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19
19.근대 불교
-불교의 영향-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간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도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인(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일승(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주지 임명 방법으로는 상승(相承), 법류상속(法類相續), 초대석(招待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저반(藷般)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주지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두 무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 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정(政), 교(敎) 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 종지(宗旨), 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태고사(현, 조계종)를 세워 31본산(本山)의 총본산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항일 불교운동-
이 시점에서 조선 불교의 당면 과제는 두 가지로 분류시킬 수 있다.
즉 한일 합방의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영향에 대해 조선 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와, 급변하는 사회정세 및 세계조류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 였다.
이를 둘러싸고 조선 불교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를 위해 일제와 타협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하는 반민족적 세력과,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 생활을 일삼는 무기력한 보수 세력,
나머지 하나는 민중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는 세력으로 3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 불교의 사회 운동이 표면화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청년 운동의 촉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그는 일제 침략기인 그 시점에서 유신을 외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의 분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만해는 여러 해 승려 대회를 열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여 결국 친일 흉계를 백지화 시켰다.
또한 그는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해 지극히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불교의 근본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총 종교적인 이념구현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조선 불교의 은둔주의와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열렬한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지눌과 원효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인물이었다.
불교는 3.1운동과 신간회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3.1운동의 민족대표의 자격으로 백용성,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조선불교 청년회와 불교 여자 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 자매 단체의 근우회에 각각 참여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참 고***
-일제하(日帝下)에서의 대처승-
일제(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경향이 노골화된 것이다.
일본 불교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 육식등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또 당시의 33본산(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이 시도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야기된 이른바 비구 대처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5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가 있었다.
“왜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 는 내용이었다.
왜색 승려는 구체적으로 대처승을 가리킨 용어였다.
그 해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의 유시내용 대로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 내기 위한 결의 대회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로는 효봉(曉峰), 금조(金鳥), 동산(東山), 청담(靑潭)등을 들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여명을 넘지 못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국 사찰 1천2백여개소를 관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당시 태고종(지금의 조계종) 종무원 (지금의 총무원)에서는 중재안을 냈다.
즉 전국의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하지만 현재의 대처승들에게 그 당대만은 사찰 거주를 허용할 것,
비구승들의 수도처를 20여군데 지정하여 단독으로 수행에 전렴토록 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 이가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 종단으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한편, 대처 승단은 태고종으로 발족하게 되는데 이 때가 1962년 이였다.
이 와중에서 망실된 재산과 토지는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를 낳게 된다.
또 5.16 쿠데타 직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등록시킨 것도 문제였다.
비슷비슷한 종풍(宗風)을 내건 불교 단체들이 문공부에 등록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한국 불교에는 26개의 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조계종의 첫번째 수행 과업은 태고종이 소유하던 사찰들의 합법적인 접수였다.
정화라는 기치아래 거의 모든 사찰들이 조계종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 접수 과정에서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 안으로 스며든다.
이들은 수행이나 사회제도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리는 이들이 승복을 걸치게 된 것이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오늘의 비극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악연(惡綠)이 뿌린 인과응보이다.
정화불사를 주도했던 청담(淸潭)스님은 이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음으로 조계종에 주어진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이었다.
분규에 따른 소송은 해당 사찰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총무원이라는 대표성 있는 단체가 맡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총무원에는 자금 동원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각 본사를 통한 분담금 납부 제도가 실시된다.
특히 전국의 명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막대한 입장료 수입이 생겼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하여 지방 단체장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사찰의 운영에 쓰이게 된다.
이 이권을 둘러 싼 잡음들도 끊일 사이가 없었고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의 자리는 늘 단명(短命)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평균 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이다.
본사 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마찰은 피할 길이 없다.
서의현 총무원장은 86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 조계종사에서 유일하게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연임을 거쳐 3선까지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재직한 8년은 아마 당분간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