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던 선(禪)의 등불을 밝힌 한국의 달마 경허선사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해 9세 때 경기도 광주 청계사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4세 때 청계사에 머물렀던 박처사(朴處士)로부터 글을 배우며 재동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중
은사 계허스님이 환속하면서 추천한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만화강백(萬化講伯)을 찾아가
일대시교와 유교경전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23세 때부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서 크게 명망을 떨치다가,
31세 때 여름 옛 은사스님인 계허스님을 찾아뵈러 가던 도중 천안 인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 비로소 대발심하여,
동학사에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며 강원을 철폐하고
영운선사 (靈雲禪師)의 려사미거 마사도래
(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경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하였다.
(이후 이 말은 ‘무비공(無鼻孔)’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됐다.)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巖山下路)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이때가 고종 16년 1879년 11월 보름경이었으니,
한국근대선이 개안開眼하는 순간이며 한국불교가 중흥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2세 때 봄에 연암산 천장사 (天藏寺)로 옮겨 보림을 하여
1881년 6월 33세 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오도가(悟道歌)를 읊고 전등연원(傳燈淵源)을 밝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산에 꽃은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소부르고 말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방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
다행히 숙연이 있어 사람되고 장부되어 출가하고 득도하니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모자람이 없도다.
어떤 사람이 희롱해 말하기를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함을 인해서
그 말 아래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하고 형상도 공하여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항상 빛나더라.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눈앞은 외로이 밝은 적광토요,
정수리 뒷모습은 금강의 세계로다. ……
사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요, ……
눈에 부딪치는 대로 본래 천진면목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대법왕이 되었음이로다.
저 법에 모두 자재함이니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어찌 걸림이 있을까 보냐. ……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천장사・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하여 호서(湖西)일대에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며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으며,
영호남의 해인사・범어사・송광사 일대에도 유력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를 제접하면서 선을 중흥시켰다.
56세 때 천장암에 돌아온 경허는 만공에게 전법송(傳法頌)으로
후래불법(後來佛法)을 부촉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법회에서 법문하고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를 증명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앎은 적고 이름 높아 어지러운 이 세상에
알 수 없네 그 어디에 이 몸 감추랴
어촌인들 술집인들 어찌 그곳 없으랴만
숨긴이름 더욱 새로워질까 저어할 뿐인 것을.
1905년 57세 이후 경허는 삼수(三水)・갑산(甲山)・장진(長津)을 떠돌다가
강계군의 김탁(金鐸)의 집에 머물며 선비 박난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 박진사(朴進士)로 훈몽생활(訓蒙生活)을 하기도 하고,
관서와 관북 일대는 물론 만주지방을 비승비속 차림으로 떠돌며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계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어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조선왕조의 땅에 홀연히 나타나 투철한 깨달음으로
꺼져 가는 선(禪)의 등불을 밝힌 경허 큰스님.
현대 한국선불교의 맥이 경허선사의 제자들과 법손들에 의해
이어지며 다시 살아나고 있다.
世與靑山何者是 (세여청산하자시) 속세나 청산이 어찌 다름이 있으리오
春城無處不開花 (춘성무처불개화) 봄이 온 성 안에 꽃 안 피는 곳이 있겠는가
傍人若問惺牛事 (방인약문성우사) 누군가 惺牛(깨달은 소)의 일을 묻는다면
石女心中劫外歌 (석녀심중겁외가) 돌계집 마음속 바깥노래로 어수선하다 하리라
-경허 선사의 일화-
만공(滿空) 스님이 경허 선사에게 볼 일이 있어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누워 있는 경허 선사의 배 위에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었다.
만공 스님은 깜짝 놀랐다.
"스님, 이거 뱀 아닙니까?"
경허 선사가 말했다.
"가만 두어라. 내 배 위에서 실컷 놀다 가게."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서 49재(齋)가 있어 떡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때 경허 선사는 떡과 과일을 내다가 구경온 아이 어른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안 주지 스님은 노발대발했다.
"재를 지내고 난 뒤에 주어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주었느냐?"
그러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렇게 지내는 재가 진짜 재입니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등의 쌀 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길은 먼데 몹시 무겁고 피곤했다.
경허 선사가 말했다.
"무겁고 힘들지?" "예."
"그러면 빨리 가는 방법을 쓸 테이니 너도 따라와야 한다."
"어떻게 빨리 간단 말입니까?"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젊은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
경허 선사는 그 아낙네의 양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마을로 달려갔다.
이 소문이 곧 마을에 퍼지고 급기야는 몽둥이를 든 마을 사람들이 뛰어왔다.
"저놈들을 잡아라."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두 스님을 마을 사람들은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이윽고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쌀 자루가 무겁더냐?"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주지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먼 길을 단숨에 지나왔으니 말이다."
경허 선사가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경허 선사가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여러 안주를 들고 왔다.
이것을 맛있게 먹다가 만공 스님이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십니다.
파전도 굳이 먹을려 하지도 않지만,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스님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경허 선사가 대답했다.
"나는 술이 먹고 싶으면 밭을 갈아 밀을 심고 가꾸어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서 먹을 것이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하여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가꾸고 키워서 파전을 부쳐 먹겠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먼 길을 나섰다가 때마침 어느 고개에서 쉬고 있는 상여 행렬을 만났다.
경허 선사가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없습니다."
"술이든 고기든 아무거나 주십시오."
사람들은 별난 스님도 다 보겠다는 듯이 의아해 하면서도 망인(亡人)을 위해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상주는 부탁을 하나 했다.
"스님들의 자비로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경허 선사가 말했다.
"명당은 해서 무엇하는가, 죽으면 다 썩은 고깃덩이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느 날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과 길을 가고 있었다.
경허 선사가 만공 스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청불사(丹靑佛事) 권선(勸善)을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권선문을 만들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모은 후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만하면 단청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을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가 불사 시주금으로 술을 청했다.
만공 스님은 놀랐다.
"스님, 부처님을 팔아서 술을 마시다니 말이나 됩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술만 마시던 경허 선사의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겨울 추위 탓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경허 선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아, 이상 더 좋은 단청불사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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