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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분지로의 산맥인가? 산경표의 정맥인가?

조선의 산줄기체계 <산경표> 일본 지리학자의 <조선산맥론> 말한다.

 

▲ 자신이 복간한 원본 크기의 대동여지도 앞에 선 이우형 선생.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대간과 정맥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걷는 기계는 되지 말자.

백두대간을 남들보다 빨리 완주했다고, 장거리 당일산행을 뛰다시피 하여 먼저 내려왔다고 자랑하지 말자.

더 좋은 장비에 집착하기보다, 남들보다 산행경력이 오래되었다고 과시하기보다, 우리 산줄기의 의미를 기억해 공유하자.

 

고산등반가들에게 알피니즘이 종교 같은 것이라면, 토종 산꾼들에게는 <산경표>가 종교 같은 것이었다.

1990년대 대간과 정맥을 종주한 산꾼들은 일제에 의해 잊혀진 산경표를 내 발로 걷겠다는 강력한 신념이 있었다.

그들이 개척산행을 하던 때에 비해 지금은 고속도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산길이 좋아졌다.

하지만 대간이나 정맥을 완주하고도 산경표산자분수령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등산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이 아닌 육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특정 산줄기를 고집스럽게 걷는다면, 기본적으로 그 산줄기의 의미쯤은 알아야 한다.

30분만 투자해 읽어도 대강은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산행에는 몇 년을 투자하면서도 읽는 것을 싫어한다면 진정한 산꾼이라 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에 비해 등산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빈곤해지지 않았는지 반문해 봐야 한다.

하드웨어인 등산장비 시장은 휘황찬란하게 성장했지만 정작 소프트웨어인 등산 관련 도서 시장은 여전히 빈곤하다.

산은 남보다 빨리 가는 능력을 보여 주는 곳이 아니며, 비싼 장비를 과시하는 곳이 아니며, 헬스장이 아니며, 노래주점도 아니다.

과거에는 산을 속세를 떠난 곳으로 여겼지만 지금의 산은 속세의 욕망과 경쟁이 판치는 연장선상이 되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산자분수령이나 대간과 정맥에 관한 얘기는 1990년대에 월간<>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러나 아직 태백산맥과 백두대간의 차이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산맥은 지질학적인 개념이다.

산맥은 뫼 산()과 줄기 맥()을 쓰는 산의 줄기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온 태백산맥, 노령산맥, 차령산맥, 장백산맥 등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

그는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1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다.

이를 토대로 1903년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기요(紀要 : 논문을 실은 정기간행물)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과 ‘Journeys through Korea(조선의 지질지리적 여행기) 2,

지명사전(공저), 지질구조도(1:2,000,000)를 발표했다.

 

그의 <조선산맥론>이 현재 우리나라 산맥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행 교과서에 수록된 14개 산맥의 이름 중 함경산맥을 제외한 나머지 13개는 100여년 전 고토 분지로가 지은 이름이다.

이처럼 고토 분지로의 산맥체계와 명칭이 우리 지리교과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고토 분지로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지질학자다.

동경대 지질학과 졸업 후 독일 유학을 거쳐 1886년부터 동경대 교수로 역임했으며 1935년 사망했다.

서양 지질학의 일본 도입 과정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한국 지질학에도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식인들과 초기 유학파인 지질학자들은 비판이나 재검증 과정 없이 그의 조선산맥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지금도 아이들은 교과서를 통해 고토 분지로의 산맥론을 달달 외우고 있다.

 

그의 산맥체계는 독일의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 분류 방법을 따랐으나,

지질학적 증거의 뒷받침이 부족해 유럽의 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 우리나라 10대 강과 <신산경표> 산줄기.

 

고토 분지로, “한반도는 중국에 절하는 노인”

고토 분지로는 조랑말 4마리에 6명의 대원을 끌고 우리나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했다.

한겨울의 맹추위나 열악한 답사 환경에도 아랑곳없이 동해에서 서해로, 서해에서 동해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오르내리며 개마고원, 두만강 하류, 금강산, 지리산, 육십령 등을 누비고 다녔다.

그의 조선 남부 답사기를 역은 <조선기행록> 2010년 부산대 지리학과 손일 교수에 의해 국내에서 발간되었다.

 

분지로는 온갖 악조건을 견디며 14개월 동안 충실히 우리나라를 조사하고 답사했다.

