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선사
조선 중기의 고승이자 승군장(僧軍將)
속가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이 휴정이다.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풍악산인(楓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묘향산인(妙香山人), 조계퇴은(曹溪退隱), 병로(病老).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평안도 안주출신으로 시조(始祖)는 완산(完山) 최씨(崔氏)이고,
어머니의 시조는 한남(漢南)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다음해 3월에 그를 낳았다.
3세되던 해 4월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하고
소중히 기르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홀연 자취를 감춘다.
그 뒤 아명이 운학이 되었다.
운학은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운학의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 마저 죽었다.
이때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와 있던 이사증(李思曾)이 슬픔에 잠긴
고아의 소문을 듣고 운학을 자기 처소로 부른다.
목사는 멀리 눈 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면서 운학에게 말한다.
“운(韻)을 부를 테니 시(詩)한 수 지어보겠니”
“제가 어찌 감히…”하고 겸양하는 소년에게 목사는 비낄 사(斜)자 운을 불렀다.
운학은 운을 듣자 즉석에서, 香?高閣日初斜 (향유고각일초사)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비끼니” 라고 응대했다.
연이어 꽃 화(花)자를 부르자 소년은 또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千里江山雪若花 (천리강산설야화)
“온누리를 덮은 눈이 꽃처럼 곱구나” 라고 읊었다.
목사는 운학의 비상한 재주에 탄복하면서 양아들로 삼았다.
이때 운학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목사는 얼마 뒤 내직(內職)으로 들게 되자 운학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취학(就學)시킨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 청학동(靑鶴洞),
칠불동(七佛洞)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운학은 처음 접하는 불교의 심원(深遠)한 세계에
마음이 이끌려 공부를 시작했다.
뒷날 숭인장로는 운학을 부용영관(芙蓉靈觀) 대사에게 소개한다.
영관은 이때 벽송지엄(碧松智嚴)의 법을 이어받아 지리산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운학을 한 번 보매 큰 그릇[法器]이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 들인다.
그렇게 3년여 행자 생활을 하면서 부지런히 경전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는 한편 참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 영관은 운학 행자의 막힘을 소통시켜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내렸다.
함께 떠났던 벗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운학만 홀로 선방에 머물며
뭇 경전들을 섭렵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이름과 형상에 속박되어
대자유를 누리는 해탈의 경지는 요원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운학은 문자 이면에 숨겨진 오묘한 가르침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시 한 수를 읊는다.
忽聞杜宇啼窓外 (홀문두우제창외) 홀연 들려온 소쩍새 소리에 창밖을 보니
滿眼春山盡故鄕 (만안춘산진고향) 봄 빛 물든 온 산이 모두 고향이고녀
며칠 뒤 운학은 또 다시 이렇게 읊는다.
汲水歸來忽回首 (급수귀래홀회수)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靑山無數白雲中 (청산무수백운중) 수많은 청산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운학은 이튿날 아침, 은도(銀刀)로 손수 머리를 깎고 서원한다.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문자나 외우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일선(一禪)대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석희(釋熙)법사와 육공장로(六工長老), 각원상좌(覺圓上座)를 증계사(證戒師),
영관(靈觀)대사를 전법사(傳法師),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계(戒)를 받았다.
이때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받으니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휴정스님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스님 회상에 참예, 인가를 받고
두류산(頭流山,智異山)으로 들어가 삼철굴(三鐵窟)에서 세 철을 나고
대승암(大乘庵)에서 두 철을 보냈다.
그리고 의신암, 원통암, 원적암, 은신암, 등 여러 암자에서 몇 년을 보내며 더욱 정진했다.
하루는 용성(龍城:전북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별마을[星村]을 지나다가
한낮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아 연거푸 두 수의 오도가(悟道歌)를 읊는다.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古人曾漏洩 (고인증누설)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今廳一聲鷄 (금청일성계) 오늘 닭우는 소리 들으니
仗夫能事畢 (장부능사필) 대장부 할 일 마쳤네
이어서 또 이렇게 읊는다.
