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 정석(鏡峰 靖錫 1892~1982)선사
법호는 경봉(鏡峰), 법명은 정석(靖錫),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1882년 4월9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광주김씨 영규(榮奎) 거사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가 설립한 명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 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淸湖)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종무소에서 소임을 보는 틈틈이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 라는
〈화엄경〉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의 혜월(慧月)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등 이름난 선원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스님과의 선담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안양암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하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法主)겸 설주(說主)를 맏아 철야로 설법하고 정진하던 중, 4
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20일에 방안의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 (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 (목전즉견주안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呵呵逢着無疑惑 (가가봉착무의혹)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 (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화 꽃 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
그 뒤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오대산 한암(漢岩, 1876~1951), 가야산 효봉(曉峰, 1888~1966) ,
직지사 제산(霽山, 1862~1930)스님 등 제방의 선지식에게 서간문을 보내고,
만공(滿空, 1871~1946)선사와 용화사 전강(田岡, 1898~1975) 스님과 법문답을 했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현재의 선학원) 이사장,
1949년에는 다시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며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을 선양했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입적하시던 날까지 이 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 내원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경봉스님은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해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 하였다.
열려진 방문에는 언제나 구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스님은 특히 알아듣기 어려운 선법문이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선도리를 말했으며,
옛 스님들이 해놓은 법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사 자신의 안목으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갈파했고, 시와 시조, 선묵(禪墨)에도 뛰어났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는데 9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시자의 부축을 받고 법좌에 올라 설법했는데, 매회 1,000명 이상의 불자들이 운집했다.
또한 가람의 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 건립,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재 봉행,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若)의 창건,
극락암의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파고다 공원 안에 만해선사 기념비의 건립도 추진했다.
또한 18세 때부터 장장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기셨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세사가 그대로 담겨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로 전해져온다.
1982년 미질(微疾)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저서로는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 와 한시문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일기집인 〈삼소굴일지〉,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삼소굴소식〉 등이 있다.
제자로는 벽안법인(碧眼法印), 학월경산(鶴月京山), 활산성수(活山性壽), 원명지종(圓明智宗),
고원명정(古園明正), 원산도명(圓山道明), 우송취원(友松就願), 벽산경석(碧山慶碩), 법산경일(法山鏡日),
동주행산(東洲幸山), 송암혜명(松巖慧明), 원공일진(圓空一眞), 월천월성(月泉月星), 취암능엄(翠巖楞嚴),
서암도명(瑞巖道明), 법준(法俊), 도오(道悟), 활성(活聲), 시명(是名), 취원(翠苑), 지연(智演) 등 31명이 있다.
선남선녀가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부모 밑에 학생시절에는 아무 생각과
걱정이 없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장가가면 좋다고 아버지 흉내 내듯이 장가보내고,
처녀는 어머니 흉내 내듯이 무슨 좋은 일이나 있나 싶어 시집을 간다.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하기를, 어쨌든 이 두 가지에 초월해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들어지게
연극 한 바탕 잘 하고, 늘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살아가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큰 곰이 나타나 잡아먹으려고 덤빈다.
하도 큰 놈이 덤벼 우선 급하여 큰 나무 뒤에 숨으니, 미련한 곰이 나무 뒤로 와서
사람을 잡아야 할 텐데, 나무를 껴안은 채 다리를 들어 사람을 잡으려 하니,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곰 다리를 꽉 움켜잡았다.
곰이 사람을 물려고 하니 나무가 있어 못 물고 어디로 달아나려고 해도 사람이
두 다리를 꽉 잡아서 못가고 꼼짝 못하고 있는데, 사람은 곰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곰 다리의 냄새는 누리하게 나지만 다리를 놓으면 죽을 터이니 그것이 생명선이라
밥도 굶고 아주 죽을 지경인데 곰도 죽을 지경이다.
필사적으로 곰 다리를 거머쥐고 있기를 사흘만에 어떤 나무꾼이 큰 도끼를
지게에 얹어 왔는데 누가 큰 곰 다리를 거머쥐고 있는게 아닌가!
