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의순(艸衣 意洵 1786~1866)선사
침체된 조선 불교의 선풍을 크게 진작 시킨 대선사로서,
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던 한국의 다도(茶道)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서,
그리고 조선의 시풍(時風)을 투명하게 전수한 시인(詩人)으로서, 한국문화에 큰 발자국을 남긴 고승이다.
자는 중부(中孚), 법명(法名)은 의순(意栒), 초의(艸衣)는 염화지호(拈花之號)다.
세속의 성은 장(張)씨이며, 정조 10년 (서기 1786년) 4월 5일 전남 나주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속가에서의 이름은 알 길이 없고 의순(意洵)은 운흥사로 출가해서 은사인 벽봉민성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며,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초의(艸衣)라는 호는 대흥사에 가서 당대의 고승인
완호(玩虎 倫佑 : 1758-1826)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또 다른 호(號)로는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해상야질인(海上也질人), 일지암(一枝庵),
우사(芋社), 자우(紫芋),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艸師)와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는 스스로 자호(自號)하거나 그와 친교를 나누던 다산(茶山 丁若鏞 : 1762-1836)이나
추사(秋史 金正喜 : 1786-1856)가 붙여준 호이다.
다섯 살(1790)이 되는 해에 물가에 나가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사람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인근에 사는 스님이라고 한다.
왕산리의 서쪽은 망망대해가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서해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는 영산강의 바다 물이
마을입구까지 들어오는 개울이 있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뒤편에는 승달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는 법천사와 목우암, 그리고 총지사가 있다.
이 무렵 법천사에는 연담유일(蓮潭有一 : 1720-1799)이 주석하고 있었다.
연담은 당대 고승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남인의 거두인 번암 채제공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훗날 다산이 찾아가 인연을 맺은 스님이다.
그래서 승달산 법천사에는 인근에서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이때 선사의 집안도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선사는 열다섯살(1800)이 되던 해에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운흥사(雲興寺)로 찾아가
벽봉민성(碧蜂敏性)스님께 의지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
선사는 운흥사에서 4년 동안을 기거하면서 불경(佛經)을 열심히 익히고 수행을 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선사는 이곳에서 나는 차를 만들어 차생활에도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선사의 차생활은 이곳 운흥사에서 부터 시작된다.
운흥사와 불회사가 있는 다도면 일대는 고려때부터 이름난 차 산지로서 국가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다소(茶所)마을과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茶村)마을이 있는 곳이다.
당시 운흥사는 대흥사의 말사 가운데서 수말사로서 나주목사가 있는 중요한 지역의 사찰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흥사의 고승들이 많이 주석을 하였고 또 왕래가 잣자던 곳이다.
선사가 운흥사로 출가를 한 것은 선조들이 살던 고향이기도 하고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흥사에서의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4년만에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대흥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운흥사를 떠나
무안의 고향집에 잠시 들렸다가 영산강 나루를 건너 영암(靈岩) 도갑사(道岬寺)로 갔다.
열아홉(1804년)이 되는 해의 일이다.
선사는 도갑사에 들렸다가 월출산(月出山)에 혼자 올라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던 중에 해가 저물어 바다에서 문득 떠오르는 한덩이 둥그런 달을 보자 크게 깨닫고 가슴에 맺힌
답답함이 한꺼번에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그 후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가서 완호(玩虎)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때 초의(艸衣)라는 법호(法號)를 받은 것이다.
완호는 연담(蓮譚)의 법손(法孫)으로 조계문인(曹溪門人)이다.
그 법맥을 보면 서산청허(西山淸虛)에게서 편양언기(鞭羊彦幾)가 나왔고,
편양에게서 풍담의심(楓潭義諶)이 나왔고, 풍담에게서 월담설재(月潭雪齋)가,
월담에게서 환성지안(喚惺志安)이, 환성에게서 호암체정(虎岩體淨)이,
호암에게서 연담유일(蓮潭有一)이, 연담에게서 백련도연(白蓮禱演)이,
백련에게서 완호윤우(玩虎倫佑)가, 완호에게서 초의의순(艸衣意洵)이 나온 것이다.
