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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금강경 강해-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6 (3)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6 (3)-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오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하이고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즉착아인중생수자

"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니라."

 

 

평형(平衡)을 이루고 있는 저울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도

균형이 깨어져 저울이 기울어집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어디에 조금이라도 기울면

상을 취하게 되어 편견(偏見)이 생깁니다.

진리가 아니다 하는 의식에 집착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편벽이 생겨 문제를 다발적으로 야기시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생들이 겪는 아픔이나 상처, 심지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葛藤)은 집착을 떠나서 생기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의 입장에서 고집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도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여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집착에서 오는 편벽을 없애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상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면 이해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지닌 가치와 존엄성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고

그 기능과 능력을 힘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 은 시종일관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살것을 가르칩니다.

그야말로 무상(無相)으로 근본을 삼고 무주(無住)가 주체가 되어

무위(無爲)에까지 이르러야겠습니다.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옛날, 시집가는 딸에게 흔히 일러주는 말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 하지 말라."얼핏 들으면 상식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랬으니 좋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이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법상도 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비법상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을 통하여 사상(四相)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어 큼직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예기치 않았던 법상이라는 병통이 생깁니다.

이것은 사상(四相)보다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법이라는 것도, 법 아니라는 것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각자의 무궁무진한 본성을 깨달아 신선한 아이디어로

주어진 삶을 바람직하게 열어라 하는 것입니다.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호대 汝等比丘가 知我說法을 如筏喩者라하노니

이시의고    여래    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法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길,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으로 바유함과 같음을 알라고 하노니

법도 오히려 은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우리 중생들은 가지가지 집착이 생기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항상'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기분이 평소와 다르거나 제자가 잘 못 알아들을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편 뒤에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깨달아 가르치는 말씀을 뗏목처럼 알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불교의 경지와 안목을 여러 가지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강을 건너가 버린 뒤에는 필요없는 물건이 됩니다.

강을 건너는 데에 꼭 필요하고 또 너무나 고마웠다고 하여 강을 건너고 난뒤에도

계속하여 소중하다고 무거운 뗏목을 어깨에 메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 없이 크고 높은 부처님의 설법의 중요성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의 본성(本性)을 바르게 깨달아 우리들 삶을 바람직하게

가꾸어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도 뗏목처럼 여기고 우리들 자신이 삶을

주인공 되어 우리들 본바탕을 한껏 꽃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밥을 먹어서 힘을 내어

나의 생명을 유지하여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에서 불교가 얼마나 고도의 지성(知性)을 가진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중교는 "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라. 나를 길로 알고,

빛으로 알며 진리도 알아라. 나 의외의 것은 결코 신봉해서는 안 된다."

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 스스로 "내 설법을 뗏목처럼 알아라."는 것입니다.

전혀 상식이나 논리에 맞지 않고 고도의 문명 시대에도 맞지 않지만

 "나를 믿어라. 그렇지 않으며 지옥이야."라고 하면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잘 따라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지성이 높은 사람은 픽 하고 웃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리스마적인 절대 권위가 대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절대적인 권위로 진리를 무너지게 한 말이

그 어느 경전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교가 중구 난방이고 결속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이니 이렇게

밖에 달리 산 진리를 나타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지식이 더 있을 것 같으면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려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엄청남 깨달음을 남김없이

다 쏟아 놓으시고도 버리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던 것입니다.

법에 대한 집착이 깨달음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항상 뗏목처럼 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구절 하나에서도 불교의 특색이나 사상, 불교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타종교와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의미깊게 음미할 줄 아는 안목을 경안(經眼)이라고 합니다.

또 왜 부처님게서는 뗏목을 비유로 들었는지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몇십 년 동안의 긴 세월을 갠지스 강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교화 활동을 펴셨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게 자주 이용한 뗏목을 비유로 들면 제자들이 쉽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조그만 것에도 세심하게 배려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