“아이고 여기 있다가는 저 곰한테 죽겠구나”하고 달아나려 하자, 곰 다리를 거머쥔 이가
“그 도끼로 이 곰을 잡세. 이 곰 쓸개는 금보다 비싸다네.
이 곰이 쓸모가 많으니 이 곰을 잡읍시다” 했다.
그리고는 “여보게, 이 다리를 좀 쥐고 있게나. 나는 곰을 많이 잡아봤는데 도끼로 요긴통을
바로 딱 때려야 잡지, 만일 잘못해서 설 때려 놓으면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라며 겁을 주었다.
곰을 많이 잡아 봤다고 하자 나무꾼이 슬며시 곰 다리를 넘겨받아 쥐었다.
곰 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은, 사흘씩이나 굶고 곰에게 시달리다가 곰 다리를
다른 이에게 전장시켜 놓으니 어찌나 좋던지 “휴유”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또 실컷 쉬고는 말을 했다.
“여보게, 내가 말은 그렇지만 실은 곰을 잡아보진 못했다네.
그러니 내가 잘못 섣불리 곰을 치다가는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
누가 오거든 나처럼 자네도 곰 다리를 전장시키고 가게나.” 그렇게 말하고 달아났다.
여러분들이 처녀로 있고 총각으로 있을 때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장가가고 시집가니까, 마치 곰 다리 거머쥔 것과 같다.
이 곰 다리, 집안 살림살이의 곰 다리는, 아들 장성시켜 며느리를 맞아
전장시키고,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말을 왜 하는가 하면 본래 없는 것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마치 곰 다리를
거머쥔 것과 같은 처지라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모든 일에 당기면 늘어지고 놓으면
오그러지는 신축성을 가지고 마음을 쓰게 하는, 폭을 너르게 하고 남에게 관대하고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멋지게 살라고 하는 말이다.
부모 태중에서 나올 때 영감을 업고 나왔나, 마누라를 안고 나왔나, 자식들을 안고 나왔나,
빈 몸 빈손으로 나왔는데 이것에 애착이 붙어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고, 밤 낮 없이 걱정만 한다.
그런 망상 다 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본연의 천진면목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그 망상(妄想) 없는 경지에 가 생각하면 올바른 생각이 든다.
그러니 현실(現實)을 실상(實相)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긴 여겨도, 너무 집착도 하지 말고
물질과 사람에 모든 사람들이 집착하지마는 초연히 생각하고, 초월한 정신으로
사물을 대하면 모든 일을 달관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경(般若經)에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했다.
이 이름뿐이다 이 말이여.
여러분이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 아무개다 하고 이름도 있고 성도 있지마는 어디 본래 이름이 있나,
부모 태중에서는 이름도 성도 없는 것인데 다만 몸에 대명사로 붙여서 부르기 편리하게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진리법(眞理法)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말을 붙여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요,
오늘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
안, 이, 비, 설, 신, 의(眼耳鼻舌身意)라는 것이 별 다른 게 아니라. 사람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을 가리켜서 육근六根이라고 하는긴데,
알고 보면 이 여섯가지 감각이 사람을 망치는 도둑놈들 인기라.
그래서 부처님이 이 여섯가지 도둑놈들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제대로 잘 단속하라고 이르신 게야.
눈은 온갖 것을 다 본다.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보면 자기의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慾心이 생기니,
눈을 눈도둑놈 이라고 한다.
귀耳는 사람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등 온갖 소리를 다 들으려고 한다.
코는 온갖 좋은 향기를 다 맡으려 한다.
혀로는 온갖 것을 다 맛보려 한다.
몸 도둑놈은 좋은 촉감과 좋은 옷을 다 입으려 한다.
생각 도둑은 시시각각 온갖 것을 다 재고 분별 한다.
이 도둑盜賊놈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면 그 사람은 신세身世를 망치게 되는 기라.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몸의 여섯 도둑놈들을 잘 다스려야 하는기라.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예전에 어떤 부인婦人이 옷에 욕심이 많아서 어디 외출을 할 때는 더러운 옷을
입으면서도 옷장 속에는 아주 새옷을 꽉 채워놓고 살았는데, 죽은 뒤에
옷장을 열어보니 옷뿐이 아니라 버선도 한 번도 신지 않은 채 잔뜩 쌓여 있었다.