이때부터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워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고
틈틈이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梵語:카로슬타문자)의 뜻을 통달하여 천수경을 범자로 써서
천수범서(千手梵書)와 주문(呪文)의 족자를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정화(幀畵)를 잘 그려서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사께서 남기신 신상(神像)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현재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影幀神像)은 거의 대부분이 스님께서 손수 금어(金魚)가 되어 그렸거나
증사(證師)가 되었던 작품이다.
유독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준제보살상(準提菩薩像)을 좋아하여 그리셨다.
지금도 대흥사 유물관에는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四十二手十一面觀世音菩薩像)과
준제보살상(準提菩薩像)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단청(丹靑)도 잘 해서 조사(祖師)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大侊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禪)의 여가(餘暇)에 익힌 글씨는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쓰셨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일생동안 지음(知音)이 되었으나 추사서법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별개의 글씨를 썼다.
또한 제방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뜨거운 구도열로 가르침을 받아 급기야는
금담(金潭)조사의 선법(禪法)을 전수 받았다.
훗날 선의 논쟁에서 진면목을 보인 것도 다 이와 같은 수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선사의 관심은 선과 교의 내전에만 치우치질 않고 유학과 시학, 도가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외전에도 깊이 몰두하여 내외전에 통달하기에 이른다.
24세(1809년)에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와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과
만나 깊이 사귀면서, 다산에게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워 유학에도 정통하였고,
시학도 선경(禪境)에 들어 운유(雲遊)의 멋이 있었다.
이때 다산에게 드리는 시가 한 편 있는데…
富送人以財 (부송인이재) 부자는 사람을 작별할 때 재물로 하고
仁送人以言 (인송인이언) 어진 이는 사람을 말로써 전별을 하네
今將辭夫子 (금장사부자) 이제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可無攸贈前 (가무유증전) 저는 마땅히 드릴 게 없습니다
- 중 략 –
閭巷滿章甫 (여항만장보) 마을마다 선비는 가득하지만
千里無一賢 (천리무일현) 천리에 현인(賢人)은 한 명도 없네
州里旣 (주리기) 이미 마을마다 욕심이 차 있으니
蠻貊理固然 (만맥리고연) 문명이 부족한 나라에 당연한 이치라네
我生當此時 (아생당차시) 내가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質亦非堪硏 (질역비감연) 자질이 이러하니 감당 못하네
所以行己道 (소이행기도) 그래서 나의 도리를 행하려 해도
將向問無緣 (장향문무연) 누구에게 물어볼 인연이 없네
歷訪芝蘭室 (력방지란실) 현인과 군자의 방 찾아다녀 보아도
竟是鮑魚廛 (경시포어전) 모두 비린내 나는 생선 가게였소
南遊窮百城 (남유궁백성) 남쪽으로 온갖 성을 다 돌아다니느라고
九違靑山春 (구위청산춘)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헛되이 보냈소
선사께서 탁옹(茶山)에게 보낸 시에서 다산을 만난 것을 매우 소중한 만남으로 여겼다.
아홉해 동안이나 청산의 봄을 맞으며 온갖 성(城)을 다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았지만
진실로 선비다운 현인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비린내 나는 생선가게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가운데 다산이야말로 선비중의 선비요 현인 가운데 빼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다산의 고매한 인품에 반해 흠모의 정과 그리움을 작별하면서 아쉬워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처럼 일찍 다산을 만난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었다.
이런 초의선사를 다산은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자상한 어조로 증언(贈言)을 써서 주게 된다.
“시(詩)라고 하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뜻이 저속(低俗)하면 억지로 청고(淸高)한말을 하여도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본디 뜻이 편협(偏狹)하고 비루(鄙陋)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하여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려내려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되게 하면 된다.
그러면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노력하였던가?
