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20
20. 근대 불교- 1950년대, 1960년대 불교
-정화운동(잘못 끼워진 단추)-
1) 정화운동의 태동- 1차 혁신운동
일제국주의의 대한(對韓)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왜색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이양책을
그 골자로 하였으며 이는 대처승의 육성과 사찰령의 실시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조치를 통하여 일제국주의는 불교를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불교는 자율성이 말살되고 전통성이 거세되어 갔다.
사찰령은 주지전횡제도를 가능케 하였으며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지님으로써
종권을 완전 장악하는 수법이 관철되던 상황이 바로 해방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방후 불교계의 과제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불교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매국, 보수파 타락승, 매교승의 제거와 교단의 정화, 또한 불교계에 뿌리 박혀 있는
일제 불교정책의 잔재청산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불교내의 반민족적, 반불교적 요소들은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불교정화운동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된 1차 혁신운동에서 그 태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1차 불교혁신운동을 살펴보자.
제1차 불교혁신운동은 '불교혁신회','불교혁신동맹'.'불교여성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학원',
'불교청년회'의 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었는바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들은 네가지로 압축 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
둘째, 불교의 대중화
셋째, 부패된 교단의 혁신
네째, 사찰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 확립
이와 같은 1차 혁신운동의 주요 목표들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민족적 각성과 종교적 양심을 자기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혁신운동은 불교혁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일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파악해 내었다.
자연히 혁신운동은 주체적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자 위협을 느낀 미군정과 보수, 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가하였으며
불교혁신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하고 만다.
관권의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하게 됨으로써
1차 불교혁신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 정화운동의 왜곡및 변질-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 지는듯 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지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유시 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
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3) 정화운동에서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불교 내의 비민족적, 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이다.
4) 비구- 대처의 종권분규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 왜곡되면서 종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 대처로 두 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1960.4.27) 실패로 돌아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 (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확인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판결을 내리자
비구, 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 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론 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 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 종지 등에 완전히 합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 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 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그라 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지게 되었다.
5) 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 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 데모, 할복, 법원난입, 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 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 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 인적, 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
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