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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반야심경 강해 11-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반야심경 강해 11-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의 고액[고통과 액난, 괴로움]을 건너,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란

오온이 모두 공(空함) 비추어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의 고액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괴로움, 그리고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그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사리불이여, (),괴로움 이라고 하는데,어떤 것을 고()라고 합니까?

“벗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가 고()이다.

그것은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이다.

벗이여, 이 세 가지가 고이다.

 

첫째 고고(苦苦)란 괴로움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육체가 직접적으로 괴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프다던가,

병으로 몸이 아프다던가, 배 고파서 겪는 육신의 괴로움,그리고 추워서 느끼는 괴로움 등입니다.

 

둘째로 행고(行苦)란 행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변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삼법인 중 제행무상의 진리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이 바로 불교의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가장 가까운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불교에서 괴로움이라고 하면, 육체적 괴로움이나 혹은 다른 어떤 괴로움을 의미하기보다는,

일체 만유는 항상하지 않고 반드시 변화한다는 진리에 따른 괴로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늙고 병들어 예전처럼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에 해당되지요

 

또한 사랑하던 이와의 사랑이 늘 계속되길 바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짐에서 오는 괴로움, 돈이 항상 할 것 같고,

명예가 항상할 것 같고 권력이며, 지위, 계급, 사랑이 항상할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항상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 입니다.

우리가 흔히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생, , , 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괴고(壞苦)는 부서짐의 괴로움이라는 의미로서,

항상하기를 바라지만 일체의 법은 항상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부서지게 되는,인간으로 말하면 죽음의 괴로움입니다.

자연을 보면 성(), (), (), ()하여 반드시 변하여 부서지게 되고,

인간을 보더라도 생, , , , 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현재에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괴고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재물, 지위, 혹은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입니다.

 

자세히 말해, 돈이나 나의 소유물 등이 인()과 연()이 다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 괴고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 등은 괴고이면서 동시에 행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항상하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괴로움의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고()가바로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의 교설입니다.

 

경전에서는,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늙는 것은 괴로움이다.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어야 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다.

원한이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 또한 고통스럽다.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스러움이니,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라고 설함으로써 여덟 가지의 괴로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은 태어나는 괴로움이며, ()는 늙는 괴로움, ()은 병드는 괴로움,

() 죽는 괴로움으로 이상 네 가지를 사고(四苦)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그 네 가지란 원증회고(怨憎會苦)로 이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고,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음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오음이란 앞에서 배웠던 오온(五蘊)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란 ‘나다’라고 아상(我相)을 내세우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몸과 마음의 괴로움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생노병사 네 가지 괴로움은

몸의 괴로움이며,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세 가지는 마음의 괴로움이고,

마지막 오음성고는 오온이 치성함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과 마음[受想行識]의 괴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팔고(八苦)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고팔고`의 시발점은 생고(生苦)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머지 일곱 가지의 괴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생기는 부수적인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태어나는 것이 무슨 고()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팔고(八苦) 중 가장 큰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괴로움이라기보다는 가장 근본이 되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을 터입니다.

만일 태어나지 않았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괴로움이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인데 물론 이 세 가지는 누구나 괴로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혹 어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말고, 그와 반대의 개념,

,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왜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즐거움도 있는데

왜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생은 고(一切皆苦)다’라고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한 두 가지의 편협한 경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나온 것인데,

사성제의 고성제는 인생 전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단면만을 본다면, 젊은 것, 건강한 것,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 원하는 지위,

재물, 명예 등을 얻어서 즐거운 것 등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 전체를 보면 우리는 결국에 가서 ‘늙음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즐거움의 바탕에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이 이미 깔려 있다고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병들어야 하는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살아가면서 병 때문에 한번쯤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병이 육신을 엄습해 오면

그 괴로움이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건강할 때 항상 감사하며 살 일 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생, , , 사의 사고(四苦) 말고도, 네 가지 괴로움이 더 있으니,

이를 합쳐 팔고(八苦)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아끼는 물건 등은 영원히 나의 것으로 할수 없고 언젠가는 나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한창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두 남녀가 언젠가 그 중 한 명이 죽는다던가, 다른 이성과 눈이 맞아

헤어지려 한다면 이 괴로움은 그야말로 죽는 괴로움보다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연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뿐 아니라, 부모, 형제, 친지, 친구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괴로움도 `애별리고`입니다.

또한, 사람과의 일이 아닌, 물건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물건에 집착이 많을수록, 그 물건이 없어졌을 때 우리의 괴로움은 큰 것입니다.

 

다음은, 그와 반대인 `원증회고(怨憎會苦)`인데,

원망스럽고 싫은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만 보아도 화가 나고 답답하고 혹은 두려운 사람들과

항상 만나야 한다면 그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요?