도연명은 정신과 형체가 서로 부리는 이치를 알았으니 더 말할 게 있겠는가?
두보는 천품(天稟)이 본디 높아서 충후(忠厚)하고 측달(惻달)한 인(仁)에 다가
호매(豪邁)하고 경한(勁悍)한 기(氣)를 겸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마음을 닦아도 본원이 맑고 투명한 것이 두 보의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 아래 급에 있는 여러 시인도 모두 당할 수 없는 기상과 모방 할 수 없는 재사(才思)가 있다.
이는 타고 난 것이요 배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무렵 선사는 시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몇 편의 시를 지어서 시의 재미를 한껏 느끼고 있던 때이다.
그래서 다산에게 시학에 대해서 간절하게 묻게 되고 이런 선사의 마을을 헤아린 다산은
작별하는 초의선사에게 증언을 써서 주게 된 것이다.
다산을 시작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게 되는데 추사 김정희, 산천 김명희,
해거 홍현주, 연천 홍석주,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이제 권돈인, 자하 신위, 위당 신헌,
금령 박영보 등이다.
그 뒤 다산과 초의선사는 각별한 관계로 발전하여 일생동안 교분을 두텁게 하였지만,
다산은 이미 선사를 만나기 이전에 대흥사의 스님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다산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 땅을 지날 때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연담유일을 찾아갔었다.
연담은 번암 채제공과 절친한 사이였다.
번암은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로 남인의 거두요 다산이 평소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며
정신적 스승이 되어온 사람이다.
번암은 평소에 다산에게 연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젊고 총명하고 호기심 많은 다산에게 있어서 불교는 서학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내심 못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이 평생 동안 불교에 대해서 거리감을 완전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산으로 연담을 찾아간 것이다.
연담은 선과 교에 두루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과 주역, 실학과 서학에 이르기까지
능통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연담을 찾아가 하루 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 평생 동안 흠모하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스님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다산은 처음으로 시를 지어 연담에게 드렸다.
이후 다산은 신유사옥(辛酉邪獄:1801년)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되고 유배생활 18년 동안
대흥사 스님들과 교유를 하게 되는데, 맨 먼저 만난 사람이 아암혜장(兒菴惠藏 1782-1811)이다.
다산이 강진에 와서 동촌 주막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이때 받은 고초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을 마음속으로 찾던 중 백련사에 와서
머물고 있는 혜장을 알게 된다.
다산은 백련사로 혜장을 찾아가 함께 한나절을 보내고 이날 곧장 대흥사 북암에 가서 혜장과 함께 묵는다,
다산이 대흥사에 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다산과 혜장은 밤늦도록 주역에 대해서 담론을 벌리고 나자 둘 이는 금새 지기가 되어 혜장이 입적을
할 때까지 7년 동안 서로 그리워하며 살았다.
다산은 혜장으로부터 차를 얻어 마시며 다도를 익혔고 대신 주역과 유학을 가리켜 주었다.
다산은 혜장의 배려로 냄새나는 주막집 뒷방에서 강진읍 뒷산의 고성사에 방 하나를 얻어 옮겨 살면서
당호를 보은산방(報恩山房)이라고 지어 혜장에게 보은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다산은 감사하는 마음을 많은 시를 지어 혜장에게 주었으며 후에는 탑명과 비문을 지어
혜장이 요절한 것을 슬퍼하였다.
유배지에서 만나 그 누구보다도 자기의 처지를 이해하고 편안하게 대해주던 아암혜장을 잃고 난후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차에 초의선사와 급속도로 가깝게 된 것이다.
둘이서 이듬해(1812년) 가을 9월 12일에 다산과 그의 제자 윤동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 놀면서 백운동 외경을 그렸다.
백운동에는 십이승경이 있는데, 옥판봉(玉版峰), 산다경(山茶徑), 정유강(貞유岡), 모란체(牧丹체),
취미선방(翠微禪房), 백매오(白梅嗚), 창하벽(蒼霞壁), 유상곡수(流觴曲水), 홍옥폭(紅玉瀑), 풍선(風선),
정선대(停仙臺), 운당원(운당園)이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백운도(白雲圖)이다.
