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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행장

수월 음관(水月 音觀)선사

수월 음관(水月 音觀 1855~1928)선사

 

1855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전 씨인데 온전 전()을 사용했는지 밭 전()자 전 씨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실부모한 다음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

스님의 성품은 단순하고 맑았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기 몸처럼 여겨

비록 모기나 빈대 같은 벌레라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머슴살이를 하던 중 하루는 그의 방에 탁발승이 잠을 청했는데,

탁발승이 밤새 들려준 스님들의 수행이야기에 출가를 결심했는데 주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인이 가죽신을 던져주며 "신발이 다 떨어지면 떠나라"고 해

2년의 세월을 더 보내고 가죽신이 떨어지던 날, 스님은 수행자의 길을 떠났다.

스님이 동진출가했다는 설도 있으나 발심하여 불문에 귀의할 생각을 한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인 것 같다.

 

그리고 출가 본사로 천장암을 택한 것은 단지 그 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사로 출가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글 가르침을 포기하고, 땔나무 해오는 부목 공양주 소임을 3년을 했다.

당시 천장암의 주지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스님이었다.

따라서 스님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깎아 준 은사는 태허스님 이다.

 

나중에 경허선사께서 이곳에 보임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월스님이

경허선사의 법통을 잇게 되는 인연의 고리로 작용한 것이었다.

또 수월스님의 뒤를 이어 혜월스님이 찾아와서 밭일을 하며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월, 혜월과 더불어 경허선사의 세 달로 꼽히는 만공스님은 14세 소년의 몸으로,

세 달 중 가장 늦게 천장암 식구가 되었다.

 

이 무렵 수월스님은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천수경을 외웠다.

천수경의 원이름은『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이라는 긴 이름인데,

뜻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와 공덕은 광대무변하시고

원만 구족하여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한 큰 힘으로 일체 중생의 고뇌를 건져주시는 다라니라는 것이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수월스님이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스님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스님이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스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태허스님이 급히 수월스님을 밀치내자 그 직후 방아공이는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수월스님의 순전한 수행력을 목격한 태허스님은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리는 수계식을 거행한 다음 경허선사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스님은 스승인 경허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종일 일하면서 죽기 살기로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자고 일어나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고 빨래를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틈이 생기면 짚신을 삼아 남의 발에 신겨 주며 기꺼이 낮게 낮게 몸을 낮추었다.

 

그러면서도 나무를 하던, 빨래를 하던, 짚신을 삼든 스님의 입에서는 천수경을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일구월심, 오매불망하여 외고 다니는 천수경은 스님에게 있어서 바로 화두요 공안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함께 동문수학을 했던 만공선사는 나중에 “수월 형님은 절에 손님이 오면 항상

발 감싸게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 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걸어주었다.

그런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한 적이 있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스님은 골방으로 들어가 먹는 것,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천수경을 외우는 정진을 감행하였다.

이레째 되는 밤,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한다.

항상 천수경을 외움으로써 천수관음으로부터 손 하나와 지혜의 눈 하나를 얻는 불은을 입은 것이다.

이때 경허선사가 제자인 음관스님이 자나 깨나 큰 소리로 천수경을 외더니 마침내 깨우쳐

부처를 이룬 것으로 여겨 매우 기뻐한 다음 천수경에 나오는 수월관음의 이름을 따 수월이란 법호를 내려준다.

 

이후 보임을 위해 천장암을 떠난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신분을 숨긴채 여전히 땔나무를 해 나르며

한 철을 지냈으며, 1891년 무렵에는 경허스님, 제산스님 등과 호서지방을 돌면서 함께 수행했다.

1892년경 금강산 마하연사를 찾은 수월스님은 얼굴을 알고 있던 스님들에 의해 선방의 조실(祖室)로 모셔졌지만,

여전히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앉아서 온밤을 밝히고

스스로의 정진에 몰두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내렸을 뿐이었다.

 

1896년 스님은 지리산 감로동천에 있는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과 우번대(?)에서 지냈다.

이곳에서도 삼매에 든 수월스님의 몸에서 다시 빛줄기가 터져 나왔는데,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천은사에 살던 대중들뿐만 아니라 아랫마을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수월스님의 신분이 밝혀졌고 천은사 대중들은 스님을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얼마 후 다시 방광이 일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스님은 이적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세태를 염려하여 지리산을 떠났다.

 

이후 10여년 동안 수월스님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스님이 충남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 장곡사(長谷寺)에서 만공선사와 더불어

1년 정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는 소문이 있을 따름이다.

