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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금강경 강해-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32 (1)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32 (1)-

 

 

색신(色身)의 형상으로 감응하여 중생을 교환하는 응신(應身),

화신(化身)은 참다운 여래의 법신(法身)이 아닙니다.
상을 떠나야 제대로 참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불법에 마음을 내신 분들은 언제나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십시오.
또 남을 위해 끊임없이 해설해 주십시오.

 

경 전체가 힘들면 사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 설해 주십시오.
그 복덕은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어떠한 말로도 나타낼 수가 없고

어떠한 큰 보시보다도 천 배 만 배 더 수승합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해 해설해 주는 진실한 공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남자다 여자다, 승이고 속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성인이고 범부다 하는 갖가지 능소(能所)를 떠나 보내면 본래 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차별상 너머에 있는 평등하고 동일한 참모습으로 여여부동(如如部動)하는 것이야말로

반야(般若)의 삶이고, 보살(菩薩)의 길이며, 여래(如來)의 진리인 것 입니다.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수보리    약유인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    지용보시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가 持於此經하야 乃至四句偈

약유선남자선여인    발보살심자    지어차경       내지사구게등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수지독송       위인연설       기복    승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항량 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할지라도 만약 또 어떤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보살심을 발한 자가 이 경전을 가지되 내지 사구게 등이라도

수지하고 독송하여 남을 위해 연설하면 그 복덕이 저보다 스승하리라."

 

이 마지막 삼십이분은 『금강경』결론에 해당되는데

금강경을 널리 알렸으면 해서 유통분(流通分))이라 합니다.

직접 "금강경을 널리 유통시켜라."하는 표현은 없지만 이 세상의 가장 값진 재물로 하는

보시보다도 금강경의 공덕이 아니 사구게만의 공덕이라도 훨씬 더 수승하다고 하면

이 금강경이 널리 유통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로 성불되어 있는 존재이고, 우리 내부에는

온갖 만행 만덕을 이미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등불로 우리의 자성을 밝혀 무궁무진한 우리의 보물을

캐내어 쓰기만 하면 된다는 반야 사상을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야겠기에

이처럼 강력한 비유를 들어 금강경 칭송을 거듭해서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금강경의 가피에 관한 영험담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집안에 재난이 닥치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 또는 기도 성취를 위해 지극 정성으로

『금강경』을 독송하여 모든 재난을 물리치고 밝은 인생길을 보장받는

영험담을 모아 놓으면 금강경의 수만 배가 될 것입니다.

 

또 금강경을 인쇄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배포하거나 사구게만이라도 표구를 하여

모셔두고 그곳에서 가족들이 모여 예배를 하는 것도 좋은 불자 가정이라 하겠습니다.

금강경이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고 부처님의 존중할 만한

제자가 계신 곳이며 불탑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바로

이 금강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

운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

 

역여전 응작여시관

亦如電 應作如是觀

 

"어떻게 남을 위해 연설하는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히 동하지 않느니라."

 

금강경 전체나 아니면 사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 연설할 때의

우리들 자세가 어떠해야겠습니까.

지금까지 일관되게 일러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무상(無相)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금강경을 일러줄 때의 자세는 바로 상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모양을 갖추어서 낱낱이 차별을 나타내고 분별되는

만상 너머에 있는 본질에 들어가 보면 텅 비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없지도 않습니다.

무실무허입니다.

항상 그대로 변치 않고 고요히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수자도 함께 없습니다.

 

나아가 법이다 법 아니다 하는 마음도 없이 일체가 원만합니다.

부처다『금강경』이다 깨달음이다 설법이다 중생을 교화한다 하는

그 어떤 상도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움직이지 않고 여여히 그대로 있는 본 마음자리의 차원에서

남을 위해 설해 주어야만 합니다.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이니라

응작여시관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이것은 제4 사구게로서 금강경 전체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여기 나오는 몽(), (), (), (), (), ()

금강경의 육유(六喩)라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그려지고 마음에 잡히는 모든 함이

있는 법은 일체가 다 꿈과 같고 환상이며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이며

이슬과 같으며 갯불과 같습니다.

 

잠시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지 어느 순간만 지나고 나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꿈에 취했다가 눈을 떠 보십시오.방금 전에 온통 그것만이

나의 세상인줄 알았던 것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환상 또한 아무런 밑바탕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려낸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거품 또한 어느 한 순간 생겼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가고 맙니다.

실체의 흐트러진 뒷모습이 그림자입니다.

단단한 형태를 가진 실체도 애태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루 이십사 시간 중 새벽에 잠깐 맺혔다가 이냐 허공으로 숨어버릴 이슬에

마음 둘 까닭이 없으며 또한 한순간 번쩍하고 지나가는 번갯불을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일순간이고 허망무상하다는 가운데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반야(般若)의 등불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반야라는 지혜의 등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등불을 환히 켜서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 밝히자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여 이 세상 만사는 다 헛것이다 하여 자포자기하며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하루 이십사 시간을 이백사십 시간만큼 열심히 하되 거기에 머물러 흡족하지 말고

상 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자는 것이 불교를 바로 임하는 것입니다.

원력(願力)을 갖고 세상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자는 것입니다.

 

원력에 넘치는 삶을 살아가려면 일단은 『금강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그 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다음 무상(無相)으로 종()을 삼고 무주(無住)로써 체()를 삼는 도리가

몸에 베게 되면 정말 자기 자신에게 별 집착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바깥 세계에 대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열심히 봉사할 힘이 나옵니다.

 

그 때 활기찬 원력을 갖고 남을 위해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펼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인생관을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고

참으로 금강경을 바르게 공부한 보람입니다.

이 길이 바로 우리 반야 행자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