그 다음장에 십이승경(十二勝景) 마다 다산과 초의선사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 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를 붙이고, 다시 윤동이 발문을 지어 한 폭의 시축도(詩軸圖)를 만들었다.
이것은 다산과 초의선사가 처음으로 합작을 해서 만들은 시축도이며 몇 일 밤을 같이 보내며
방외청교(方外청交)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다산은 무척 속내를 드러내기를 꺼려했는데 그렇지만 초의선사에게만은 예외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말 한마디 잘못하여 일가가 몰살을 당하는 참변이 비일비재했다.
다산 자신도 그 피해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평생 동안 속내를 내 보이지 않고 살았다.
그 후 유배지를 찾아온 다산의 두 아들인 유산 정학연과 운포 정학유와 친교를 맺게 된다.
유산은 상경한 후에 초의선사를 서울의 선비들에게 소개를 하게 되었고 초의선사는
이를 계기로 유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게 된 것이다.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는데, 가는 도중 전주(全州)에 들러 명필 이삼만(李三晩) 등과 사귀어
한벽당(寒碧堂)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즐겼으며 서울에 올라가 두릉(杜陵)에 사는 다산선생의 아들
유산(酉山:丁學淵), 운포(耘浦:정학유)와 자하(紫霞:申緯), 해거(海居:洪顯周)등과 만나서 같이 두 해 동안을 놀았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금미 김상희(金相喜)와도 사귀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먼 곳을 여행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조선사회의 불합리성과 불교계의 암담한 현실을
몸으로 부딪쳐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쳤으리라.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는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시기와 질투로 무너져 내리는
사찰과 승려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는 아픔으로 눈물을 짖는다.
虛曠金寶坊 (허광김보방) 드넓은 절간은 텅텅 비어있고
縱橫野狐禪 (종횡야호선) 사이비 수행자만 종횡무진하니
如聆龍象泣 (여령용상읍) 큰 스님의 울음소리 들리는 듯하여
臨風涕潺湲 (림풍체잔원) 바람결에 눈물만 줄줄 흘리네
불교가 배척받아 온지가 5백년이나 되었으니 그 정도가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사찰은 무너지고 주초돌만 딩굴거나 그나마 남은 사찰에는 자포자기로
사는 사람이나 사이비 수행자가 종횡무진 판을 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무척이나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초의선사는 철저한 수행만이 불교를 살리는 길이며 나아가 올바로 수행한 사람만이
정법을 수호할 수 있다고 하며 파사현정의 칼을 빼어든다.
이것이 훗날 백파선사와 선의 논쟁을 벌리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수행자들에게 선과 교가 둘이 아니며 교로 들어가서 선으로 나오는 것이
공부에 크게 이로울 것이라고 가르친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송두리째 병들어 있었다.
도적떼가 들끓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난무하고 조정은 조정대로 당파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일부 지식인들이 청조의 새로운 학문에 심취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학이나
실학사상이 조선을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으로 모색되어 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학문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젊은 유학자들이나 통역관으로 다니던
중인계급의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유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초정 박제가와 열하 박지원, 성호 이익, 청장관 이덕무 등이다.
그 뒤를 이어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추사 김정희의 실사구시학이 새롭게 정립된다.
초의선사는 이러한 사상과 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자 이것이야말로 조선 사회와
불교계를 개혁할 수 있는 학문으로 믿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과의 교류는 더욱 긴밀해져 2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유학자나 선승들이 즐기던 시회는 교류의 수단을 뛰어넘어 고차원적 언어의 교감과
은밀한 뜻의 교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시회가 자주 열렸다.
초의선사는 서울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선비들과 만나 매일 시회를 통해서
서로의 의지와 속내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뜻이 통하는 선비들끼리 어울리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몇몇 선승이 자리를 함께 하는 정도였다.
