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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행장

서옹 석호(西翁石虎)선사

서옹 석호(西翁石虎 1912~2003)선사

 

 

1912년 충남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전주이씨 이며 속명은 상순이다.

외동 아들인 관계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7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3품 벼슬인 중추원 의관을 지낸 조부 이 창진 옹으로 부터 한학을 배웠다.

연산공립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집안이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스님은 5학년 때 월반 시험을 치러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기였던 고등학교 시절, 17세 때

조부님과 모친께서 돌아가시자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에 젖어 들었다.

더욱이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던 터라 혈기가 왕성한 청년들조차도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한숨과 울분으로 삭이며 나날을 보내야 했던 시기였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서옹스님의 회고.

“그땐 한국 청년들에겐 희망이 없었어요. 독립이나 해야 희망이 있지,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 인생문제에 더욱 골똘했던 것이지요.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당대의 논객 장지연(張志淵)

무교회주의를 제창한 기독교인 김교신(金敎臣)으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정세와

망국의 한을 품은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 조언을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던 스님은 어느 날 김교신으로 부터 간디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당시 총독부에 있던 도서관을 찾아 간디와 관련된 책을 읽었던 서옹스님은

간디의 삶을 읽어가는 과정을 통해 불교와의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서옹스님의 회고.

“그 시절 나는 총독부에 있는 도서관에 가길 즐겨 했습니다.

거기서 간디 자서전을 읽었는데, 이 책을 통해

간디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간디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숭배를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가 훌륭한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총독부 도서관에는 일본인들이 써놓은 불교서적도 많이 있어서

그 후로는 불교서적을 많이 찾아 읽었습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불교가 제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지요.

 

고뇌의 시간을 보내던 스님은 인생의 문제,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 점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각황사에서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법회에 참석해 각황사 중앙포교사로 있던 대은(大隱)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이후 불교서적을 탐독하며 무아사상(無我思想) 등에 심취해 있던 스님은

각황사 법회에서 만난 대은 화상을 따로 만나 출가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 고등보통학교 출신들이 출가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더구나 명문학교 학생이 입산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터라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스님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줄곧 따라다니며 출가입산을 졸라대는 스님을 대은 화상은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나보다 훌륭한 스님을 소개해 주겠다’며 당대의 선지식 만암(曼庵) 화상에게 보냈다.

만암 화상과 청년 상순의 만남,

이 만남은 훗날 호남불교의 선맥(禪脈)을 공고히 하는 출발점이었으니,

잦아 들어가던 호남지역 불교기운이 새롭게 일어서는 전기에 다름 아니었다.

 

이미 불교에 심취한 스님이 학교와 가족 등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경성제대를 외면하고 중앙불전을 선택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스님은 역시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을 거쳐 출가를 감행했다.

1932년 방학을 이용해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은사로 계를 받고 정식으로 불문(佛門)에 들어,

받은 법명은 석호(石虎).

이때 스님의 나이 21세 되던 해였다.

 

24세 되던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백양사 강원에서 잠시 영어강사를 하다

2년 뒤에 오대산 한암 스님 회상에서 본격적인 수선납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곳에서 일본 교토 임제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유학승 유종묵(柳宗默)을 만나

선의 실수 못지않게 선 이론의 체계적 연구가 겸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28세 때인 1938년 일본 선학의 명문인 교토의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승 만암 화상의 허락과 도움으로 일본 유학에 성공한 스님은 교토 임제대학에서 당시

선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히싸마쓰 신이치 박사 등과 돈독한 교분을 쌓으며

임제정맥의 진수를 익히고 배우는데 깊이를 더해갔다.

1939년 일본 교토 하나조노대학에서 스님은 대학 졸업논문인진실자기(眞實自己)’에서

일본 불교학자 니시타 기타로와 다나베 하지메의 선()학설의 오류를 지적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참을 겸하여 지성을 갖춘 선지식으로 평가받은 스님의 졸업논문은

후에 일본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었다.

 

대학을 마친 스님은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묘심사에서 선 수행을 해보고자 혹독하기로 유명한

임제종 선원 입방식에 응시하여 힘든 과정을 불과 이틀 만에 통과하고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일대 조사의 풍모를 보이자 일본인들은 서옹 스님을 부처님처럼 여기며 여불(如佛)이라고 불렀다.

스님께선 묘심사 선원에서 3년 안거를 성만하신 후 1944 33세에 고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스님은 백양사와 목포 정혜원에서 잠시 주석하다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한다.

당대의 선객이었던 향곡 화상이 주석하고 있던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공부를 하고,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정진 중이던 성철 화상을 찾아가 정진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때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정진하던 동갑내기 성철 스님(1993년 열반)과 처음 만나 평생 도반이 된다.

 

1963년 동국대에 대학선원을 개원해 원장을 맡으면서 참선의 대중화에 힘을 쏟았다.

대학선원에서 선 법문을 비롯해 선의 진수와 불교사상을 알리는 강의를 열정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서옹스님이 보여준 선사로서의 활동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1964년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 1965년 서울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절 밖에 나오지 않고 참선만 함) 초대조실이 됐다.

