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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한시.법어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는다.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는다.

 

《본칙》빈손(空手)

 

空手把鋤頭(공수파서두)   빈손에 호미를 들었고

步行騎水牛(보행기수우)   걸으면서 물소를 탔다.

人從橋上過(인종교상과)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는데

橋流水不流(교류수불류)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는다.

 

부대사(傅大士 497~569)가 노래했다.

 

《해설》

『선문염송』1429칙 부대사의 ‘공수(空手)’ 공안에 지공(誌公)은 송()을 달았다.

빈손은 법신(法身)이 모양 없다는 것이고,

호미를 잡았다는 것은 색신(色身)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걸어서 왕래하는 뜻을 안다면, 참이 거짓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소()라고 할 수 있겠다.

‘물은 참마음, 다리는 허망의 본체(진심유수眞心喩水 망체위교妄體爲橋)’를 의미하므로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해설을 붙였다.

가장 오래된 따라서 ‘최초의 염송(拈頌)(종진 엮음『회편 선문염송집 』上 p5)이라고 하겠다.

 

 

1.신통제일 지공화상

세간에 ‘지공(地空)거사’ 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된 어르신을 일컫는 말이다.

절집에는 지공(志公:寶誌 寶志 保志)화상이 있다.

표기된 이름도 3종류이며 출신지도 금성(金城 섬서성)과 금릉(金陵 강소성)

두 곳이나 되는 등 이래저래 전설적인 인물이다.

가장 유명한 지공화상은 양무제 당시의 지공화상이다.

금릉보지(金陵寶誌 418~514)화상은 『대승찬』을 지어 502년 황제에게 받쳤다고 하는데

그 황제가 양무제인지도 애매하고 금릉보지공이 또 그 지공과 동일인물인지도 알쏭달쏭하다.

법명이 비슷한 것도 많아 동명이인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쨋거나 지공화상은 『양고승전』권1에 구체적 행장이 정리되어 있다.

그 지공화상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얼마나 유명했던지 고구려 어떤 왕이

그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 은으로 만든 모자를 바쳤다고 하는 구전도 전해 온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이름이 이미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해인사 창건설화에도 지공화상은 등장한다.

 

 

2.지공화상이 해인사 자리를 점지하시다.

지공화상은 임종시에 『동국답산기東國踏山記』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지 얼마 후에 신라에서 두 명의 스님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

얼마 후 신라에서 순응 이정이 도착하자 반기면서 저간의 사정을 말한 후 그 책을 건넸다.

두 스님은 감격하여 지공화상의 탑묘를 찾아가 “사람에게는 고금이 있을지언정 진리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인유고금人有古今 법무하이法無遐邇)”는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일주일 밤낮으로 기도하며 법문을 청했다.

그러자 탑안에서 지공화상이 나타나 두 스님의 구도심을 찬탄하고 의발을 전하면서 말했다.

“너희나라 우두산(가야산)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곳에 대가람을 창건하라.

그 말을 마친 후 다시 탑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애장왕 3(802) 임오년 1016일 가야산 해인사가 창건되었다.

사천왕문 바로 옆 국사단(局司壇:가야산 여신 정견모주를 모신 사당)에는

‘지공증점지(誌公曾點地:일찌기 지공께서 점지해준 자리)’ 편액을 붙여 해인사 창건의 공덕을 기념하고 있다.

 

 

 

 

3.지공화상이 양무제를 발심하게 하다.

지공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다.

그래서 양무제(梁武帝464~549)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고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화상을 볼 수 있었다.

옥졸이 조는 사이에 도망친줄 알고 확인하니 스님은 여전히 옥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무제는 크게 놀랐다.

참회의 뜻으로 지공화상을 궁중에 모시고서 잔치를 베풀었다.

“스님! 몰라 뵈었습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라 대궐로 모시겠습니다.

궁중에 머무르면서 법문을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후 지공화상은 궁중에 있는데 또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스님이 살던 절에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가보니 그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왕위에 머문 40년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다.

그리고 지공화상은 무제가『금강경』강의를 듣고싶어 할 때 부대사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벽암록』67. 부대사가 경상을 두드리다 傅大士揮案 참조)

 

 

4.내 탑이 무너지면 동시에 나라도 망할 것이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 무제가 물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까지 유지되겠습니까?

“내 탑이 무너질 때까지 입니다.

지공스님이 열반하신 이후 무제가 몸소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로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다.

그리고 장례를 치루는데 지공화상이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수천 수만의 대중이 환희했다.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를 짓고 나무로 만든 훌륭한 탑을 세웠다.

완성되자마자 갑자기 그 유언이 생각났다.

“아차! 열반할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는데 목탑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리하여 다시 석탑을 쌓기로 결심했다.

목탑을 헐기 시작할 무렵 후경(喉頸)이 쳐들어 왔고 급기야 양나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지나친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른다는 것을 이 설화는 말해준다.

 

 

5. 잘 모르겠는데요.

선종의 최고저작으로 꼽히는『벽암록』제1칙‘달마불식(達摩不識)’공안에 지공화상이 등장한다.

황제와 코드가 맞지않음을 확인한 달마대사가 양자강을 건너 위()땅으로 떠난 이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공이 물었다.

지공: “폐하!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무제: “모르겠습니다.

지공: “그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차시관음대사此是觀音大士 전불심인傳佛心印)

이에 무제는 그 일을 후회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모셔오고자 마음 먹으니 지공은 이를 적극 말렸다.

“사신을 보내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모두 가서 불러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들어봐야 아무 소용없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6.『보림전』에서 지공이 최초로 등장하다.

무엇이건 최초기록은 중요하다.

달마대사를 ‘관음대사’라고 칭한 것은

『보림전』 (801년 간행. 혜능-마조계 첫 전등록)이 최초이다.

그리고 달마의 전기에 지공이 등장하는 것도 『보림전』 권8이 최초이다.

내용은 『벽암록』 1칙과 같다.

다만 최초원문은 “그는 불심을 전한 대사이며 관음성인입니다.

(此是傳佛心大士(차시전불심대사) 乃觀音聖人乎(내관음성인호))” 라고 하여

『벽암록』과는 앞뒤로 문장배치를 달리하고 있다.

달마에게 파견하고자 했던 사신의 직위와 이름이

중사(中使) 조광문(趙光文)이라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또 머물던 절 이름을 고좌사(高座寺)라고 명시했다.

초기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성과 구체성을 갖추기 위하여

무척 고심한 흔적을 구석구석 보여주고 있다.

 

-해인사 원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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