이런 자리에 초의선사는 주빈이 되었고 항상 시회를 주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시회가 2년 동안에 무려 14차례나 벌어진다.
매번 모일 때 마다 시회는 일상적으로 치러지는 것이었다.
이때 자주 모이던 자리가 청량리에 있는 해거도인의 송풍헌과 남한강변에 있는 유산의 만향각과
학산 이영로의 옥경산방과 추사의 부용정이었다.
一生參學了今年 (일생참학료금년) 일생동안 하는 공부 금년에야 마쳤으니
未妨北窓淸晝眠 (미방북창청주면) 북창에 편히 누워 낮잠한숨 잔들 어떠리
白屛山尖孤照水 (백병산첨고조수) 백병산 높고 높아 홀로 물에 비치고
黃驍江色澹連天 (황효강색담련천) 황효강 빛 맑고 맑아 하늘에 닿았네
筆狀茶春風裏 (필장다춘풍리) 책상과 차부엌은 봄바람 속이요
藥末香塵小醉變 (약말향진소취변) 약찌꺼기 옅은 향내에 가벼히 취했네
己信誌公譚實相 (기신지공담실상) 이미 지공이 참모습 믿나니
要知喧靜兩皆禪 (요지훤정량개선) 시끄럽고 조용하고 모두가 선인줄 알겠네
만향각에서 유산 정학연과 함께 운을 내어 지은 시로서 초의선사는 이미 일생동안 할 공부를
다 마치고 한가하게 선비들과 시회를 하며 노는 모습이다.
눈 밝은 사람의 자신만만한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다.
유배지에 사는 시골 산승의 신분으로 하루 아침에 서울 장안의 선비들을 간담을 서늘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바로 잡아 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초의선사와 마음을 허락하고 지기가 되었으며 일생의 벗으로 우의를 다졌다.
天道至深廣 (천도지심광) 큰 도는 지극히 깊고도 넓어
如海浩無心 (여해호무심) 넓고 가없는 바다와 같네
普作群有依 (보작군유의) 모든 만물이 의지할 곳이니
如樹覆凉陰 (여수복량음) 마치 나무가 서늘한 그늘을 드리움과 같구나
妙用明歷歷 (묘용명력력) 오묘한 작용은 밟고 역역하여
强號謂之心 (강호위지심)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焉敢持不根 (언감지불근) 어찌 감히 그 근본에 의지하지 않으랴
曾聞海潮音 (증문해조음) 일찍이 큰 진리의 말씀 들었네
況入君子室 (황입군자실) 더구나 군자의 방에 들어가
共爲如實금 (공위여실금) 함께 진리를 말할 수 있으리
月冷雪明夜 (월랭설명야) 달빛도 싸늘한 눈 내리는 밤에
靜休諸緣侵 (정휴제연침) 고요히 쉬어도 모든 인연 침노하네
君看無生理 (군간무생리) 그대는 아는가 무생의 이치를
萬古卽長今 (만고즉장금) 만고의 세월이 바로 지금인 것을
산천 김명희에게 주는 시구에서는 불교의 진리를 논하고 있다.
대도는 가없는 바다와 같아서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낼 수도 없어서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한다며 참다운 이치를 안다면 어제와 오늘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절묘한 논리를 시라는 형식을 빌려 잘 풀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초의선사의 시는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32세(1817년) 봄에는 추사와 동로 김재원(東老 金在元) 등과 함께 시회를 하고 헤어져 경주로 내려가
불국사(佛國寺)를 구경하고 기림사(祇林寺)에 가서 천불(千佛)을 점안(點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천불을 모실 천불전상량문(千佛澱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千佛記)를 지어서 모시었다.
이때 경주에서 대흥사로 옮기던 천불 중 300분을 모신 배가 폭풍을 만나 표류해서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에 갔었다.