이어 봉암사, 동화사, 대흥사, 백양사 선원 등 제방의 선원에서 조실로 추대되어 정진 및 후학제접에 나섰다.

 

서옹스님이 견성을 한 것도 이 무렵쯤.

그러니까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기 직전 선원에서 조실을 보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어느 날,

스님은 문득 눈앞이 밝아 옴을 느끼면 초탈의 경계를 여실히 보았다.

이 때 그가 읊은 오도송(悟道頌)은 이렇다.

 

象王嚬呻獅子吼  (상왕빈신사자후)   상왕은 위엄을 떨치며 소리치고 사자는 울부짖으니

閃電光中辨邪正  (섬전광중변사정)   번쩍이는 번갯불 가운데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도다.

淸風凜凜拂乾坤  (청풍름름불건곤)   맑은 바람이 늠름하여 하늘과 땅을 떨치는데

倒騎白岳出重關  (도기백악출중관)   백악산을 거꾸로 타고 겹겹의 관문을 벗어나도다.

 

개안(開眼)의 경지에 오른 스님은 자신의 경계를 스승 만암 화상으로부터 점검 받고,

즉시 법을 이었다는 전법게를 받았으니 이러하다.

 

白岩山上一猛虎  (백암산상일맹호)   백암산 위의 한 사나운 범이

深夜橫行咬殺人  (심야횡행교살인)   한 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 물어 죽인다.

颯颯淸風飛哮吼  (삽삽청풍비효후)   쏴쏴 맑은 바람 일으키며 날아 울부짖으니

秋天皎月冷霜輪  (추천교월냉상륜)   가을 하늘에 밝은 달빛은 서릿발처럼 차갑도다.

 

스님은 1949년부터 20년간 제방선원을 떠돌며 수행했다.

1968년 일본 묘심사를 다녀온 후부터는 법명을석호에서서옹으로 바꿔 사용했다.

1974년 효봉, 청담, 고암 스님에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정으로 계시던 시절부처님 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불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일이라 하겠다.

1979년에는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다시 수좌들의

선 수행을 지도하시는 등 수행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스님께서는 한국이 조사선 가풍을 재정립하고 수행전통을 사회화하기 위해

1995참사람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수행문화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998년 백양사에서 한암 스님 이후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대법회를 열어 세계적 불교 석학과 수행자들에게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써참사람주의를 제창하였다.

스님께서 말씀 하신 참사람은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으로 참사람을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이렇게 부연하였다.

 

참사람은 유물에도 유심(唯心)에도 무의식에도

하느님에도 불조(佛祖)에도 구속받지 아니하며

전연 상()이 없이 일체상을 현성(現成)하나니,

현성함으로써 현성한 것에나 현성하는 자체에도 걸리지 아니하여

공간적으로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형성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한한 역사를 창조하는 절대주체의 자각(自覺)이란 것이다.”

 

또한 스님께선 사회참여와 자비의 실천에도 앞장섰다.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한 IMF 때에는나라가 망하는데 수행자들이 가만히 있어서 되겠냐

꾸짖고 백양사를 개방하여 실직자들이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단기출가 수련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서옹 스님께선 고령에 이르러서도 형형한 안광과 카랑카랑 맑은 사자후로

여전히 대중에게 벽암록을 제창하시고 참사람 결사를 주도 하였다.

또 일찍이 스승 만암 스님이 백양사에 처음 세우셨던 고불총림을

1996년 다시 복원하시고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한 생을 다하여 선풍 진작과 납자 제접, 그리고 인류 구원의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참사람 실천운동을 제창하신 서옹 스님은 입적 3일 전부터 문도와 후학들에게

이제 가야겠다며 입적을 예고하였고, 2003 12 13

열반하신 당일에도 평상시처럼 운동을 하시고 입적 직전까지 시자 스님들에게 법문을 들려주신 뒤

세수 92, 법랍 72세를 일기로 고불총림 백양사 설선당 염화실에서 결가부좌 하신 채 입적하였다.

 

-임종게-

臨濟一喝失正眼 (림제일갈실정안)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德山一棒別傳斷 (덕산일봉별전단)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來恁 (래임)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白鶴高峯月輪滿 (백학고봉월륜만)   백학의 높은 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스님의 저서로 <선과 현대문명> <절대현재의 참사람> <절대 참사람> 등이 있다.

서옹 스님은 평소참선이 수행의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1996년부터는참사람 정신을 본격적으로 전해왔다.

스님은본래 자비심이 있는 참 모습을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라며

오늘날 인간이 이대로 가다가는 멸망하고 만다.

불법으로 돌아가 자유자재하는참사람을 발견할 때 인간이 역사를 바르게 쓸 수 있다

참사람 정신을 누누이 되짚곤 했다.

 

서옹 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장 심한 말이저 사람은 왜 저래정도라는 것.

다만 시간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해서는 엄격했다고 한다.

또 근검한 가풍에 따라 방장실을 독채로 짓지 않고, 주지실 바로 옆방을 그대로 사용해왔다.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머무는 상도동 백운암도 낡은 양옥인데

주위에서누추하니 수리를 하시라고 권해도

속이 빈 사람이 겉을 치장하는 법이라고 물리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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