1907년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반년을 지내다가, 묘향산 중비로암에 들어가 3년동안 머물렀다.

이 무렵 스승인 경허선사가 행각 중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식을 들은 스님은

1910년경 강계군에 있는 자북사(子北寺)에 머물며 스승 경허선사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 다녔다.

 

마침내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춘 채 훈장 노릇을 하던

스승 경허선사를 찾게 되는데, 그러나 경허선사는 방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닫은 다음 말했다.

“나는 스님이 찾는 사람이 아니오”

매정하게 말하며 끝내 만나주지 않는 스승에게, 스님은 짚신 몇 켤레를 정성껏 삼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스승의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스님은 스승 경허선사가 열반에 들 때까지 2년 동안 갑산에서 가까운 회령군 팔을면 백천사,

경원군 만월산 월명사,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 등지에서 정진하면서 지냈다.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도 스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무하고 물긷는 일만 했으며,

가끔씩 두만강 강가에 앉아 며칠동안 대비주 삼매에 들곤 했다.

1912년 경허선사가 열반에 든 소식을 당시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정진하던

만공선사에게 알려준 뒤 스님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間島)로 들어갔다.

이후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회막동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해서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고는 하였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며 보살행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었다.

1915년 스님은 회막동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가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 채 한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을 했다.

 

1921년 봄 스님은 왕청현 나자구(羅在溝)에 들어가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스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늘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과 날짐승과 어울려 놀거나

때때로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님은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

 

그렇게 수월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스님을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때 금오스님, 효봉스님, 청담스님이 수월스님을 찾아와 한철을 지내면서 스님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스님에게만은

꼬리를 한없이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이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증언이다.

 

1928년 하안거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7 16일 스님은 절 뒤편 송림산에 올라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잘 접어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세상을 떠났다.

세수 74, 법랍 45세였다.

수월스님이 원적에 든 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5일후 다비식을 거행하고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수북이 쌓인 하얀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한다.

경허선사의 맏상좌였던 수월스님은 '꽉 찬달'로 통하는데 이렇다 할 오도송도 없고

열반송도 없으며 설법도 남아 있지 않다.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고, 글과는 담을 쌓고 살다간 까막눈 선사였다.

 

그러나 스님은 일상의 노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어난 수행력과 함께 때때로 방광불사(放光佛事)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불교사의 전설적인 대선지식이다.

또한 스님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 땅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던 자비의 관세음보살이며,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간 숨은 성자였다.

 

수월 선사의 법문을 오직 하나만 남아 있다.

몸을 다친 독립군 연설단원이 화엄사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이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천 따지를 하던지, 하나 둘을 세던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겨"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것이여.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사람 몸받아 참나를 알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있어.

이보다 더 큰 한이 어디있어.  

라고 말했다.

이 법문을 기억한 그 독립군 단원은 몽골에서 스님이 되었다.

 

수월스님은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기에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저

단절돼 있어 ‘잊혀진 전설’로 사라져 갔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만공선사를 시봉했던 원담스님(수덕사 방장 2008 3월 열반)

원담의 상좌인 정혜사 수좌 설정스님 등이 간도에서 수월스님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스님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스님에 대한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펴낸

김진태 청주지검장 등을 통해 수월스님의 면모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수덕사 위쪽에 있는 작은 암자인 금선대에는 경허, 수월, 혜월, 만공선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수월스님의 손상좌뻘인 명선스님(여수 흥국사 회주, 조계종 원로의원)

“수월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스님을 쫓아 북쪽으로 와

(1912년부터) 이곳 먼발치서 지켜보던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옛 고구려땅인

흑룡강성 나자구 왕청현 송림산에 들어가 3년을 보내다 1928년 열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광산과 송림산에서 수월스님을 직접 뵈었던

노인들이 있어서 많은 증언을 채록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가운데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 성을 가진 노인의 증언이다.

 

"수월스님은 매일 아침 공양 뒤에 산에서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래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가셨답니다.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은 곳이지요.

수월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시어 아사를 면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또 수월스님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00리 산길을 단숨에 다녀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는 거에요.

그리고 수월스님이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았기 때문에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는 말도 들었어요."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스님은 소년의 부모에게 찾아와 “이대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내 곁에 두라”고

말해 단칸 흑집에서 일주일을 머무르게 되었는데, 수월선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방씨 노인은

“그때 보니 수월 도인 스님은 일절 눕지 않았고, 아예 잠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운데도 나가지 못하게 하던 수월스님이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고 말해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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