이듬해(1820년7월15일) 다시 모시고 귀국하여 돌아와 천불전에 함께 모셨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고 그 절목(節目)을 손수 써주시고 가셨다.
38세(1823년)에는 대둔사지(大芚寺誌) 간행사업에 가담하여 사지편찬을 도왔다.
본래 대둔사지는 그 행방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죽미기(竹迷記)와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의견을 첨부해서 사지를 편찬했으니 초의, 수룡(袖龍)스님이 편집하고
호의(縞衣), 기어(騎魚)스님이 교정하고 완호(玩虎), 아암(兒菴)스님이 감정(鑑定)을 해서
대둔사지를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지를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필사했다.
이듬해 39살(1824년) 때에는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했다.
이 암자는 선사께서 일생동안 은거하셨던 곳으로 선사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곳이요.
차문화를 펴던 자리이기도 하다.
선사는 이곳에서 선(禪)의 논지(論旨)를 바로 세워 초의선과(艸衣禪課)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를
저술하였고, 차문화를 부흥시키고자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 초시(抄示)하였다.
이 밖에 많은 시(詩)와 잡문(雜文)들이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선사께서 일지암을 짓고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45세(1830년)에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내서 차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도록 했다.
이는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만 완독하면 차를 만들어서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다신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해 가을에 선사께서 두 번째로 서울에 가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에게
스승님(완호스님)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거도인께서 겨울 내내 선비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보니 비문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훗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에게 부탁해서 짓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금미 김상희(金相喜)가
써서 비를 대흥사비전에 세웠다.
46세(1831년)에는 선사께서 그동안 화운(和韻)하거나 지으신 시(詩)들을 한데 모아서
초의시고(艸衣詩藁)라고 제명하여 시집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시집의 서문은 당시 유가(儒家)의 사표(師表)라고 하는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와
조선조 시의 명인(名人)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맡아 지었다.
이때 선사는 시작법(詩作法)에도 완숙하여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시를 지었다.
이듬해에도 서울에 머물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일지암으로 돌아왔다.
선사의 나이 48세(1883년) 때에는 조용히 일지암에서 지내면서 뜰에 대나무를 심었다.
이때 추사의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선생이 일지암으로 선사를 찾아오셨다.
유당 선생은 이곳에서 가까운 완도 고금도(古今島)에서 와서 4년여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자기의 아들 추사 김정희와 친숙하게 지내는 초의선사의 인물됨을 한 번 보고 싶어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지암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초의선사를 만나보니
그 덕행이 지고(至高)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당 선생은 초의선사의 인격에 반해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또 초당 뒤에 있는
유천(乳泉)의 물맛이 소락보다도 좋다고 극구 예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일지암을 방문한 유당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관악산 밑에 은거하다가 4년 후(1837년) 숨을 거두었다.
50세(1835년) 봄에 진도사람 허유(許維)가 일지암으로 찾아와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치(小痴) 허유는 재주는 있으나 견문이 부족하고 스승이 없어 화법(畵法)을 몰라
망설이다가 초의선사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을 꾸준히 화법과 시학(詩學), 그리고 불경과 차(茶)를 배웠다.
훗날 선사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선구자가 되었다.
52살(1837년) 봄에 일지암에서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 하였다.
동다송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부탁을하여 저술한 것인데,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 차를
게송(偈頌)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데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을 말했다.
또 각 구마다 주(註)를 달아 자세한 설명을 첨가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해놓았다.
동다송은 한국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차의 전문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선사의 친필본 동다송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굴 소개된 동다송은 모두 4종류로써, 신헌구가 필사한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이 필사한 석오본(石梧本)과 대흥사의 법진(法眞)스님이 필사한
법진본(法眞本)과, 송광사의 금명(錦溟)스님이 필사한 금명본(錦溟本)이 있다.
이듬해 53살(1838년) 되던 해 봄에 일지암을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갔다.
