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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반야심경 강해 29-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반야심경 강해 29-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어두운 밤중에 뱀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와보니 새끼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어요?

뱀이 아니라 새끼줄인 것을 밝게 깨쳐 알고 난 다음이야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이 바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여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괴로움 등의 온갖 감정들은

이런 전도된 몽상[뒤집어진 꿈같은 생각]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현실 그 자체가 괴로움이거나 두려움은 아닌데,

다만 우리의 마음이 잘못 착각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아둥바둥하며 생을 힘겹게 살아가지요.


행복이란, 사실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가족이 화목하며,

이 몸을 좀 더 편하게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도 바로 행복의 추구가 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돈을 얻기 위해 남편, 아내, 혹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교묘히 죽이거나,

자식 손가락을 자르거나, 스스로 발목을 잘라 보험금을 받으려고 애쓰는 등의

비윤리적인 방법을 행하는 대담한 사람들이 매스컴에 많이 등장합니다.


이 얼마나 전도된 행복의 추구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 몸이 올바로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는 단란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본바탕을 망각하고, 돈을 위한 수단으로 근본을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주객이 전도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리석게 살아가게도 됩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러한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크게 네 가지[四顚倒(사전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불정)] 가운데서 깨끗하다[()]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 것[()] 가운데서 즐겁다[()] 하는 뒤바뀜이 있으며,

항상함이 없는 것[無常(무상)] 가운데서 항상함이 있다[()]고 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無我(무아)]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있다[()]는 뒤바뀜이 있다.


이 네 가지 뒤바뀜으로 인해 어리석은 중생들이 미혹된 세계의 참모습을

올바로 보지[正見(정견), 照見(조견)] 못하고, 잘못 본 전도된 모습을 진실로 착각하여

그 곳에 집착을 하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 두려움 등의 망심(妄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네 가지는 조금 더 소급해서 확대 적용시키는 융통성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정(不淨) 가운데서 정()이라고 생각하는 뒤바뀜에 대해서는,

반대로 정() 가운데 부정(不淨)이라고 하는 뒤바뀜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앞서 언급하였던 부정의 논리인 불구부정(不垢不淨)의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잘못된 네 가지 전도를 일으키며,

이로 인해 그 여인에게 집착해 사랑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때 한없는 괴로움에 빠져들게도 됩니다.


여인에 대해 깨끗하다는 정()의 감정이 있기에, 손도 잡고,

안아보고도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며,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라는

()의 감정이 있기에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이 사랑이, 그리고, 그 여인이 항상 할 것처럼 느끼기에, 멸했을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실제로 존재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 마음을 일으키는 내 몸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집착하기에,

아집(我執)으로 인한 괴로움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 세계에서 보면 깨끗하고 더럽다는 분별, 괴롭고 즐겁다는 분별,

항상하고 단멸한다는 분별, 내가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은 잘못 전도된 몽상일 뿐, 결코 고정된 것들이 아닙니다.

여인의 겉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 살가죽이 좋은 인연을 만나 잘 생겨 보이는 것일 뿐이지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똑같지 않던가요?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잠자며 몸뚱이를 연명할 뿐입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누구나 이 몸뚱이는 ‘똥주머니’인줄 알아야 합니다.

똥이 예쁜 주머니에 담겨 있다고 하여, 깨끗하다는 전도된 생각을 일으켜 그 예쁨에 집착할 것인가요?

본래 정()이다, 부정(不淨)이다 라는 분별은 다만 전도된 생각일 뿐입니다.

(), ()도 마찬가지이며, (), 무상(無常), 그리고, (), 무아(無我)의 분별도

엄격히 말하면 우리들의 잘못 전도된 허망한 분별심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전도된 분별망상들에 빠지고 집착하면 괴로움이며 불행이지만,

그것에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러한 분별망상을 여의게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해 전도된 몽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강조하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수행인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핵심은, 일체의 모든 현상계가 공()임을 올바로 조견(照見)하여,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일으켜 공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수행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반야바라밀다는 공()인 일체의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놓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방하착(放下着)의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착을 놓는 것이 바로 공의 적극적인 생활 실천이며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실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