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14.9.21
답사코스: 경주.양남면/하서항~주상절리~읍천항~읍천벽화마을~경주문무왕릉~이견대~경주감은사지터
09:10 경주터미널앞 버스정류장에서 150번 시내버스를 타고~
10:20 양남면 하서1리 종점에서 하차한다.
하서1리 안내판
하서해안공원
하서항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 시작된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2012년 9월 25일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주상절리군은 발달규모와 발달크기 및 형태의 다양성에 있어서 기지정되어 있는 타 지역
주상절리 천연기념물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를 비롯한 수평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다.
또한 화산암의 냉각과정 및 특성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연구 및 교육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데에
부족함이 없음은 물론, 동해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한 학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기울어진 주상절리인데, 오랜 세월 파도에 휩쓸려서 기울어졌을까???
철도 침목을 쌓아 놓은듯한 모습의 누워 있는 주상절리
주상절리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인데, 기둥의 단면은 4각~6각형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류가 급격히 냉각되면 큰 부피변화와 함께 수축하게 되는데
이때 용암이 식으면서 최소한의 변의 길이와 최대의 넓이를 가지는 "육각기둥"의 모양으로 굳는 경향을 보인다.
(원은 선의 길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길이 대비, 다른 도형보다 넓이가 크지만
원으로는 빈틈 없이 조밀한 구조를 생성할 수 없다.)
수축이 진행되면서, 냉각중인 용암표면에서 수축이 일어나는 중심점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런 지점들이
고르게 분포하면서, 그 점을 중심으로 냉각,수축이 진행되면 다각형의 규칙적인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균열들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현무암층은 수천 개의 기둥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들은 용암의 두께, 냉각 속도 등에 따라 높이 수십 m, 지름 수십 cm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게 된다.
위로 솟은 주상절리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현무암이 주로 있는 바닷가라 그런지 자연경관이 참 좋다.
바위틈에서 의연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주상절리 전망대 주위는 KBS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이다.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
연속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
현수식 출렁다리
읍천항 등대
읍천1리 안내판
읍천항
읍천 벽화마을
11:25 150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길해수욕장으로 이동하니
이곳역시 KBS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이다.
봉길해수욕장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
사적 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대왕암으로 불리우며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에 따라 시신을 육지에서 화장한 후 바닷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는데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문무왕이 내린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신문왕(문무왕의 아들)은 동해에 작은 산이 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점을 치도록 하였는데,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풀이가 나왔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바다를 자세히 살피게 하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정오에 행차에 나섰다.
순간,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 이어졌다.
날씨가 가라앉은 후 왕이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내리는 보물입니다”
왕이 대나무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까닭을 묻자 용이 대답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것입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작은 산과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 피리를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며, 병이 낫고, 적병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세상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대종교 다리 아래로 흐르는 대종천
고려 시대의 일이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의 구층탑을 비롯한 문화재가 많이 불타버릴 때였다.
황룡사에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네 배가 넘는, 무게 100톤에 가까운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골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 나라로 가져가기로 했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운반수단이어서 토함산 너머에 있는 하천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용은 몽골병들이 큰 종을 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배가 대종천에 뜨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종을 실은 배는 침몰되면서 더불어 종도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이후 큰 종이 지나간 개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 뒤부터는 풍랑이 심하게 일면 대종 우는 소리가 동해 일대에 들렸고 몇 년 전만 해도
주위 마을의 해녀들이 대종을 보았다 하여 탐사하였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은은히 울리던 종소리의 주인공은 황룡사에 있던 종이 아니라
감은사의 종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빠뜨린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그러나 대종천의 조선시대까지의 명칭은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를 통해 확인 해보면
동해천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언제 오늘날의 대종천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해파랑길 경주구간 11코스/ 감포깍지길 이다.
신라 동해구 기념비
신라인들은 대종천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을 동해구라 부르고 신성시 했다.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감은사(感恩寺) 터 앞에 있는 신라 때의 유적인데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왕의 해중 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이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이견대가(利見臺歌)」라는 가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작자는 어느 왕이라 하나 잘 알 수 없고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어느 왕의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臺)를 지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이견대라 하고, 그 부자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어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견대기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감은사지로 가는길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었다.
감은사지 중문터와 금당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感恩寺址東ㆍ西 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신문왕 2년(682)에 세워진 쌍탑이다.
전체 높이 13.4m로 화강암으로 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두 탑이 같은 규모와 형식을 띄고 있다.
2층 기단(기단부)중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만들었는데 모두 12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상층 기단은 면석 12매에 갑석 8매로 이루어져있다.
이렇게 탑의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석재로 구성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단을 2층으로 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형식으로 이후 한국석탑의 전형을 이루었다.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 제366-1호)와
금동 사리외함(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15:30 도착한 15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터미널로 이동하고~
아침에 진행한 순서를 역으로하여 개금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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