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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미안하지만 그동안 낙남정맥을 잘못 탔습니다.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가르는 생활 산줄기

 

낙남정맥은 논란이 될 만한 정맥이다.

〈산경표>에는 분산에서 끝을 맺는다고 쓰여 있는데 산꾼들은

신어산(동신어산)을 끝으로 잡아 종주했다.

지금까지 산꾼들이 엉뚱한 산을 잘못 탔다는 얘기가 된다.

어찌된 일일까?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니라 알고 산을 타자’는 것이다.

앞선 이들이 모두 이 길로 갔다 해서 이 길이 맞는 것은 아니다.

왜 우리 산꾼들이 지금까지 낙남정맥을 잘못 탔는지 이유를 설명하겠다.

 

조선광문회에서 간행한 <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이

불모산(佛母山)~구지산(龜旨山)~분산(盆山)으로 끝난다고 되어 있다.

<산경표>의 산 이름이 현재의 어느 산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산꾼들이 지금껏 종주한 경로를 보면 김해에 이르러 용지봉~금음산~신어산~동신어산에 이른다.

용지봉 남쪽에 801m의 불모산이 있지만 과거에는 용지봉까지

불모산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러면 구지산과 분산이 어디냐가 해답을 쥐고 있다.

 

 

<신산경표>의 낙남정맥(붉은색으로 표시한 산줄기).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가르는 산줄기다.

구지봉과 구지산은 김해시청 언저리에 있다.

 

지금도 구지봉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산경표>에는 구지산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김해 북쪽 5리에 있다’고 밝혔다.

분산을 설명할 때는 ‘분산에서 남쪽으로 3리를 가면 김해 관아가 있다’고 했다.

 1리는 0.54km이므로 김해관아 터인 현 동상시장을 기준으로 거리를 재면

지금의 분성산(327m)이 분산이고, 김해천문대가 있는 봉우리가 구지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꼭 거리로 따지지 않더라도 여러 문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 갈 것은 구지봉이다.

<산경표>는 불모산~구지산~분산 옆에 별도로 구지봉을 기록했다.

구지봉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남쪽으로 몰운대를 마주보고 몰운대 북쪽에

세 갈래진 강이 있다’고 했다.

구지봉은 <문헌비고>의 ‘여지고’에 나온다.

여지고의 저자는 신경준이라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산경표>는 정확한 저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신경준이 저자라고 알려진 것은,

<산경표> <여지고 산천총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산천총설>은 산줄기 말미에서 분산이 아닌 구지봉에서 끝난다고 했다.

 

구지봉에 대한 설명으로 ‘남쪽으로 몰운대를 마주보고, 몰운대 북쪽에 세 갈래진 강이 있다

(龜旨之峯南對沒雲之臺於三叉之北)’고 역시 설명했다.

실제 지형을 바탕으로 보면 구지산에서 갈라진 줄기가 분산과 구지봉으로 나뉘는 것이 맞다.

그러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산천총설>이나 <산경표>가 기존 산줄기는 띄엄띄엄 멀리 떨어진 산 이름을 호명하며

산줄기를 이어가다 왜 구지산에 와서는 1km의 짧은 거리에서 산 이름을 기재했는지 말이다.

또 강의 온전한 하구에 가 닿지 않고 김해관아 언저리에서 끝을 맺었는지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산경표>에서 산줄기를 가르는 대원칙은 산자분수령 외에도 ‘생활권의 경계’가 있다.

정확하게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가 아니더라도 그 산줄기가 생활권을 나눌 정도로

세력이 크면 정맥의 주능선으로 삼은 바 있다.

 

<산경표>의 금남정맥 계룡산과 금북정맥의 가야산, 한북정맥의 북한산이 그런 경우다.

금강의 정확한 남쪽 테두리는 계룡산 방향이 아닌 군산의 장계산으로 가는 것이

맞지만 <산경표> 100m대까지 떨어지는 낮은 산줄기를 버리고 계룡산이라는

민족의 영산이 있는 산줄기를 택했다.

