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泉煎茶(돌 샘물로 차 끊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
天光如水水如烟 此地來遊已半年
良夜幾同明月臥 淸江今對白鷗眠
嫌猜元不留心內 毁譽何會到耳邊
袖裏尙餘驚雷笑 倚雲更試杜陵泉
(천광여수수여연 차지래유이반년)
(양야기동명월와 청강금대백구면)
(혐시원부유심내 훼예화회도이면)
(수리상여경뢰소 의운갱시두릉천)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이내 같도다.
이곳에 와서 논 지 이미 반 년
명월과 함께 누워 지내던 좋은 밤이 몇 번 이던고
남을 시기하는 것은 본래 마음에 없으니
좋다 궂다하는 말이 어찌 귀에 들어오리
소매 속에는 아직도 경뢰소 차가 남아 있으니
구름에 의지하여 두릉천으로 또 차를 끊이네
초의선사 (艸衣禪師 1786~1866) 행장(行狀)
서기 1786년(병오, 정조10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속성은 인동 장씨(張氏)이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이다.
초의는 그의 법호이며 그밖에 해옹, 자우산방, 휴암병선, 자하도인, 우사, 해상야질인,
일지암이라고 했으며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15세때,(1800년) 남평 운흥사로 들어가 대덕 벽봉민성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19세때, 영암 월출산에 혼자 올랐다가 때마침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일순간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경험하면서 깨달음(開悟)을 얻었다.
그 후 해남 대흥사 완호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법맥을 이었으며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선사는 22세때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며 더욱 탁마한 끝에 경율론 삼장에 통탈하였다.
연담 유일선사의 선지를 이어 받았으며, 지리산 칠불암에서 서상수계한 대은· 금담율사의
계맥을 전수 받고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 명산을 순례하였다.
일찍이 대흥사를 크게 일으킨 중흥조로서 13대종사에 이르렀고,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우리나라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선사는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다, 세수 81세(고종 3년 1866년) 법랍 65세를
일기로 대흥사 쾌년각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하였다.
선사의 저서로는 일생 동안 참선하는 여가에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일지암시고》와 일생동안 지은 소(疎) 기(記) 서(序) 발(跋) 제문(祭文) 영찬(影讚)등을 실은
《일지암문집》, 선의 요지를 밝힌 《선문염송》중에서 골자만을 가려 주석을 달아 놓은
《초의선과》,조선후기 선 논쟁으로 백파긍선의 선론에 반대의 입장을 밝힌
《선문사변만어》, 한국의 다(茶)경(經)으로 불리는 《동(東)다(茶)송(頌)
차의 지침서인 《다신(茶神)전(傳)》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