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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행장

취미 수초(翠微 守初)선사

취미 수초(翠微 守初 1590~1668)선사

 

 

선조 23年 경성 성균관 북쪽 명류(名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삼문(成三問)의 후예로 자()는 태혼(太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부터 출가(出家)할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의 형이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자 어느날 밤 몰래 성벽을 넘어

설악산에 머물고 있던 경헌장로(敬軒長老)밑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출가의 뜻을 이루었다.

 

만력34年에는 두류산으로 들어가 당대 명성을 날리던

부휴선사를 찾아 뵙고 그에게서 수계를 하였다.

이때 부휴선사는 자신의 상수제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에게

그가 큰 그릇이 될 인물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취미스님을 부탁하였다 한다.
어느 날엔가 이 사미(沙彌)가 반드시 깨달을 것이나

나는 이미 늙고 더욱 병까지 들어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 부탁 하노니 그를 장차 잘 보호하여 주기를 바란다.”

 

그 후 스님은 여러 곳의 고승들을 역방(歷訪)하였으며 서울에 올라가 명사들과 교류도 했다.

그러는 사이 불문뿐만 아니라 외학에 대한 지식도 넓히어 유학자들과의 대담을 즐겼다.

스님은 철저히 고승인 벽암대사를 따랐다.

벽암스님이 관동을 편력 할 때 그를 따라 관동을 수행했고

그가 남쪽으로 내려오자 스님 역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인조 7년 옥천(玉川)에 절을 개당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님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영남과 호남 등지로

전전하면서 법음을 전하기도 했다.

어느 때인가는 선가의 중요한 전적으로 여겨지는 선문염송을 읽다가 책을 덮어 버리고는

무릇 모든 언어 문자는 이미 다 되어 좁쌀알과 같아져 버렸으니,

거기 또 무슨 맛이 남아 있겠는가하고 선의 경지를 읊었다고 한다.

현종9年 정월 주변에 모인 승려들에게 영북으로 갈 것을 고하고

2月에 오봉(五峯)의 삼장사(三藏寺)로 옮겨 갔다.

이후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6月에 스님이 기거하던 방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염하다

서쪽을 향해 앉아 그대로 입적하였다.

시가집인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1권이 남아온다.

 

스님을 따르던 고제(高弟) 32名이나 되었고 그 중 벽암 학성, 설파 민기등의

유명한 제자들이 있어 영세한 조선조의 승단(僧團)을 빛낸 선사다.

특히 전통적 한국불교의 특색인 선교를 일치시키려 했고

나아가 성도와 정토의 이문(二門)을 합일시키려 한 점이나

그 신행(信行)에 있어 정토왕생을 주장하고 타력신앙을 주장한 점은

사상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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