忽得自家底 (홀득자가저) 홀연 제 집을 발견하니
頭頭只此爾 (두두지차이) 온갖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萬千金寶藏 (만천김보장)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元是一空紙 (원시일공지)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그리고는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명종 1년 (丙午,1546)가을, 갑자기 제방을 유력(遊歷)하고 싶은 생각이 일자
간편한 행장으로 길을 떠난다.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 풍악산(楓嶽山:가을의 금강산 이름) 미륵봉에 들어가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철[夏], 향로봉에서 한 철, 성불암(成佛庵), 영은암(靈隱庵),
영대암(靈臺庵)등 여러 암자에서 한 철을 나고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를 머물렀다.
이때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연산군 때 폐지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일으키고
승려들을 등용하는 승과(僧科)제도를 부활시켜 명종 6년(辛亥,1551)
11월 19일 첫 시험을 실시한다.
휴정스님은 주위 사람들의 권청에 못이겨 응시,
합격자 4백 6명 가운데 수석으로 급제하여 대선(大選)이 된다.
서른네 살 되던 명종 8년(1553) 1월 19일 나라에서 내린 도첩을 받고
주지명(住持名:中德)에 오른다.
이해 여름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 고향을 다녀온다.
36세 되던 명정 10면, 전법(傳法)이 되고 석 달 뒤에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되며
다시 석 달 뒤 그 해 가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된다.
이로써 승직의 최고 지위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된 휴정스님은
이듬해 보우(普雨)의 후임으로 봉은사(奉恩寺)주지에 취임한다.
스님은 여기서 1년 남짓 머물다가 어느날 주지나 판사 등의 명리가 출가의
본뜻이 아니라 여겨 눈병을 핑계로 모든 승직을 버리고 38세 되던 해
다시 지팡이 하나와 바리대 하나, 단벌의 옷만을 챙겨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천석간(泉石間)에서 반년을 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내은적암(內隱寂庵)에서
3년을 지낸 뒤 황령암(黃嶺庵), 능인암(能仁庵), 칠불암(七佛庵)등의 암자에서 3년을 머문다.
그리고 나서 관동지역의 태백산, 오대산, 풍악산을 거쳐 멀리 관서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관음전(觀音殿)과 내원(內院), 영운(靈雲), 백운(白雲),
심경(心鏡), 금선(金仙), 법왕(法王)의 여러 대(臺)와 아득히 너른 천지의 수많은 산천을
두루 편력하는 휴정스님의 몸은 마치 기러기털처럼, 풍운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휴정스님은 이렇게 명산대찰을 편력하는 동안 여러 편의 시를 읊었는데
금강산에서 지은 삼몽사(三夢詞)와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가 유명하다.
主人夢說客 (주인몽설객) 주인은 손에게 꿈을 얘기하고
客夢說主人 (객몽설주인)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今說二夢客 (금설이몽객) 지금 꿈을 얘기하는 두 사람
亦是夢中人 (역시몽중인) 그 모도 꿈 속의 사람일레
이렇게 삼몽사를 읊조린 휴정은 향로봉으로 올라가 세상의
온갖 명리(名利)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시 한 수를 짓는다.
萬國都城如蟻 (만국도성여의)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千家豪傑若醯鷄 (천가호걸약혜계)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一窓明月淸虛枕 (일창명월청허침) 맑고 그윽한 달빛 베고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 (무한송풍운부제) 끝없는 솔바람은 묘음(妙音)을 연주하네
(향로봉 시는 뒷날 역모(逆謀)의 혐의를 사게 된다.)
휴정스님은 일체의 승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뒤 자신의 빛을 갈무리하여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는 이는 날로 늘어났다.
이 무렵 이른바 ‘기축(己丑)의 옥(獄)’이라 불리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기도가 조정에 알려져
그 일당은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했으나 역모에 가담한 무리 중에
승려 출신이 많은데다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절이라는 점이 불교계를 난처하게 했다.
이때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無業)이라는 이가
휴정스님의 ‘향로봉시’를 들어 마치 모반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도 끌어들여 관련이 있는 듯이 무고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은 휴정은 묘향산에서, 유정은 강릉에서 각각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된다.
휴정스님은 비록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잡히긴 했으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으며
말은 분명하고 조리 있었다.
