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휴 선수(浮休 善修1543~1615)선사
조선 중기의 고승. 휘(諱)는 선수(善修), 호는 부휴(浮休)다.
속성은 김씨이며 전북 계수(契樹) 출신으로 아버지는 적산(積山),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 뒤 부용(芙蓉)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
그 뒤 덕유산· 가야산· 속리산· 금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 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동안 읽었다.
그의 필법은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당(四溟堂 )과 함께 당대의 2난(二難)이라 불렸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 수십명을 만났다.
차수(叉手)를 하고 선 그의 앞에서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그가 태연 부동하게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대기(大奇)하여 절한 뒤 물러갔다.
그 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 )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며칠 동안 옆에서 모셨다.
얼마 뒤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圓覺經)>을 외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원각경>울 다 외운 다음 뱀에게 가서 한발로 그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의 설법의 힘을 입사와 이미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는 두류산에 있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가 판명되어,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한 다음 설법을 청하여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가사 한 벌과 푸른 비단장삼 한 벌, 푸른 비단바지 한 벌,
금강석 염주 하나와 진완(珍玩)을 주었다.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齋)를 설하여 그를 증명으로 삼았다.
1614년에는 조계산에서 방장산 칠불암(七佛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 7월 제자 각성(覺性)에게 부법(付法) 하였다.
그 해 11월 1일 목욕을 한 다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七十三年遊幻海(칠십삼년유환해) 73년 동안 환해를 노닐다가
今朝脫殼返初源(금조탈각반초원)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돌아왔네
廓然空寂元無物(확연공적원무물) 모든 것이 공적하여 원래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확연히 깨달았네
何有菩提生死根(하유보제생사근)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을 건가.
선사의 나이 72세, 법랍 57세였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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