살았을 적에는 떨어진 옷, 해어진 버선만 신고 아껴 두었던 것을
죽은 뒤에는 누가 그것을 입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인간人間의 탐욕貪慾인 것이야.
그런데, 이것들을 모두 도둑이라고 하지만 잘 교화敎化시키면
눈 도둑은 변해서 일월광명日月光明세존世尊이 되고,
귀 도둑은 성문여래聲聞如來부처님이 되고,
코 도둑은 향적여래香積如來부처님이 되고,
입 도둑은 법희여래法喜如來부처님이 되고,
몸 도둑은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이 되고,
생각 도둑은 부동광 여래不動光如來가 된다.
이 여섯 도둑이 변해서 여섯 부처님이 되는 것이지. 다른게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되면 그 사람이 완벽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쉽고 시원한 법문 덕분에 통도사 극락암에는 늘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남도는 물론, 인근의 부산에 살고 있는 신도와 멀리는 서울에 살고 있는 신도들까지
저 멀고 먼 양산 통도사通度寺극락암까지 찾아간 이유는 바로 그 깊은 산속
암자庵子에 영축산의 대선사 경봉 스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봉鏡峰 스님을 만나 뵙고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나면
이 세상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봉스님은 영축산 약수터에 약수를 마시는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면서
음미토록 글귀를 돌에 새겨 놓았고, 그 명료한 뜻으로 자살自殺을 하려던
많은 중생들이 발길을 돌렸다는 전설傳說 아닌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이 약수는 영축산의 산 정기精氣로 된 약수藥水이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먹어야 모든 병이 낫는다.
물에서 배울 일이 있으니,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은 물이다.
넓고 짙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나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利益을 주어야 한다.
“영축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가 차겁고 낙동강 물이 넓으니 물빛이 푸르도다.”
영축산을 오르던 고해중생들이 이 약수터의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경봉스님이
써놓으신 이 글을 보고서도 참다운 인생 길을 찾지 못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이 영축산 약수터의 ‘물 법문’ 이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마음속에 새겨
뜻있는 인생을 살도록 생각을 바로잡게 해주고 있다.
스님은 참선수행에 평생을 매달렸고 한겨울에 끝없이 밀려오는 졸음을 막으려고
개울의 얼음덩이를 깨어다가 입에 물고 수행정진하시느라 젊었을 때 치아를 거의다 상했다.
스님이 노년이 되셨을 때 스님의 치아가 너무 부실하여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 못하자
제자와 신도들이 돈을 모아 의치를 해드리려고 했더니 스님은 한사코 손을 내저으셨다.
“늙은 중이 갈비 뜯을 일도 없는데 틀니를 해 박아서 머하노.
그 돈 따로 쓸데가 있으니 차라리 나한테 현찰로 다고.”
그리고 스님은 틀니를 해 넣으시라고 신도가 놓고 간 돈을 가난한 신도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집에 갈 때 양식이라도 좀 사가지고 들어가거라.”
경봉 스님은 평소 말씀대로 흐르는 ‘물처럼’ 사시면서 중생을 이롭게 했던 것이다.
통도사(通度寺)에 주석할 당시 경봉 스님은 배춧잎 한 장도 아껴 썼다.
또한 스님은 사중寺中에 물건을 어찌나 아끼는지구두쇠로 알려질 정도였다.
심지어 공양간에 두고 써야 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을
극락암 공양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
고춧가루통, 깨소금 통은 말할 것도 없고 참기름 병까지 조실방祖室房의
벽장에 넣어놓고 그날그날 필요할때 잠시 꺼내주면서 손수 관리를 하고 계셨다.
어느 날, 통도사의 산내 암자庵子에 있던 비구니들이 극락암으로
경봉스님을 찾아뵈었다가 점심공양 때가 되어 공양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공양간에 고춧가루통도, 깨소금통도, 참기름병도 없었다.
한 비구니가 조실스님께 여쭈었다.
“스님요, 고춧가루가 어디 있습니까?”
“고춧가루 예 있다. 너무 많이 치지 마라.”
“스님요, 깨소금통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깨소금도 예 있다. 조금만 쳐라.”