선조는 휴정의 억울함을 간파, 즉시 석방하게 한 뒤 휴정스님의 시집을 열람하고는
뛰어난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며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수를 지어
하사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葉自毫端出 (엽자호단출)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근비지면생)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月來難見影 (월래난견영)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風動未聞聲 (풍동미문성)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이에 휴정스님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瀟湘一枝竹 (소상일지죽)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聖主筆頭生 (성주필두생)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山僧香處 (산승향처) 산승의 향불 사르는 곳에서
葉葉帶秋聲 (엽엽대추성) 잎마다 가을 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이 시를 보고 또 한 수를 지어 휴정스님에게 내린다.
東海有金剛 (동해유김강) 동해변 금강산에서는
雄賢幾種胎 (웅현기종태) 얼마나 많은 인걸이 나왔던가
高名山斗仰 (고명산두앙) 태산 북두처럼 높은 이름
今世是如來 (금세시여래) 오 늘의 여래이어라
휴정스님은 임금의 시에 대해 또 답시를 짓는다.
寂照非千世 (적조비천세) 세상 일 잊고 존재의 실상을 조견하나니
虛靈豈入胎 (허영기입태) 허령한 진면목 어찌 윤회(輪廻)에 들랴
金剛山下石 (김강산하석) 금강산의 돌들은
大小自如來 (대소자여래) 모두 크고 작은 여래이어라
선조는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한 뒤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 14일 상륙한 왜군(倭軍)은 삽시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맹렬한 기세로 북상(北上)했다.
사세가 위급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해 마침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휴정이 생각나 좌우에 그의 소재를 묻고 시급히 찾아오도록 명한다.
이때 휴정은 묘향산에서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했다.
선조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나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경은 부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주오….”
휴정스님은 울면서 다짐한다.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보살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 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휴정스님의 충성에 감동한 선조는 즉석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을 물러나온 그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모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줄곧 억압 받아온 승려들이었으나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는
의승병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강원도 관동지역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權慄)장군을 도와 행주(幸州)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휴정은 직접 문도를 1천5백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선조 26년(1593) 10월, 의승병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의 복구작업을 폈다.
의승병들의 전공을 시기한 유신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나라 조정과 명군진중 및 적진에까지 휴정의 이름은 떨쳤다.
명나라군의 총지휘자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비롯,
삼협총병(三協總兵)이하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글월을 보내 휴정의 전공을 치하했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송은 또 송시(頌詩)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보냈다.
無意圖功利 (무의도공리) 공리에 관심 없이
全心學道仙 (전심학도선) 불도만 닦더니
今聞王事忽 (금문왕사홀) 나라일 위급하매
摠攝下山嶺 (총섭하산령) 산을 내려왔네
선조 27년, 휴정스님은 사직할 뜻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나이 팔십, 이제 근력이 쇠하였아오니 군사를 제자 유정 및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인장을 반납하고 신이 본래 머물던 묘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이에 임금은 그의 뜻을 아름다이 여기고 늙음을 민망히 여겨 떠나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號)를 내렸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휴정스님은 또다시 유유자적한 본래의 한도인(閑道人)이 되었다.
선조 37년(甲辰, 1604) 1월 23일,
휴정스님은 원적암(圓寂庵)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 따라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휴정스님은 눈발 속에 견여를 타고 가까운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찾아 다니며
부처님께 절한 뒤 방장실로 돌아왔다.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한 뒤 부처님전에 향을 사른 다음
스님은 법상에 올라 마지막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후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影幀)에 시 한 수를 쓴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 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 고녀
그리고는 유정과 처영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5세, 법랍 나이 67세였다.
기이한 향내가 방 안에 가득하여 사라지지 않더니 삼칠일(21일) 뒤에 비로소 그쳤다.
제자 원준(圓俊), 인영(印英)등이 다비한 뒤 영골 한쪽과 사리 2과를 습득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봉안했다.
또 정골 한 조각은 제자 유정(惟政), 자휴(自休) 등이 봉산(蓬山:蓬萊山)으로 받들고 가
그에서 사리 몇 과를 수습하여 유점사 북편언덕에 봉안했다.
제자들은 1천여 명에 달했고 그중 당대에 이름을 떨친 스님만도 70여 명이었으며
특히 두각을 나타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대종사급 인물들도 4~5명이었으니
가풍의 융성함을 알겠다.
