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046)선사
1871년(高宗 8년)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여산 송씨이며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요 어머니는 김씨다.
어릴적 이름은 도암(道岩), 법명는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스님이 열세살 되던 해 계미년 겨울에 전북 김제 금산사에 가서 연말을 보내면
장수하고 만사가 길하다는 말을 듣고 금산사로 가서 부처님의 등상(等像)과
스님들을 보니 환희심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다시 집에 돌아온 후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자 청하였으나 부모님은
허락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촌형으로 하여금 더욱 더 엄하게 감시를 하였다.
몇일 후 스님은 몰래 야반도주하여 전주 봉서사로 가서 며칠 동안 머무는 중
여러 스님들이 삭발하여 스님이 되라고 권하였으나 그 곳에 인연이 없었던지
마음이 들지 않아 이 절을 떠나 다시 당도한 곳이 전주 송광사였다.
그곳에서 스님들이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니 여러스님들이 인자하게 맞아주며 말했다.
“이곳은 훌륭한 스님이 없으니 쌍계사에 진암(眞岩)노사(老師)를 찾아가라”고
권하기에 다시 논산 쌍계사로 갔다.
그때 진암노사가 계룡산 동학사로 옮기셨다 하여 다시 동학사로 가서 진암노사를 뵙고
거기서 안주하게 되었으니, 때는 스님 나이 열 네 살이 되던 갑신년이었다.
얼마 후 양식이 떨어져 그곳의 젊은 스님과 함께 동냥을 나가게 되었다.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중도 아닌 유발동자가 무슨 동냥을 하겠는가?” 하기에
스님이 말하기를, “얻어먹는 사람이 승속(僧俗)이 따로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렇게 젊은 스님과 동행하여 십여일 만에 엽전 여덟냥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진암노사가 스님의 손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되, “내가 남의 귀한 집 자제를
중도 만들기 전에 동냥부터 시키니 나같이 박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이다” 하며
눈물을 흘리니 스님이 말하기를, “순(舜) 임금도 독 장사를 하였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후 갑신년 시월 초순 어느날, 한 객승이 왔는데 이분이 바로 천장사에서 온 경허(鏡虛) 화상이었다.
그렇게 경허스님과 같이 살던 중 진암노사가 경허스님에께 “이 아이가 비범한 기틀이 엿보이니
스님이 데려다가 잘 지도하여 장차 불교계에 동량이 되도록 하여 주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처음에는 경허스님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진암노사의 간곡한 말에 결국 따르기로 하였다.
그 해 12월에 천장사에서 태허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스님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니 법명이 월면(月面)이었다.
그 뒤 스물다섯살 계묘년 11월 1일에 17, 8세 되어 보이는 초립동 소년이
천장사에 찾아와 하룻밤을 동숙하는데 그 소년이 묻기를,
「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라는 것만 깨달으면
생사를 해탈하고 만사에 무불통지한다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이오.」하고 물으니 스님을 대답을 못하였다.
그 뒤로 이 화두에 대하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여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며칠을 지내게 되었는데, 어른스님을 시봉 하면서 공부하기란 참으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몰래 길을 떠나 온양 봉곡사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을미년(1895)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해 오던 의심은 조금도 흐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소리가 울릴때까지, 화엄경의 사구게를 외우다가
若人欲了知 (약인욕료지) 만약 사람이
三世一切佛 (삼세일체불)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할진댄
應觀法界性 (응관법계성) 응당 법계성을 관하라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일체를 마음이 지었느니라
문득 법계성을 깨달아 화장세계(華藏世界)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을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이기고금외) 빈 산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白雲淸風自去來 (백운청풍자거래) 흰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何事達摩越西天 (하사달마월서천)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고
鷄鳴丑時寅日出 (계명축시인일출)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오르네
그 뒤로는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르기를,
“나에게 희유한 일이 있으니 나와 함께 공부함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사람들은 스님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모두 이르기를,
“저녁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밤사이에 미쳤다”고 비웃기만 하므로 스님은 이런 곳에
더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지리산 청학동을 향하여 떠났다.
가는 도중 장성 지방에 이르러 한 노인에게 지리산 가는 길을 물으니 노인이 말하기를,
“장성에 기산림이라는 선생이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사방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중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진중에서 밥짓는 일을 시키니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기에 본사(本寺)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중에 공주 마곡사에 들리니 옹사(翁師)되는 보경화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그만 토굴을 하나 만들었으니 거기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그 토굴에 가 본즉 마음에 들므로 파전(坡田)을 일구어 연명하며 지냈다.