 

금북정맥도 정확한 금강 북쪽 테두리 역할을 하는 산줄기는 백월산에서 남쪽 서천으로

이어진 줄기가 맞지만 가야산이라는 생활권을 가를 정도로 큰 산이 있는 줄기를 택했다.

 

한북정맥도 한강봉에서 오두산으로 가야 정확한 한강 북쪽의 산줄기지만

수도 한양의 명산인 북한산을 택했다.

 

구지산과 구지봉은 낮지만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탄생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산경표〉는 낙남정맥을 이곳에서 끝맺은 것이다.

이는 <산경표>의 오류가 아닌 생활권의 경계, 더 중요한 곳을 택하는

<산경표>의 다른 원칙이 적용된 경우다.

 

<산경표>의 낙남정맥 끝이 동신어산이 아니란 것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포털에서 ‘낙남정맥’을 검색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모두

‘김해 분성산에서 끝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 왜 산꾼들은 그동안 구지봉이나 분산 쪽으로 가지 않고

동신어산으로 종주해 왔냐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1990년대 처음 낙남정맥을 종주해 등산매체에 소개한 이들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산경표>와 현 지형도를 비교하며 개척산행을 했다.

그러나 낙남정맥의 끝이 강하구가 아닌 내륙에서 끝나는 것에 의문을 가져 방향을 바꾸었다.

 

산줄기가 강하구를 향해 계속 이어지는데 왜 여기가 끝이냐고 본 것이다.

그래서 분산(분성산)으로 내려서지 않고 동쪽으로 계속 이어가 동신어산 매리로 끝을 맺었다.

이들은 당시 대동여지도에 능선이 이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는데,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는 체계가 다르다.

매리는 강의 하구에서도 한참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낙동강의 완벽한 남쪽 모산 역할도 못 하고 있다.

 

 

▲ 논란이 되고 있는 낙남정맥 종착지.

<산경표>에는 분산(분성산)에서 끝난다고 적혀있으나 처음 종주한 이들이

신어산(동신어산)을 끝으로 잡으면서 오해가 생겼다.

 

처음 낙남정맥을 종주해 등산매체에 소개한 이들의 기사로 인해 동신어산에서 매리로 내려서는

엉뚱한 산줄기 타기가 낙남정맥 종주로 굳어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잘못된 종주에 대해 20여 년 동안 산꾼들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성태(<신산경표> 저자) 선생을 비롯한 선구적인 이들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이 밝혀졌는데

이를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남들 가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시선으로 보면 <산경표>의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지도만 믿고 오로지 완주에만 집착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20세기 초에 저지른, 무비판적으로 일본 지리학자의 이론을

모두 수용한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참고로 <산경표>를 오랫동안 공부한 이들은 한결같이 저자가 신경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경준이 죽은 이후에 생긴 지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신경준이 만든 것이 확실한 산천총설에서는 불모산~구지봉에서 산줄기가 끝나고

분산은 그 사이에서 갈라진 줄기라 했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산에서 끝을 맺고 구지봉을 어정쩡한 자리에 부기해 놓았다.

 

이제 <신산경표> 얘기를 하자.

이전 7정맥 특집 연재 글에서도 숱하게 밝힌 것처럼 <신산경표>

생활권의 경계 같은 문화·역사 등을 배제했다.

교통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오늘날 산줄기가 장벽이 되던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산자분수령과 산줄기의 이어짐으로 정맥을 나누었고

그 결과 〈산경표의 낙남정맥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창원과 김해 경계의 용지봉에서 북동쪽이 아닌 남동쪽으로 가서

불모산과 굴암산~보배산~봉화산을 지나 녹산교 앞에서 끝난다.

 

즉 산줄기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발원하는 계곡은 모두 낙동강으로 가고,

남쪽으로 발원하는 계곡은 모두 남해로 흘러든다.

완벽한 낙동강 남쪽의 모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산꾼들이 동신어산으로 종주하는 것은 <산경표>를 놓고 봐도 틀린 것이고

산자분수령의 강 나눔 원칙을 놓고 봐도 틀린 것이다.