저서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
《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 《청허당집》8권, 《회심곡(回心曲)》1편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1630) 문인 언기(彦機), 의경(儀), 쌍흘(雙)등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에게
비석글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
인조 9년(崇禎4, 1631년) 봄, 문인 태능(太能, )원철(圓徹), 해안(海眼)등이
계곡(谿谷)장유9張維)에게 비석글 짓기를 구걸하여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대둔사(大屯寺)에 비석을 세웠다.
그 이듬해(壬申, 1632) 가을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전남 해남의 두륜산 대둔사(大屯寺:大興寺)에 보관시켰다.
대둔사에는 의승대장 황금가사(黃錦袈裟) 한 벌, 홍금(紅錦)가사 한 벌,
백금(白金) 장삼 한 벌, 벽옥의 바리대[碧玉鉢] 3좌(座), 가죽신[唐鞋] 2켤레,
검은 거문고[烏瑟]와 염주 두가지, 옥사자(玉獅子) 모양의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의승과 합격증서[紅牌] 1장, 낙산사 주지 임명장 1장,
유점사 주지 임명장 1장 등의 휴정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제자 영잠(靈岑)대사가 휴정의 삼년상[三年服]을 마친 뒤
메고와 보관한 것으로 휴정스님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휴정스님은 임종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적한 뒤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둔산에 보내어 보관케 하라고 당부했었다.
뒷날 나라에서는 임진란에 공이 큰 의승장(義僧將)들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념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때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사명당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의 표충사(表忠祠)다.
여기에는 휴정, 사명, 영규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대둔사에 있던 휴정의 법손(法孫)들은 크게 개탄했다.
휴정이 입적한 뒤 1백85년 되던 해 정조 12년(乾陵 戊申, 1788)
대둔사 스님 계홍(戒洪)과 천묵(天)은 글을 올려 임금께 탄원했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대둔사에 대사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릴 수 있게 사당을 세워달라는 요지였다.
이에 임금은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할 것을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는 한편 사명(四溟)과 뇌묵(雷)을 좌우에 배향(配享)토록 했다.
이듬해(己酉, 1789) 4월 위령제(慰靈祭)를 봉행함에 조정에서는
예조정랑(禮曺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향(祭享)에 참석하게 했다.
홍문관 수찬(修撰) 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祭文)은
휴정의 충의(忠義)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 옛날 임진년 왜구들 침략할 제
불교계의 충의는 휴정이 으뜸이라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인륜을 다했고녀
지혜의 칼 빼어들고 서편으로 달려가니
의로운 이들 그를 따랐네
명군과 함께 난리를 평정하고
어가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돌아오니
공훈 더욱 빛났어라
당시 임금 공로 기려 하사한 글 찬란커늘
어찌하여 표충사는 유정을 우선했나
머물던 옛 절 웅대한 새 사당 지어
법풍을 세우고 공로를 권장하니
뭇 사람 청에 따른 임금의 윤허일세
편액과 제물 내리신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에
외진 남녘 사람들 어깨 으쓱하니
비록 승려지만 존경스러워라.
또, 승지 정약용(丁若鏞)이 쓴 상용제문(常用祭文)에서도
휴정스님의 충의는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선정과 지혜 모두 탁월하고 충성과 의리 다같이 융성하여라
큰스님 나라 위한 의거 두 제자가 가풍이었네
수많은 왜적 사로잡으니 임금은 그 공적 적게 했네
솥과 제기에 기록 새겨지고 제물 풍성하도다
봄빛 완연하매 사모의 정 더욱 간절하여라
영가들의 천도를 위해 임금님의 은전이 내려졌네.
삼가 홍제존자사명당선사(弘濟尊者泗溟堂禪師)와
우세존자뇌묵당선사(佑世尊者雷堂禪師)를 좌우에 모시고 배향한다.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이 <표충기적비(表忠記蹟碑)>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정조 18년(甲寅, 1794),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西山大師畵像堂)의
명문(銘文)을 지을 때 서공(徐公: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알려진 것이다.
다섯 집의 복호결(復戶結)과 보솔(保率) 30명으로 하여금 제향을 지내도록 했다.
고종 8년(同治10, 1871)
그동안의 재정적 지원을 끊고 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토록 했다.
제문은 구계각안(九階覺岸)이 지었다.
대둔사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연화경(蓮華經)》 1권과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연화경》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손수 쓴 것이고
병풍은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것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스님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스님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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