그렇게 토굴에서 3년이 되던 해 스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 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선사가 왕림하매 스님을 뵙고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火中生蓮 (화중생련) “불 속에 연꽃이 피었구나”하며 기뻐하셨다.
다시 경허선사께서 스님에게 묻기를,
경허: 등(藤) 토시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월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네가 일찍 다비문을 보았느냐?
월면: 보았습니다.
경허: 다비문에 有眼石人齊下淚 (유안석인제하루) “돌사람이 눈물 흘린다”라 하니
이 참 뜻이 무엇인고?
월면: 모르겠습니다.
경허선사가 이르되, “돌사람이 눈물흘린다”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하였다.
경허선사께서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는 더 이상 진보가 없으니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다시 드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 하고 떠났다.
그 후 무자화두를 열심히 의심하던 중 날이 갈수록 경허선사를 경모(傾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무술년(1898) 7월에 경허스님이 계신 서산 도비산 부석사로 가서
다시 경허스님을 뵙고 날마다 법을 물어 현현(玄玄)한 묘리를 탁마(琢磨) 하였다.
그 때 경남 동래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선사께 청첩장이 왔으므로
스님이 경허선사를 모시고 갔는데 침운(枕雲)스님도 동반하게 되었다.
이후 계명암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경허선사와 이별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아 백천삼매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하여 생사의 큰 일을 마친 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스님이 서른 한 살, 신축년 7월 말경에 천장사로 다시 돌아와 머무르며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면서” 소요자재 하였다.
스님이 서른 네 살, 갑진년 7월 15일에 경허선사께서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를 들리게 되었다.
스님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保任)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선사께서 몹시 기뻐하며 기꺼이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雲月溪山處處同 (운월계산처처동)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山禪子大家風 (산선자대가풍) 수산선자의 대 가풍이여
慇懃分付無紋印 (은근분부무문인) 은근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 (일단기권활안중) 한 조각 권세 기틀이 눈 속에 살았구나
이어 만공(滿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리고 이르되,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하노니 잊지 말라.」하고 주장자를 떨치고 길을 떠났다.
그 때부터 스님은 모든 산천을 돌아다니다가 을사년(1905) 봄에 덕숭산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금선대라 이름하고 보림(保任)을 하니 제방의 납자들이 구름 모이듯 와서 스님에게 설법하기를
청하거늘 사양하다 못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니 이것이 개당보설(開堂普說)이었다.
그 뒤로 스님의 문하에서 용상대덕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그 뒤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에 가서 삼하(三夏)를 지냈다.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안면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한 칸 띠집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둥근 달을 굴리시다가 1946년 10월20일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 하고 껄껄 웃다가 열반에 들었다.
다비를 모시던 즉시 흰 연기 위에 홀연히 백학이 나타나 공중을 배회하고 오색 광명이 하늘에 닿았다.
이 광경을 본 대중은 환희심과 기이한 생각으로 다비를 다 마친 후 영골을 모아
석탑에 봉안하니 스님의 세수 75세요 법랍은 62세이며 석존 후 76대이다.
만공 스님은 참으로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던 시절이라 큰절이건, 작은 절이건
늘 양식조차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공 스님이 와 계시기만 하면 그 절에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주도 줄을 이어서 절살림이 금방 넉넉해지곤 하였다.
어느날 비구니 일엽(一葉) 스님이 만공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스님께서 금강산 마하연에 계실 때도 그랬고, 이 수덕사도 그렇고,
스님이 계시기 전에는 끼니걱정하기 바빴는데, 스님께서 머물기만 하시면
시주가 줄을 이어 양식 걱정을 안하게 되니,
스님께서는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그리도 많이 지으셨습니까?”
“전생에 내가 고생고생 해가면서 저축을 좀 해 두었더니 그게 지금 돌아오는 거야.”
“무슨 저축을 어떻게 하셨는데요?”
만공 스님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시더니 말씀을 이어 나갔다.
“전생에 나는 여자였느니라. 그것도 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였다.
부모복도형제간 복도 없는 박복한 여자였어.
그래서 전라도 전주땅에서 기생노릇을 했었지.