“참기름도 여기 있다. 한 방울만 쳐라.”
“아이구 스님요, 왜 이런 양념까지 조실스님이 방안에다 놓고 쓰십니까?
공양간에 내 놓고 쓰게 하셔야지요.”
“허, 모르는 소리 말거라! 이 귀한 양념들 저놈들한테 맡겨 놨다간 큰 일 난다.
일주일 동안 이 참기름을 써라 하고 맡겼더니 이틀 만에 다 먹어 뿌랬다.
그래가지고 절 살림 어찌 살겠노?”
그래서 경봉스님은 양념 통에 참기름병까지 당신께서 일일이 간수하시며
“적게 써라”, “조금만 넣어라”, “한 방울만 쳐라” 노래를 부르듯 하셨다.
시주물로 들어온 것이니 쌀 한 톨, 고춧가루 하나, 배춧잎 한 장도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는 게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경봉 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사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기라.
한 수좌가 보자니까,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이 매일 밤 자정쯤 되면
아무도 모르게 무엇을 끓여서 혼자만 먹는 거라.
그래, 수좌가 조실스님께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조실스님이 그날 밤 숨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과연 원주스님이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남모르게 무엇을 끓여 먹는 것이었다.
그때 조실스님이 ‘ 이것 봐라, 너 혼자만 먹지 말고 나도 좀 먹어보자’ 했더니,
원주가 별수 없이 먹던 것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그래 그걸 먹어보니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조실스님이 ‘이게 대체 무슨 음식이냐?’ 고 원주에게 물었더니,
원주가 대답하기를 ‘공양주들이 누룽지와 밥풀을 아까운줄 모르고
하수도에 버리니, 그걸 주워다가 끓여먹는 것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원주소임을 맡았으면 그만큼 쌀 한 톨, 밥풀 하나라도 귀하고
소중하고 무섭게 알아야 하는기라.
그래서 선문의 규범에 이르기를 '쌀 한 톨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나의 살점이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이 여기고, 한 방울의 간장이
땅에 떨어지면 나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이 생각하라'고 이른 것이야.
“경봉스님이 머물고 계시던 극락암 대밭 앞에는 절에서 가꾸는 고소밭이 있었다.
‘고소’라는 채소는 스님들이 즐겨 드시는 채소인데 처음 먹으면 냄새가 나서 먹기 힘들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먹다 보면 그 독특한 향기와 맛에 ‘고소’를 다시 찾게 된다.
어느 날 극락암에 ‘청담스님의 딸’로 잘 알려진 묘엄비구니가 도반들과 함께 경봉스님을 찾아 뵈러왔다.
“스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우짠 일로 왔노?”
“스님요, 고소 몇 뿌리 얻어다 심을까 합니다. 몇 뿌리만 캐가게 해 주이소.”
“고소?”
“예..스님.”
“안 된다!.”
경봉스님은 한마디로 잘라버리셨다.
대밭에 저토록 많은 고소가 있는데 단 몇 뿌리만 캐다 심겠다는데
일언지하에 안 된다니, 과연 무서운 구두쇠 노스님이 아니신가?
묘엄이 다시 한 번 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요, 몇 뿌리만 캐다가 심을 테니 허락해 주이소 스님요.”
아직 나이 어린 묘엄이 이렇게 통사정을 하자 경봉노스님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래? 그럼 어디 내가 보는데서 고소를 한번 뽑아 보거라.”
“아이구 감사합니더 스님.”
경봉노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묘엄은 합장하여 감사를 표하고 공양간으로 들어가
식칼을 가지고 나오더니 그 칼로 고소를 캐는게 아니라 대나무 쪽을 쪼개어
끝을 뾰족하게 깎은뒤, 그 대나무꼬챙이를 고소밭에 콕 찔러서 고소뿌리를
하나씩 솎아내고 뽑은 자리는 발로 꼭꼭 밟아주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경봉스님이 드디어 빙긋이 웃으시더니 한 말씀 하셨다.
“니 참말로 잘한다. 그렇게 얌전하게 제대로 캐갈라면 한소쿠리라도 캐가거라.”
“아이구 스님, 우짠 일이십니까?”
