러운 자연의 빛깔들이 더욱 좋다.

이런 것 중에서도 무슨 일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중요한 것인가?


잠시의 인연화합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닌, 생멸하지 않고,

인과가 없고 번뇌가 없는 불생불멸하는 진짜 묘한 법()향을 옥 향로에 꽂아 두고

아주 고요한 밝은 창가에 묵묵히 홀로 앉아서

한 십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이 도리(生死없는 도리)를 기필코 깨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니 세상 사람 다 모르는 일을 나 혼자 훤하게 깨달아 마음의 달이 밝게 떠올랐는데,

근본 무지에 쌓여 있다보니 어둡고 긴 밤 같은 전생의 업과 현생의 업 속에 끌려

번뇌와 불안 속에서 참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체 세속을 헤매고 다닌 것이다.


깨닫고 보니 세상사, 풀 한 포기, 돌 하나 물소리 하나가 그대로 부처님 법문이 아닌 것이 없더라.

달마조사가 소림굴에서 면벽수도하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불법을 어찌하여 멀리서 찾겠는가?

이것은 본인이 직접 깨닫기 전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도리이다.

청산은 아무 말이 없고 맑은 물만 잔잔히 흐르는데

시원한 맑은 바람 슬슬 불어오니 이것이 어떠한 깨침의 도리인가?


하나의 밝은 이치가 확연히 들어 나니 살림살이

(닦아 놓은 마음, 어디에도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아 대자유인이 된 마음)풍족할 수밖에

천 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골짜기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의 맑은 물과 솔잎을 나무 그릇 하나에 담아

양식으로 일용하고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데 입는 것에 무슨 관심이 있겠나?

백 구멍이 나면 어떻고 천 구멍이 나면 어떠랴,

의식주에 관심이 없는데 세상사 욕락(慾樂)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부질없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이 깨끗해지니 잘못된 집착들이 붙을 곳이 없고

위와 같은 4상이 없으면 자연이 진짜 나의 참 모습(眞我)이 훤하게 들어 날 것인데

그것이 진짜 나의 법성(法性: 참모습, 참 부처)일 것이다.

이쯤 되면 만물이 부처 아님이 없고 법문 아님이 없는 가운데 나(진짜 참 나)의 법성만이 뚜렷이 밝을 것이다.

달빛이 교교한 달밤에 완전히 깨달은 열반의 언덕에 선뜻 올라서서

이렇게 되고 나면 형상에 집착함이 없을 진데 구멍 없는 피리를 불지 못할 이유가 없고,

줄 없는 가야금을 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깨달아 자성이 확연히 들어 나면 그 것 보다 더 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즐거우면 돌사자가 춤추며 노래하고 솔바람이 화답하겠는가?

깨달음의 희열은 깨달은 이만이 아는 법

무착령(위에 나오는 무위(無爲)와 비슷한 뜻으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얽메이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부처의 경지에서 아래를 내려 보면 모든 세상사 그대로가 부처 아닌 것이 없고,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일 것인데 온 천지가 부처님 세계고 극락이라

그대로 다 깨달음의 나무에 우담바라가 만발하게 피었더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 靈山會上 佛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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