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3-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는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 라고 합니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자세하게는 ‘바라’가 ‘저 언덕[피안], ‘밀다,가 ‘건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풀이하면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이를 앞의 ‘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저 언덕’이란, 피안(彼岸)으로 정토(淨土), 불국토(佛國土),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언덕’이라 함은 차안(此岸)으로 우리가 사는 이곳 사바세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예토[穢土-더러운 땅]라고도 부릅니다.
조금 다른 의미로 살펴본다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내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곳, 저 곳 하여 나누어 놓은 듯 하지만 실은 이 언덕은 어리석어 무명에 휩싸인
‘거짓 나’이고, 저 언덕은 깨달아 밝아진 ‘참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라밀다의 뜻은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거짓 나의 삶에서 참나를 깨쳐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나’의 삶에서 ‘나 없음’의 삶을 깨쳐가는 것 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예토’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것이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는 탁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육신[身]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청정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입[口]으로는 온갖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고,
삿된 분별심에 빠져 진실치 못하여 꾸미는 말을 하며,
거친 욕설 등을 일삼고 살아 갑니다.
또, 생각[意]으로는 탐욕에 빠져 오욕락을 즐기기 위하여 과다한 욕심을 부리고,
조그만 일에도 불끈 화를 내며, 어리석은 삿된 사량심으로 온갖 악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된 이 땅을 ‘사바세계’ 즉 예토라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이 언덕[차안(此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피안(彼岸)], 즉, 정토(淨土)란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정토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理想) 세계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세계, 열반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부처님께 우리의 힘들고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여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라밀다! 즉, 이 사바 예토에서 저 세상, 즉, 부처님의 세상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마하반야의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큰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배를 불가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사십구재를 지낼 때, 오색 띠가 달린 작은 배를 들고 봉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배가 바로 반야용선, 즉, 큰 지혜로 부처님의 세계인 영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 것입니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부처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주시므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인로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수많은 무명중생을 모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큰 탈 것’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소승[작은 탈 것]의 배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없고,
오직 나 홀로 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 십법계(十法界)라 합니다.
십법계는, 우리들이 사는 인간계를 포함해 윤회하는 세계인 차안예토
[차안-생사윤회의 경지]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6]와,
피안정토[피안-해탈열반의 경지]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1]가 있으며,
차안인 이 언덕에서 피안인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수행 과정에 있는 세계, 즉,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계[3]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문, 연각, 보살에 승(乘)을 붙인 이유는, 반야용선을 타고[乘] 간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승은 소승의 수행방법이며,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함께 배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대승의 수행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이르는 방법, 파라미타/바라밀다의 방법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다의 방법은 성문이나 연각이기 보다
도반과 함께, 만 중생들과 함께 가는 보살승입니다.
이상에서처럼, 육도 윤회의 중생세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이르는 방법에는,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성문, 연각, 보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방법도 또한 각각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듯,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저 언덕으로 도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방법상에도 갖가지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승의 수행, 소승의 수행 하며 그런 분별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 모든 수행은 똑 같은 ‘하나’입니다.
내 공부가 되지 않고서는 남과 함께 갈 수 없으니 소승이 될 때는 철저한 소승이 되어야 하고,
당장에 나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상대가 있을 때라면 조금 더디 가더라도
함께 나란히 걸어 볼 수 있는 대승의 보살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이렇듯 달라 보이지만 전체를 위한 이타의 마음이 바로 내 수행의 시작이며,
내 수행이 곧 전체의 수행이 되어 법계를 밝혀 준다는 의미에서
대승이 곧 소승이며 소승이 곧 대승인 법이겠지요.
대승 소승 막론하고 바라밀다 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참으로 많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 수행의 방법에는 참선(參禪) [간화선, 묵조선 등],
염불(念佛)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간경(看經)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아함경 등],
주력(呪力) [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 수능엄신주, 신묘장구대다라니 등],
불사(佛事) [경전불사, 은전불사, 비전불사 등],
절 [108배, 삼천 배 등], 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산신기도, 용왕기도 등],
지관(止觀)법 [사마타, 위빠사나 등], 방하착(放下着) 등
숫자로 헤아리기도 힘들만큼의 많은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선택하여 꾸준히 정진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염불이 좋다고 하면 염불하다가, 참선이 좋다고 하면 참선하다가,
이런 식으로 갈팡질팡 하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산을 오르는데 이 길로 가다가 중간쯤 가서 힘들다고 다시 내려와
다른 길을 택한다면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은 당연합니다.
한가지 길을 택했으면 힘들어도 쉼 없이 꾸준히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중 어느 것도 능히 우리를 저 언덕,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밀다의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생활 수행자 우리 모두의 공부 목적은 ‘바라밀다’가 되어야겠습니다.
바라밀다를 향한 보리심의 횃불을 밝혀 들고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바라밀다 공부를 시작합시다.
그 공부가 바로 반야심경의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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