“예에? 기생을요?”
“그 때 내가 육보시(肉布施)를 좀 했지.
그리고 버는 돈이 있으면 굶은 사람들 양식을 사다 주고,
전주 봉서사에 계신 스님들 양식도 대어드리고,
그 때 그 양식들이 저축이 되어서 이제 조금씩 돌아오는 거야.”
만공 스님은 조금도 스스럼없이 당신의 전생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는 하였다.
당신께서는 3생 전에 전주에서 향란이라는 기생노릇을 했는데,
그 때 바로 진묵대사께서 전주 봉서사에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후생에는 장수였고, 바로 전생에는 소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스님께서 바로 전생에 소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전생이 빚을 갚느라고 소로 태어났었는데, 소노릇을 하면서도
제대로 빚을 못 갚아 그 남은 빚을 갚으려고 중이 되었다.”
“소로 사셨으면 빚을 다 갚으셨을 텐데 무슨 빚이 또 남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이 녀석아! 소도 소 나름이지. 여물만 배터지게 먹고 일할 때 게으름을 피우면
소노릇을 하면서도 빚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늘이는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옛스님들은 이렇게 경계하셨느니라.
출가승려라고 해서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을 받아 먹고 중노릇을 게을리 해서
불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는 신도들의 재물을 도적질한 것과 같은 것이니,
마땅히 죽어서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느냐?”
오늘 우리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아나가기는커녕, 행여라도 새로운 빚을 늘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일이다.
옛날 부처님 살아계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을 ‘입안의 혀’처럼
극진히 시봉했다고 불전(佛傳)은 전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공스님은 스승 경허 선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모른다.
만공이 젊었을 때, 경허 선사를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경허 선사는 술과 고기를 마다 않으시고 드시는지라 일부 수행자들 간에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해인사의 눈푸른 선객이었던 제산 스님과 주지 남전 스님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경허 선사께 곡차와 고기안주를 올려드렸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경허 큰 스님께는 곡차와 닭고기를 계속 올릴 것이오.”
주지였던 남전 스님도 맞장구를 쳤다.
“경허 큰 스님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나는 닭 아니라 소라도 잡아 올리기를 서슴지 않겠소.”
이 때 만공 스님은 결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만일 경허 큰 스님을 모시고 깊은 산속에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저는 기꺼이 제 살점을 점점이 오려서라도 스님을 봉양할 각오입니다.”
그만큼 스승 경허는 제자 만공에게 절대적인 존재였으니, 오늘날에 과연 이토록
극진히 스승을 모시는 제자가 남아 있을까.?
1937년 3월10일 아침의 일이었다.
잠시 충남 마곡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만공 스님은 그날 서울행차를 준비하고 계셨다.
다음날인 3월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미나미(南次郞)총독이 주재하는
조선불교31본산 주지회의가 소집된 때문이었다.
당시 스님은 시봉하고 있던 어린소년 몽술행자가 스님께 여주었다.
“공양간에서 듣자니 노스님께서 오늘 경성(京城)에 가신다고들 하던데 정말가시옵니까요?”
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공 스님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다.
“너 이녀석 몽술아! 몽술이 너는 도대체 조선사람이더냐, 왜놈이더냐?”
“예에? 그야 저는 조선사람입니다요. 노스님.”
“그런데 어째서 조선사람 입에서 ‘경성’이라는 소리가 나오는고?
경성이라고 하는 소리는 왜놈들이 억지를 갖다 붙인 이름이요,
무학대사께서는 한양이라고 하셨느니라!”
“아, 예 노스님. 잘못했사옵니다.”
“다시는 경성 소리 입에 담지 말아라!”
“예, 노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만공 스님은 그만큼 나라 잃은 통분을 가슴 속에 늘 담고 계셨고
단 한번도 ‘경성’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지 않으셨다.
1937년 3월11일 오전 11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는
조선8도의 도지사와 조선불교 3본산주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나미총독의 주재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조선불교의 승려들이 도성출입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일본의 덕분이요. 그렇지 않소?”
간교한 미나미총독의 인사말이 끝나자 조선의 여러 주지들이 이구동성 아부하고 나섰다.
“사찰령을 선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데라우찌 전 총독의 은혜가 정말 중합니다.”
바로 그 때였다.
