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처능(白谷 處能1619-1680)선사
속성은 전(全)씨, 자는 신수(愼守), 광해군 9년(1619)에 태어났다.
법명은 처능(處能), 백곡은 그의 법호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속리산에서 2-3 년을 배우다가 17-18세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백곡은 불학(佛學)보다는 잠시 한문과 유학에 더욱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백곡은 주로 동양위(東陽尉) 동애(東涯) 신익성(申翊聖)(1588-1644)의 집에 머물면서
경사(經史)와 제자(諸子)의 책을 읽고 유학과 문사에 대하여 깊은 조예를 갖게 된다.
동애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이며 병자호란 당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와의 친분은 어쨌든 백곡으로 하여금 당시
고관대작 및 지식인들과의 교제 폭을 넓게 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경사(京師)에 머물면서 그는 고관 문사들과 더불어 시문(詩文)으로 두텁게 교유하였으며
약관에도 채 이르지 못한 나이에 기재(奇才)로 불릴 만큼 문명(文名) 또한 높았다.
그러나 백곡은 이 같은 경사제자에 대한 지식이나 뛰어난 문명에만 안주하지는 않았다.
동애의 집에서 4년을 지낸 그는 어느날 문득 ‘기사(己事)가 미명(未明)함’을 깨달았다.
그 길로 백곡은 멀리 지리산 쌍계사로 내려가
벽암각성(碧岩覺性)(1575-1660)을 찾아뵙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미 15세 때 속리산에서 출가한 몸이기는 했지만
진정한 출가는 이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각성의 문하에서 20년 동안을 수도에 전념한 후에 그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백곡은 중년에는 서울 가까운 산사에 머물렀으며,
현종 15년(1674)에는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있다가
3개월이 채 못 되어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백곡은 얼마동안 표연히 남북을 두루 유행하며
속리산 · 성주산 · 청룡산 · 계룡산 등지에서 법석을 열어 전법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는 그의 나이 60세 전후의 일이므로, 학덕이나 사상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후 대둔산 안심사에서 오랫동안 주석하다, 숙종 6년(1680) 7월 2일 6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백곡집(白谷集)』 2권이 전해진다.
백곡선사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던
조선 중기에 출현하여 당시 가혹했던 배불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했던 유일한 승려로 기록되고 있는 선사이다.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현종 2년(1661)에 올린 백곡의 〈간폐석교소>는 8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하나의 훌륭한 논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 백곡은 폐불훼석의 부당 불가함을 논증하기 위해 광범한 사례와
심후(深厚)한 식견(識見)을 구사하여 타당하고도 이를 정연하게
항변 역설하여 위정자의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서론적으로 불타의 탄생과 입멸 그리고 불교의 중국 전래와
홍전(弘轉)내력에 대하여 약술한 다음 본론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의 훼불훼석의 근거를 6개항으로 요약해 보이고 있다.
1. 불교가 중국이 아닌 이방(異邦)에서 생긴 것이므로
2. 3대 후에 출현하여 상고(上古)의 법이 아닌 시대가 다른 것이므로
3. 인과응보의 그릇된 견해로서 윤회를 무설(誣說)하므로
4. 농사를 짓지않고 놀면서 재면(財綿)을 소모하므로
5. 머리를 깎고 법망에 잘 걸려 정교(政敎)를 손상케 하므로
6. 승려임을 빙자하여 요역(徭役)의 기피로 편오(編伍)에 유실이 있기 때문에,
폐불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백곡은 자신이 가정한 이 6개항에 달하는 척불논리와 이로 인한 폐불훼석은
부당불가한 것임을 많은 사례와 경전 등에 근거하여 일일이 논파하고 있다.
대체로 이들 6개항에 달하는 그의 논증은 불교의 철학적인 교리의 측면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가 존재해야할 당위성을 역설하는 내용들이다.
그는 또 중국에서 숭불과 억불의 사례를 들어 척불 위정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 삼국의 숭불흥국과 고려의 봉불(奉佛)이
치도(治道)에 유해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조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이 실제에 있어서는 숭불하여
폐불치 않았음을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당시 국왕 현종에게
재삼 불교의 무해(無害)를 강조하고 봉불의 이익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설을 독신(篤信)하던 당시에 도선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호소력있게 강조함으로써 거듭 봉불의 이익을 논하고,
끝으로 상소의 궁극적 목적인 양원(兩院) 즉 내외원당의 훼폐가 불가하다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폐불훼석을 간하는 소의 결론을 끝맺고 있다.
국가정책을 문제 삼아 불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한 것으로는
백곡의 간소가 유일한 것 이거니와, 이 같은 상소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그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그 후 몇 가지 조치와 추세를 통해
상소의 결과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즉 양원은 이미 철훼되었지만 봉국사와 봉선사는 끝까지 철폐되지 않고
존속되어 왔다는 점과, 현종이 그 만년에 봉국사를 세우게 하는 등
신불(信佛)의 흔적이 보이는 점, 또 현종 15년에 백곡 자신이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은
곧 그의 상소가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으로 보아 지는 것이다.
이처럼 백곡은 대문사(大文士)로서, 선교관(禪敎觀)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사상가로서, 또 배불의 시대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호법자(護法者)로서,
조선조 불교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기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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