 

다음으로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 세계의 생명 있는 중생들 중 과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얻으려고 하는데 비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쉽게 마냥 얻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심지어 축생들조차, 많든 적든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구해지지 않으면 속상해 하고 괴로워합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원하고, 수행하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사업가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며, 정치가는 최고의 권좌에 오르길 원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은 이들도, 주위에서 보면 돈이며 명예, 지위 등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부러워하겠지만, 사실 그 입장이 되어 보면 그 또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얻으려 하고,얻지 못해 괴로워하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얻고자 하는 욕구에 비해서 그 모두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모습과 환경 일체에 마냥 만족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고, 그것이 모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괴로워합니다.

 

다음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 오온(五蘊)이라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 , , , 식의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비롯된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온, 즉 ‘나다’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 하는상()을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오음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괴로움을 포괄하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에서 모든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나다’ 하고 고정지을 것이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누가 괴로울 것인가 말입니다.

 

육신을 좀 더 편안하게 하려는 색욕이 있으나 항상 부지런히 일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좋은 느낌만을 가지고 싶지만 주위의 인()과 연()의 경계 따라

싫은 느낌을 받는데서 오는 괴로움 등

육체와 정신에서 오는 괴로움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나다’ 라는 상을 여의면 사라지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타파된다는 말은 아상(我相)이 타파되고,

그렇기에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온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다는 사실을 올바로 조견(照見)할 때 이 괴로움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소멸되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나다’ 라는 상이 없다면 우리는 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의 주체가 사라진다면 어디에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내 것이라는 상 때문에, 내 것을 빼앗겼을 때 괴롭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니 괴롭고,

‘내가 옳다’ 라는 상 때문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 라는 상이 없다면 주위의 어떤 경계에 대해서도 여여(如如)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남이 욕을 하더라도 아상이 깨진 이에게는 한낮 허공중의 흐르는 말이 되고,

또한 반대로, 이런 사람은 내가 어떠한 행위와 말을 하더라도 주위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여

이리 저리로 머리 굴려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런 말을 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여

자꾸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왜곡되게 말하고,

 

그런 것이 반복되면 자꾸 구업(口業)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식으로 의업(意業)과 신업(身業)을 쌓아 가는 생활을 하며,

다시 그 업이 원인이 되어 업보를 받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도는 것입니다.

아상을 깨면 모든 것이 깨어지고 밝음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섭니다.

이 도리를 올바로 느낄 때 우리의 삶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 또한 이러한 아상,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근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없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기에 일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대상에 대한 집착심으로의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이 있을 리 없으며,

그렇다면 애별리고나 원증회고가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나’ 라는 상이 없으니, , 일체가 나 아님이 없으며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으니,

, 재물, 명예, 지위, 나아가 깨달음에 대한 집착심을 여의게 되고,

그러기에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있을 리 만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인생팔고는, 덮어놓고 무조건‘인생은 괴로움’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상이 있는 우리네 중생들에게 있어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일체 분별심과 산란한 마음,

그리고 일체의 경계를, 맑고 밝은 참주인공의 본바탕에 일임하여 맡기고

방하착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생은 고()가 아닙니다.

 

일체의 경계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항상하지 않는 경계일 뿐이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줄로 착각을 하므로,

그 경계에 집착하여 경계 따라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망상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은 여러 가지 실체가 없는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일어나는 것,

즉 연기(緣起)하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 경계들이 연기로서 본래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경계가 공하므로

나도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 모든 경계를 ‘나온 자리[참주인공]’에 놓고 생활한다면,

우리의 삶은 부처님의 삶에서 처럼 향기가 묻어 날 것입니다.

 

거짓된 나를 붙들고, 거짓된 경계에 얽매여 괴롭게 살 것인가,

본래 공()한 나의 본 성품을 올바로 믿고, 그 참주인공에 일체를 놓고,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여여하게 살아갈 것인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괴로움이‘성스러운 진리"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비실체적인 것임을 알아,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할 수 있기에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괴로움의 철저한 인식, 즉 인생이 괴로움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의 철저한 인식이 바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발심(發心)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되짚어보면,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는 반드시 ‘도일체고액’할 수 있다는 실천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입의분(立義分)으로, 서론에 속합니다.

 

반야심경의 핵심 경구를 말하라고 하면, 의례 이 부분 즉,‘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들 수 있습니다.

일체가 모두 공()임을 조견(照見)했을 때,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설명할 부분은 파사분(破邪分)으로, 일체가 모두 공()임을 드러내 주기 위해,

일체의 구조와 진리의 모습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깨달음 자체까지도

모두 공임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잘못된 삿된 소견을 파()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파사분이라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