마곡사 주지 만공 스님이 더 이상 치사한 아부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면서 일어섰다.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조선불교는 조선승려에 맡겨라"
회의장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할을 한 만공 스님은 계속해서 사자후를 토했다.
"한일합방 이전에는 절 안에서 음행하거나 술마시는 파계자가 있으면
뒤통수에 대고 나팔을 불어 내쫓거나 북을 지워 두들기며 산문출송을
해온 관계로 규모있는 교단생활을 하여 불조의 혜명을 이어왔다.
그러나 합병되어 사찰령 사법이 시행된 뒤로는 주지의 전단이 자행되어
승통이 문란하게 되고 일본승려의 파계하는 영향을 받아 취처, 음주, 육식을
공인하게 되었으니 조선승려 전부가 파계승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 책임이 모두 총독부 당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經)에 이르시기를 ‘한 비구를 파계시켜도 삼아승지겁동안
아비지옥에 덜어진다’하였거늘, 7천승려 전부를 일시에 파계하게 한
공밖에 없는 총독부 당국에 무슨 대단한 업적이 있겠는가?...
(중략)...
이같은 죄를 지은 데라우찌(寺內)총독 이하 당국자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만공 스님의 사자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미나미총독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마곡사 주지는 조금 전에 내뱉은 망언을 당장 취소하시오!”
이에 만공 스님은 사정없이 주장자를 높이 들어 세 번 내리친 뒤
또 한번 사자후를 토했다.
“마곡사 주지 송만공은 내가 한 말을 절대로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온갖 교언영색으로 데라우찌 전임 총독을 칭찬한
조선승려들은 잘 들어야 할 것이오!
데라우찌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지런히 도를 닦아 성불하여
데라우찌를 지옥에서 건져내기부터 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조선불교를 진정으로 진흥시키고자 한다면 총독부가
조선불교를 간섭해선 안될 것이니 조선불교를 조선승려들에게 맡기시오!”
이날, 피를 토하듯 내쏟는 만공 스님의 사자후로
총독부 회의는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2천만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쥐고 있던 미나미 총독 옆에서
이토록 거침없는 사자후를 통쾌하게 내쏟을 수 있는 스님이
과연 만공 스님 말고 또 누가 있었을 것인가.
이날 밤, 이 통쾌한 소식을 전해들은 만해 한용운 스님은
만공 스님의 속소까지 찾아와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참으로 잘하셨소! 과연 천하의 만공 스님이시오!
천하의 만공이 칼을 뽑아들었으니 저 쥐새끼 같은 왜놈들 간담이 서늘했겠구먼.
음, 하하하 헌데 만공, 기왕이면 할만 하지 말고 주장자로 한방씩 갈겨주지 그러셨나?”
이에 만공 스님이 한마디 응수했다.
“이 좀스런 사람아, 미련한 곰은 몽둥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을 하는 법이네.”
과연 만공 스님은 스러져 가던 우리불교를 지켜낸 통큰 사자였음에 틀림없다.
청와대에서 밥만 먹자고 해도 쭈루루 달려가는 스님들,
장관, 국회의원만 뜨면 버선발로 달려나가 굽실거리는 스님은 설마 아니계시겠지,
만공 스님이 총독부회의를 망쳐버린 당시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은
공교롭게도 전임 데라우찌 총독의 아들이었다.
그야말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경무총감인데, 자기 아버지가 아비지옥에
떨어져 있다는 모욕을 당했으니 그는 만공 스님을 무슨 죄목으로든 잡아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나미총독이 “만공은 그렇게 다룰 인물이 아니다”고 극구 만류하고
오히려 만공 스님에게 당근정책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미나미 총독은 충청도 도지사를 시켜 만공 스님께 일본유람을 시켜드리도록 유회책을 썼다.
“미나미 총독 각하께서 스님께 특별히 은전을 베푸시는 것이니 일본유람을 다녀오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만공 스님은 일언지하에 일본유람을 거절했다.
“일본 유람. 난 일없네!”
“아니 이건 총독각하의 특별한 은전인데....”
“이 사람아, 나라잃은 백성은 이미 송장이거늘 송장을 데려다가 일본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자 보아라,
저자들이 바로 조선불교계의 송장들이다’하고 구경이나 시키자는건데,
내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러 일본에 간단 말인가!
