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통 기화(得通 己和1376~1433)선사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수호한 고승.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처음 법명은 수이(守夷)이며, 처음 법호는 무준(無準)이다.
성은 유(劉)씨 이며 충주출신이다.
아버지는 전객사사(典客寺事) 청(聽)이고, 어머니는 방씨다.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의 뜻을 굳혔다.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 들어가서 삭발하였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로 자초(自超)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들은 뒤 여러 산을 두루 편력하였다.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정좌(靜座)하고 수행을 시작하여 크게 깨우쳤다.
그 뒤 1406년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 가서 4년 동안 <반야경>을 세 차례 설했고,
1410년에는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을 크게 진작하였다.
1411년부터 절을 중수하는 한편, 모여드는 승속(僧俗)들을
조사(祖師)의 선풍(禪風)에 입각하여 지도하였다.
1414년 3월에는 평산(平山)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에 작은 방을 얻어
함허당(涵虛堂)이라 명명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세 차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들어가서 오대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자사한 뒤,
그 암자에서 잘 때 꿈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으로 지어 주어 이후 그것을 사용하였다.
1431년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로 가서 퇴락한 절을 크게 중수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문인으로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然)· 윤오(允悟) 등이 있다.
그는 자초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임에는 틀림없으나 스승과는 달리
교(敎)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사상 또한 교학적(敎學的)인 경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의 선(禪)사상에는 현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배불을 주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입장은 <현정론(顯正論)>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불교와 유교의 회통(會通)뿐 아니라 도교까지 포함한 삼교일치를 제창하였다.
이 삼교일치 사상은 신라말 최치원(崔致遠)의 사상에서도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것은 그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
그의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유교측의 강력한 배불론에 대한 호불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그는 종단폐합과 사사혁거(寺社革去) 및 사전노비(寺田奴婢) 몰수 등으로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한 고승이었다.
1433년 4월에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들어보니 시방(十方)이 벽락(碧落) 하나
없는 데도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원각경소(圓覺經疏)>3권, <금강경오가해설의>2권 1책, <윤관(綸貫)>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1권이 전하여진다.
그밖에도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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