“내가 와 안 된다고 했는 줄 아나?
고소 몇 뿌리만 뽑아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호맹이로
지 멋대로 파 뒤비 놓고 밭을 다 망쳐놓고들 안가나.
그래서 안 된다고 한기라.
그런데 니는 참 아가 됐는기라.
너같이 그리 얌전하게 뽑아갈라면 얼마든지 뽑아가거라.
요 다음에도 얼마든지 뜯어다 묵어라.”
“아이고 스님 감사합니다.”
“아이다. 하는 짓이 이쁜데 무엇이 아깝겠노.”
경봉노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는 아까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돼먹지 못한 사람에게는 송곳 꽂을 땅도
허락지 않는 무서운 분이었다.
“너는 30살 되면 환속하겠고, 너는 40이 되면 속환이 되겠고,
또 니는, 5,6년 못가서 중 노릇 그만 두겠다!”
스님은 찾아온 사미니들에게 인정사정 없이 그렇게 단언을 하셨고,
그 예언은 훗날 모두 사실로 입증되었다.
스님은 중생들의 미래까지도 내다보고 계신 셈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법을 하시는 스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안 그래도 경전이나 해설서가 한자투성이라 보통 사람은 읽기 어려워 답답한데
스님들의 설법은 더 어려운 한문으로 구구절절을 끝없이 늘어놓는 경우가 많아
자칫하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통도사 극락암(極樂庵)에 찾아온 신도가 경봉 스님께 여쭈었다.
"큰 스님, 우리 중생들은 자나 깨나 그 놈의 돈 때문에 울고 웃으며
한평생을 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큰 스님께선 이 돈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마 나는 돈을 관세음보살로도 보고, 마구니로도 보고 그렇지.”
“돈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도 되고, 마구니魔軍도 된다구요?”
"그렇지. 병든 사람에게 약을 사 먹이거나 주린 사람에게 양식을 사다 주는
그런 돈은 바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이시지.
그러나 술 마시고 음행하고 호화방탕, 도박을 하는데 펑펑쓰며 날 새는 줄 모르고,
돈에 눈이 멀어 서로 삿대질 하는 그런 돈은 바로 마구니란 말일세."
"아 예.., 그래서 관세음보살님도 되고, 마구니도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한 마디로 말해서 돈을 잘 쓰면 관세음보살님이요, 못 쓰면 마구니인 게야."
스님은 옛날 어느 선비가 지었다는 ‘돈 타령’을 신도들에게 들려주었다.
“돈이란 무엇이던고?
천하를 주유해도 어디든 환영이네.
나라와 집안을 일으키는데 그 힘이 막중하고
갔다가 돌아오고, 왔다가도 또 나가며
산 것을 죽이고, 죽은 것도 살리네
구차히 구하려면 장사 힘으로도 안 되고
잘만 쓰면 무지랭이도 명사가 되네.
부자는 잃을까 겁내고, 가난뱅이는 얻기가 소원이니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백발白髮이 되었던고?“
“아이구마 스님, 참말로 그럴듯하네요.”
"그러니 너그들은 항상 돈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으로 알고
좋은 일에 잘 쓰고 살아야 하는 게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이와 같이 경봉스님의 법문法門은 알아듣기 쉽고 깔밤 같이 재미가 있었다.
귀에 쏙쏙 들어오니 일반 불자들에게 경봉스님의 법문法門은 대인기였다.
경봉스님은 18세부터 85세까지 무려 67년 동안 당신이 겪은
일들을 그날그날 삼소굴일지(三笑窟日誌)에 자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어느 날 스님은 신도들이 자신의 수의를 만드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시고는 그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오늘 내 수의를 짓기 위해 보살들과 비구니들이 왔다.
<수의壽衣: 송장에 입히는 옷>
의복이라도 수의라고 하니 대중들의 마음도 이상하게 섭섭한 감이
든다고 하고, 나도 생이 본래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 모양이니 무상감이 더욱 느껴진다.
금년 병오년에서 무진년을 계산하면 39년인데,
그동안 내가 받은 부고가 무려 640여 명이구나.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한번 가고는 소식이 없구나.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찌찌찌찌.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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