 

 

1 정병산에서 본 낙남정맥 산줄기.

낙남정맥의 봉우리들이 겹겹이 포개어 실루엣을 이루었다.<사진 황계복>

2 동신어산 정상의 이정표.

매리 방행을 낙남정맥이라 표기해 놓았다.<사진 장재용>

 

생활의 터전이자 내륙·해안 경계

 

다음 주제로 낙남정맥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전에 밝혀 둘 것은 낙남정맥의 시작 지점이다.

<산경표>는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이 끝나고 낙남정맥이 시작되지만 <신산경표>는 다르다.

<신산경표>는 백두대간이 온전히 강과 산을 나누며 산줄기가 남쪽으로 이어가,

섬진강의 동쪽 모산 역할을 하며 하구인 연대봉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낙남정맥의 시작 역시 지리산이 아닌, 하동 옥산의 546.8m봉이다.

지도를 보면 낙남정맥의 역할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이는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나누는 것이다.

남부 해안지방의 분계선으로 생활문화와 식생, 해안과 내륙의 기후 차이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도가 100m대로 떨어지는 사천과 진주 구간에서는 물줄기는

나누는 역할은 하지만 생활권이나 문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고성을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 함안과 창원에 이르면

고도 600~700m대에서 생활권과 문화를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기조는 길게 이어져 하구에 닿기 직전인 보배산에서도 479m의 고도를 유지하고 있다.

산줄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것이 산인지 언덕인지 구분 가지 않는

구릉지대의 비율이 높지는 않은 것이다.

 

남강의 남쪽 모산인 낙남정맥 덕분에 인간의 역사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남강을 젖줄로 삼은 진주, 의령, 함안이 여기에 해당되며

낙동강과 합친 후에도 창원, 김해 같은 곡창을 길러냈다.

 

낙남정맥에서 가장 이름 높은 산은 여항산, 무학산, 천주산, 불모산이다.

여항산(艅航山, 770m)은 예부터 함안의 주산(主山)으로 통했다.

낙남정맥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원에 있다.

함안의 지형적 특성인 남고북저의 지세와 하천의 역류는 모두

여항산 때문일 정도로 지역의 큰 산이다.

 

여항산에 관한 기록은 옛문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주지>,

<영남읍지> 등에서 확인된다.

그중 <함주지>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두류(현재의 지리산)에서 300리를 이어져 와 함안군을 진압하는 진산이다.

산꼭대기 바위는 깎아지른 듯하고 남쪽은 낙숫물을 받는 댓돌처럼 생겼는데

그 위가 편평하여 10여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대마도의 여러 섬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산허리에는

한낮에도 신령한 퉁소 소리가 나는 듯하며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가뭄이 심할 때에는 군민들이 기우의 깃발을 꽂고 비가 올 것인지 점을 친다.

 

‘여항’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관련한 전설로는 천지사방이 물에 다 잠겼을 때

여항산의 꼭대기가 배만큼 남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록에 ‘남을 여()’자에 ‘배 항()’자의

‘餘航’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위해 여항산을 중심으로 피아간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여항산은 국군의 마지막 저지선이었으며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여항산 봉우리의 주인이 19차례나 바뀌었을 정도였다.

여항산 자락은 국군, 미군, 함안 군민 등 무수한 인명이 희생당한 비극의 장소다.

산 입구에는 6·25함안민안비와 추모비가 있다.

여항산 전투는 낙남정맥의 현대사에 얽힌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무학산(舞鶴山)은 창원시 서쪽의 마산지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신라 말기에 이곳에 머무르던 최치원이 산을 보고는 학이 나는 형세라고 했다고 해서

이때부터 무학산으로 불렀다.

근래에 와서 등산이 일반화되었지만 과거에는 생활의 터전이며, 종교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특히 경남권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융성했었다.