일본 유람 못가서 안달이 난 놈들이 수두룩 할테니 그자들이나 데리고 가게!”
만공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1930년대 말경, 만공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나이의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는
어느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들의 말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이 노래는 그야말로 음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나이의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음란한 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이 노래를 배운 이후, 절안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제법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스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스님은 쾌히 청을 승낙하시더니 마침 좋은 법문이 있느니 들어보라
하시면서 진성사미를 불러 들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전에 노스님께서 그 노래를 칭찬해주신
일도 있고 해서 목청껏 소리 높여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 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힌채 어찌할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때 만공스님께서 한 말씀하셨다.
“바로 이 노래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나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하며 감사히 여겼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스님은 조선총독 앞에서도 할 소리를 하신 무서운 스님이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셨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이처럼 손짓 발짓으로 춤을 추며 ‘
누름갱이 노래’를 부르실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이신 만공선사는
타고난 풍류객의 끼를 지닌 멋쟁이 스님이셨다.
1930년대 중반, 운현궁에 있던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이 민공스님께 귀의하면서
그 신돌(信)로 스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한가지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주저없이 운현궁에 내려오는 거문고를 달라고 하였다.
이 거문고는 고려때 것으로 역대 왕조의 임금들 가운데서 가장 풍류를 즐겼던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든 신품명기(神品名器)이며, 조선왕조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대원군을 거쳐 의친왕에게 전해진 가보중의 가보였다.
통근 의친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거문고를 밤중에 수채구멍을 통해
내보내 선학원에 머물고 계신 만공스님께 전하게 했다.
만공스님은 이 보물같은 거문고를 소림초당에 걸어두고 명월이 만공산하면
초당앞 계곡에 놓인 갱진교에서 현현법곡(泫泫法曲)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흐르는 물소리는 조사의 서래곡이요 너울거리는 나뭇잎은 가섭의 춤이로세.”
만공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 늘 당부하셨다.
“주인공아, 정신차려 살필지어다.
나를 낳아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것을 보호하여주는 나라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씀씀이를 위해 가져다주는 시주의 은혜를 아느냐?
정법을 가르쳐주는 스님의 은혜를 아느냐?
서로 탁마하는 대중의 은혜를 아느냐?
이 더러운 몸이 생각생각에 썩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사람의 목숨이 호흡사이에 있음을 알고 있느냐?
중생이 가이 없는지라 서원코 건져야할 것이며,
번뇌가 다함이 없는지라 서원코 끊어야할 것이며,
법문이 한량이 없는지라 서원코 배워야할 것이며,
불도가 위 없는지라 서원코 이루어야 할 것이니라.”
“마음이란 것은 모든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의 할아비이며,
모든 법의 근원인고로, 전불(前佛), 후불(後佛)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文字)를 세우지 아니하시었나니라.
부처님이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자리를 나누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었으며,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 곽(槨)속에서 두 발을 보이사,
이 세 곳에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교외별전 법을 전하시고,
가섭이 아난(阿難)에게 전하사 삼십삼대에 걸쳐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함이 덕숭산에 이르러 경술년으로부터 이제까지
삼십회에 달한바, 무슨 법으로써 사람을 위하였는가?”
스님이 보기에는 8만 4천의 법문이 모두 부처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이고,
오직 있는 것은 마음을 바로 가르쳐서 견성성불하게 하는 참선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법을 여의고는 만가지 법을 닦을 지라도
부처의 참된 법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
그렇게 철저하게 외곬수로 선 일원의 공부법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산사에서 일생을 통하여 정진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현대 한국인의 가슴속에 선, 더 나아가서 불교의 존재가치를 확신시켰다.
그야말로 말없는 말이요, 행동 없는 행동인 것이다.
만공스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게 견지한 삶의 태도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현실정토의 실현보다는,
마음정토를 참선을 통해서 찾는 참된 선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스님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경지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법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에 맞는 선불교, 새로운 선불교를 외치기보다는,
선불교가 어느 시대에나 들어맞는 새로움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사실의 세계에 적응하는 ‘불교의 현대화’보다는,
경지의 세계로 사실의 세계를 정화하는 ‘현대의 선불교화’를 시사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현재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눈푸른 납자들의 존재야말로,
스님이 그렇게 원하던 대중들의 모습이요,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 자산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만공스님의 진정한 후계자들이며, 새로운 만공스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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