처음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두루 둘러본 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다시 한양(서울)에 들러서
해거도인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해거도인은 순조의 부마로서 시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존경받아오던 분인데, 사문(沙門)의 몸으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었음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더욱이 동다송 역시 해거도인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는 점에서 스님과 해거도인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조선조 사회에서 천대 받던 승려의 신분으로 유가의 빼어난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나눈 것은
오직 선사의 깊은 학문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하게 한 것이다.
선사의 나이 55세(1840년) 때에는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았다.
초의선사는 호남팔고(湖南八高) 중에서 한 분으로 그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小痴)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는데 그 지행(持行)이 어떠한가?' 하였다.
소치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선사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선사의 학덕과 지행이 널리 모든 선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사호를 받은 사람은 초의선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1841년) 두륜산 마하연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새로 짓고,
보련각에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 종사(十二代 宗師)스님과 12대 강사(十二代 講師)스님,
역대조사(歷代祖師) 고승대덕(高僧大德)스님 등 172분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 가서 있었는데, 소치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서 보내왔다.
이 현판은 지금도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도 써서 보내왔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걸작의 경문(經文)도 써서 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추사 당대의 최고의 절필로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다.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하나도 없이 수집가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58세(1834년)에는 선사께서 고향에 찾아간 감회를 시로 옲었다.
遠別鄕關四十秋 (원별향관사십추)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
歸來不覺雪盈頭 (귀래부각설영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新基草沒家安在 (신기초몰가안재)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
古墓笞荒履跡愁 (고묘태황리적수)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心死恨從何處起 (심사한종하처기)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血乾淚亦不能流 (혈건루역부능유)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孤공更欲髓雲去 (고공갱욕수운거)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已矣人生傀首邱 (이의인생괴수구)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고향.
늙은 몸으로 백발을 이고 찾은 고향,
어린 동몽의 기억으로 옛 집을 그리워하다 찾아간 고향이 이미 거덜난 쑥대밭이란다.
누가 슬프지 않으랴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에는 이끼만 가득 끼었고, 소식조차 물을 사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마음은 죽고 상했는데 한은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먹장삼만 적신다.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수구한다는 말 하지 말라 부끄럽구나.
62세(1847년)에는 진묵조사유적고(震묵祖師遺蹟攷)를 찬술(撰述)했다.
예전에 전주에 갔을 때 진묵조사에 대한 실기를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 선생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는데,
전주 봉서사(鳳棲寺)의 선사깨서 찾아와 진묵조사의 기문(記文)을 청했다.
이에 선사께서 전에들은 바를 기록하여 상하 두권으로 묶어 진묵조사유적고를 저술 하기에 이른 것이다.
66세(1851)에는 석오 윤치영(尹致英)과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초의스님 시집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에 발문(跋文)을 썼다.
이때 석오 윤치영은 일지암을 방문하고 선사께서 새로 창건한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를
짓기도 했으며, 또 동다송 석오본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 동다송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다.
71세(1856년)에는 금란교계(金蘭交契)를 사십이년간이나 깊게 나누던 추사 김정희가
서울 관악산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대정(大靜)까지 찾아가 반년 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용호(蓉湖:서울)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던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처럼 지내다가 홀연히 추사가 먼저 떠나니 선사께서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一枝庵)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이후 그토록 좋아하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산문 밖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생각 밖에서만 이루어 놓았고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사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선사를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으나
곧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主禪)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住錫)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侍者)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그때 세수(世壽)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高宗) 3년 8월 2일이었다.
선사께서 입적하신 지 오래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茶毘)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善機) 범인(梵寅)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辛未年) 4월로 입적하신 지 5년째 되던해 봄이다.
이때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다.
그후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義禁府事) 신헌(申櫶)에게서 비명(碑銘)을 얻어 그 옆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헌이 추금(秋琴) 강위(姜瑋)에게 부탁해서 대신 지은 것이다.
이 비를 세우기는 선사께서 입적하신 뒤 75년만인 1941년 4월에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泳)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선사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艸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진묵조사유적고(震묵祖師遺蹟攷),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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