전문적인 서양 지리학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지리체계의 근간을 세운 공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우리나라의 지리체계를 잡기 위해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지형과 지질 조사를 통해 효율적인 자원 수탈을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 산골 깊숙한 곳까지 일제의 탄광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헌신적인 활약(?)에 힘입어 일본은 한반도 전역의 수많은 자원을 샅샅이 캐갔다.

교통이 불편한 당시 어떻게 암석을 다 조사했을까 싶지만, 그의 <조선기행록>을 보면

당시 우리 산하는 나무는 고사하고 풀뿌리 하나 없는 민둥산이었기에 자원이 있을 만한 바위는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조선기행록>에서 분지로는 한반도를 서 있는 토끼로 묘사했으며,

더불어  “중국에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는 노인의 형상이라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적 뿌리가 깊게 배어 있다는 식의 내용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교묘히 합리화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뛰어난 지질학자 이전에 조선을 철저히 일본의 식민지로 여기는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토 분지로의 이론은 1908년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충격이었고 논란이 되었다.

이에 육당 최남선은 한반도 호랑이 비유를 통해 통렬하게 분지로의 토끼론을 반박했으며,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 영인본을 발간했다.

우리 민족에겐 산경표라는 산줄기 체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남선은 일제 강점 말기 친일로 돌아서는 바람에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대부분 잊혀졌다.

 

안타까운 것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무비판적으로 일본의 산맥론이 채용됐다는 것이다.

1908년 평양의 대동서관에서 발행한 지리교과서인 <고등소학 대한지지>에는

분지로의 제자인 야스 마스나가의 이론을 채용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야스 마스나가는 1904 <한국리지>를 발행했으며 고토 분지로가 연구한 개요에 따라 서술하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산맥은 눈에 보이는 산의 줄기가 아니라 지질구조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눈에 보이는 산줄기가 아닌 땅 속의 광맥줄기를 산맥의 기본 개념으로 했다.

그래서 산맥을 따라 걸으면 산이 없거나 강줄기가 나오는 곳이 허다하다.

상식적인 산맥의 의미에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분지로의 조선산맥론을 옹호하는 이유에 대해

산맥지질의 연속성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과연 국제적으로 산맥이 그런 의미로 통용될까?

그렇지 않다.

 

전 국토연구원 부원장이자 현 대한지적공사 사장인 김영표 박사는 “지리학계의 산맥 개념은 억지춘향격”이라고

2010년 한 등산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는 한국산서회에서 발행하는 <산서> 16호에서 각종 해외 문헌을 조사한 결과

산맥이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산맥이란 산지에서 일정한 규모를 가진 산봉우리가 선상으로 길게 연속되어 있는 지형이라 정의되어 있고,

주요 문헌에서는 심지어 산맥은 지질의 형성 요인과는 무관하다거나

같은 지질구조를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학계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지리학과 지질학은 현대과학으로도 구분이 명확한데 우리는 100년 전의 전근대적인 산맥 개념을 아직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일본은 지질구조 개념의 산맥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 지 오래다.

 

▲ 고등학교 지리부도에 실린 일반적인 우리나라 산맥지도.

 

대간과 정맥을 부활시킨 이우형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산맥론에 대해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잊혀진 조선의 지리체계인 <산경표>를 발굴하고 “이 땅의 척추는 태백산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이라고

처음 세상에 알린 이는 고 이우형 선생이다.

1960년대 초부터 산에 다닌 그는 등산백과라 할 수 있는 <등산수첩> 1967년 펴냈고,

월간<>의 전신인 <등산>보다 한 달 늦은 1969 6월에 등산잡지인 <산수>를 창간했다.

<산수>는 자금 사정으로 그해 말 폐간되었다.

그는 고산자 김정호 연구에 큰 공헌을 했으며 1985 <대동여지도>를 복간했다.

 

이우형 선생은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다가 접하게 된 신경준의 <산경표>에 빠져들었다.

그는 산경표를 기반으로 우리 땅 산줄기 물줄기를 찾는 데 몰두했고,

그 결과 백두대간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우형 선생을 필두로 한 선구적인 산악인들은 전국의 산꾼들에게 산경표와 대간,정맥을 알리기 위해 앞장섰다.

전국순회 강연회를 열고 등산잡지에 소개하고 책을 펴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선조들의 산줄기 체계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 후반 백두대간과 정맥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며, 산꾼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일반 대중과 지리학계는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산꾼들은 우리 산줄기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신념으로 대간과 정맥 종주에 나섰다.

