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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여행

2013.1.19 부산/ 금정산성(중성/장대)

일자: 2013.1.19

산행코스: 산성마을/1번버스종점~금정산성/동문~4망루~중성/장대~학생교육원갈림길~국청사~산성마을

gps거리:6.4㎞ 널~2시간

 

산성마을 버스종점에서 바라본 파류봉(파리봉)

 

이제부터 금정산성길을 따라서 진행한다.

 

금정산성 [金井山城] 사적 제215. 둘레 1 7,336m, 높이 1.5~3.2m.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으로서, 지금은 4㎞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처음으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금정산성은 조선시대에 중축한 것이다.

1703(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 있는 동래부의 방비를 위해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둘레 9,011, 높이 15척에 동··· 4문이 있는 산성을 쌓았다.

그 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둘레 5,643의 중성(中城)을 쌓고, 시설을 보강했다.

1806(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서··북 문루를 다시 쌓으니, 그 길이가 32리였다.

산성의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고, 수구문·보루·암문 등이 설치되었다.

성 안에 국청사(國淸寺해월사(海月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국청사만 남아 있다.

1972년에 동문과 남문,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망루가 복원되었다.

 

금정산성 동문

 

전망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성동일대/산성마을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부산교육원 자리에 아문리(亞門里)라는 마을이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산성리(山城里), 영조 16(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각면각리원근정도조에,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18()라 하였고,

순조 32(1832)에 나온 <동래부읍지>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라 하였다.
1914
년의 부군(府郡) 폐합 때 산성리를 금성리(金城里)로 개칭한 듯하다.

이는 1899년에 발간된 <동래부읍지> 방리조에北面 山城里 距官門十八里라 기록된 것이,

1937년에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 읍면동리조에는 구포면 금성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중성. 4망루

 

부채바위 상단

 

땡겨보고~

 

 

부채바위

 

3망루와 4망루의 중간에 있는데, 마치 부채를 펼친 모양과 같다 하여 부채바위라고 한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괴로 되어 있어 록클라이머들의 암벽등반 연습지이다.

 

언제봐도 멋진암벽전시장

 

산성길따라~

 

4망루와 의상봉(사자바위)

 

4망루

 

4망루에서 바라본 고당봉

 

금정산은 부산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산세지만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이 이루어져 있고 14개나 되는 약수터에서는

항시 맑은 물이 샘솟아 올라 부산시민들의 모태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했던 탓인지 곳곳에 기암절벽이 절묘하고,

크고 작은 금정의 봉우리들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곳에는 넓은 분지를 형성해 자리한 금정산성 마을이 있다.

산성마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금정산성안 촌락으로 해발 810m의 산 정상에 서서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왜 국내 최대규모의 산성을 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 하류 대저 땅과 북의 양산지계까지 내려다 보이고

동으로 수영강과 회동저수지, 온천천, 동래읍성지역 등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탓에 왜구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 있었으니 금정산성과 마을의 역사와 전설은 곧 호국의 이념으로 점철돼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금정산성 안에 세 개의 신라고찰이 있는데

국청사, 미륵사, 정수암이 그것이며 모두 전통사찰로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 북문을 벗어나 3km 아래에는 범어사와 원효암을 비롯한 여러 부속암자가 자리하고 있으니

호국명산에 호국도량의 존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금정산성 중성길따라 장대를 보러간다.

 

 

금정산성 장대(將臺)

 

 

장대란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지은 장수의 지휘소를 말하며,

금정산성 장대는 금정산성의 중앙에 솟은 구릉 정상(해발475m)에 산성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건물은 정면3,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벽체가 없이 원기둥이 늘어서 있어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1703
(숙종29) 건립된 것으로 「동래부지(東來俯誌)」에 기록되어 있으나,

‘여지도’, ‘부산고지도’ 등에 장대건물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문화재위원들의 고증절차를 거쳐 2009 5 25일 금정구민의 날에 복원되었다.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임도같은 넓은길로 내려서고~

 

신라고찰 국청사

 

국청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 숙종 29,금정산성 축조와 함께 중수하여

이름을 국청사라 칭하고 순조 26년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판에숙종 29(1703)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보호하니 그 이름을 국청사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서온 호국도량으로서 그 역사 또한 깊다.

무엇보다 이 사찰에는 당시의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이란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승군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발장군과 송상현부사, 윤흥신 장군, 승장 만홍스님, 정안스님, 성관스님, 관찰스님 등 등 수백명의 신위가 모셔져

제사를 봉행해 왔다'는 국청사지의 기록에 미루어 의승군이 주둔한 호국도량으로서

그리고 그분들의 천도제가 봉행되어 온 지장도량으로서 그 정통성을 이어온 사찰이라 할 수 있겠다.

 

금성동 산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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