 

경남대 역사학과 유장근 교수는 무학산 서원곡만 보더라도 너럭바위 부근에

4곳 이상의 기도처와 신당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대표적인 신당은 태각암으로 오방장군도와 산신도, 용왕도는 다신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며

“아들 낳기를 바라고 병이 낫게 해달라는 민간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설명했다.

 

불교 사찰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에 집중적으로 건립돼

10개가 넘는 사찰이 서원곡과 무학산 일대에 생겨났다.

여기에는 일본인과 전쟁 피란민의 유입, 산업화에 따른 항구도시의 급격한 인구 증가가 그 배경이다.

종교의 변천도 눈에 띄는데 고려시대 조성된 대형 신당인 산제당이 불타 사라지고

바로 성덕암이라는 사찰이 들어서기도 했다.

현대에는 기독교의 기도원까지 서원곡에 들어서, 무학산을 통해 한국 종교의 변천사 가늠할 수 있다.

 

천주산은 등산이 대중화되면서 현대에 더 유명해진 산이다.

전국에서도 진달래 명소로 손꼽혀 봄이면 진달래축제가 열려 인산인해로 등산객이 몰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산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산이 높은 데서 유래한다.

천주산이란 이름도 인근의 산 중에서 가장 높아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642m면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산으로 높은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산이 선 자리다.

창원 시내가 있는 너른 분지 뒤에 솟아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에 높이보다 훨씬 커 보인 것이다.

결국 첩첩산중 산간지역의 높이 1,000m가 넘는 산보다, 사람의 생활권 속에 있는

낮은 산이 더 크고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산경표> 낙남정맥의 최고봉인 불모산(佛母山·801.7m)은 그 이름처럼 불교의 향이 짙다.

산 이름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이곳에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했기때문에 붙여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을무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광해군일기>에는

‘옛날부터 이 산에서 쇠를 많이 생산했는데, 철광석을 녹이려면 불못(용광로)이 필요했다.

그래서 불못산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변해 불모산이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의 ‘불모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불모산 지척의 능선에 웅산이 있는데 이는 창원의 대표적인 명찰인 성주사와 관련 있다.

신라시대에 이곳에 창건된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선조 37(1604)

다시 중건하게 되는데 그때 곰이 나타나 불사를 도와주었다고 해서

‘웅산사’나 ‘곰절’이라 불렸으며, 그 뒷산을 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월간山>은 창간 45주년을 맞은 <신산경표> 7정맥 특집을 연재했다.

올해 6월호에 호남정맥을 시작으로 이번 12월호 낙남정맥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끝맺는다.

조선의 산지체계였던 <산경표>를 현대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신산경표>

일곱 정맥을 집중 조명한 것은 한국의 미디어 중 처음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산꾼들만 아는 감동, 정맥에 있어

 

1980년대부터 많은 산꾼들은 “고토 분지로의 산맥은 현실에서는 없다”며

“땅 속 광물 줄기는 산줄기가 아니다”고 외쳐왔다.

광물 수탈을 위한 일본 지질학자의 〈조선산맥론〉이 아니라 나라의 큰 강을 나눈

선조들의 지리서 <산경표>가 맞다고, 이 땅에 산맥은 없고 대간과 정맥이 있다고

주장해 왔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고토 분지로가 지은 산맥 이름을 달달 외도록 하고 있다.

행여 산맥론에 반하는 내용을 발표한 이들은 학계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교과서를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산줄기를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긴 산줄기를 몇 년씩 땀 흘려 걸은 묵묵한 이들은 알고 있다.

야산 같은 못난 산줄기에서 만나는 우리 땅의 의미와 흙에 담긴 된장 같은 구수한 냄새를….

정직한 걸음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산꾼들만의 감동이 정맥 종주 속에 있다.

 

아직 달콤한 명산 찾기에 빠져 있다면, <월간山>이 감히 권해 드린다.

쓴맛, 단맛, 매운맛, 이상한 맛이 모두 담긴 우린 산의 진수, 정맥을 타라고 말이다.

 

-월간 "산" 2014.12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