 

그때는 등산로가 잘 닦여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특히 정맥의 경우 개척산행으로 덤불에 긁히고 길을 잃고 눈 속에 갇히고, 간첩으로 오해받는 등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산줄기를 알리겠다는 불타는 신념을 가지고 걷고 또 걸었다.

대간과 정맥 종주는 산꾼들 사이에서 파급력 있게 퍼졌고,

이 산줄기만 전문으로 종주하는 안내산악회가 여럿 생기기에 이르렀다.

 

20여 년간 많은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했지만 아직도 등산로 입구의 산 안내판이나, 인터넷 산 정보에는

태백산맥에서 분개해 소백산맥에 자리한 이 산은으로 시작되어 산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산줄기를 타는 등산인들은 최소한의 진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알고 타는 것과 모르고 타는 것은 천지 차이다.

그저 건강을 위해 산줄기를 종주하는 사람이, 물길을 건너서는 안 되며

편한 우회길의 유혹을 버리고 능선길을 고집해야 하는 대간,정맥 종주의 불문율을 지킬 것이라 보긴 어렵다.

알고 타는 우리 산줄기 종주는 단순한 산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

()고토 분지로가 1903년 발표한 한반도 지질구조도의 일부분.

그는 땅속의 지질구조로 산맥을 분류했으며 우리는 지금도 이 분류를 따르고 있다.

 

산줄기는 곧 물줄기다.

<산경표>는 조선시대의 문헌으로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과 정간,

13개의 정맥, 다시 가지 친 기맥으로 분류한 산줄기 족보다.

수록된 자연지명은 모두 1,640여 개이며, 이 중 산 이름과 고개 이름이 1,500여 개다.

산경표의 우리 산줄기 이름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이다.

이름 중 4개를 제외한 11개는 강 이름에서 산줄기의 이름을 따와 그 강의 남북으로 위치를 표시했다.

 

이렇듯 산줄기 이름을 강 이름에서 따온 까닭은 정맥의 정의를 강 유역의 경계능선,

즉 분수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1대간 1정간 13정맥은 우리나라 10대 강을 가르는 산줄기다.

10대 강은 압록강, 한강, 두만강, 낙동강, 대동강, 금강, 청천강, 임진강, 섬진강, 예성강이다.

 

산경표의 대표적인 본은 현재 세 가지가 남아 있는데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장서각의 <여지편람(與地便覽)>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가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상당수가 산지인 산의 나라다.

특히 지금처럼 현대화되기 전에는 산은 취미로 오르는 곳이 아닌 생활 속의 산이었다.

늘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선조들의 생각과 산경표의 개념은 닿아 있어, 산은 앞의 들까지 모두 포용하는 하나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렸고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산줄기는 삶의 터전인 물뿌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산의 흐름이 곧 물의 흐름이었다.

 

산경표의 산줄기 개념은 당시 자연스럽게 생활권을 나누고 있었다.

지금보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었고, 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기에 산줄기는 지역을 나누는 자연스런 분계였다.

이로 인해 자연환경이 다른 것은 물론 음식문화, 방언과 풍속 등의 생활문화, 역사문화 등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왔다.

 

고 이우형 선생은 1993년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땅, 우리 산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모태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경원리,

즉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알맹이인 물의 산지라는 인식을 옛 선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산을 아끼고 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선조들이 인식했던 산경의 원리를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에서 우리 땅에 대한 더욱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있기를 빈다.

 

참고문헌/기사

박성태, <신산경표>, 조선일보사, 2004.

고토 분지로, <조선기행록>, 손일(), 푸른길, 2010.
월간<>, 이우형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1993 6월호.
월간<>, 박용수 <한반도를 모화적 형상으로 해석한 고토 분지로>,  1994 1월호.
월간<>, 최선웅 <산줄기 지도>,  2005 4월호.
월간<>, 최선웅 <대동여지도의 뜻, 현대에 되살려낸 고 이우형 선생>,  2010 10월호.
월간<>, 박성태 <나는 산경표를 이렇게 본다>,  2005 8월호.
월간<>, 박성태 <남한의 산줄기는 1대간 7정맥이다>,  2007 2월호.
<
산서> (16), 김영표 <다시 찾은 백두大산줄기>, 한국산서회, 2005 12.

 

-: 월간<> 신 준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