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정호(石顚 鼎鎬 1870~1948)선사
법명(法名)은 “정호(鼎鎬)”, 법호(法號)는 “영호(映湖)”,
시호(詩號)는 “석전(石顚)”이다.
1870년 음력 8월 18일 전라북도 완주군 초포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명석해 보고 들은 것은 모조리 기억했으며,
성정이 침착하고 조용하여 혼자 있기를 즐겼다.
17세 되던 해 어머니가 생사법문을 들려준 것을 계기로 발심하여
19세에 전주(全州) 위봉사(威鳳寺)에서 금산(錦山)화상에게
계를 받고 정호(鼎鎬)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우연히 만난 자칭 “일장춘몽도인(一長春夢道人)”의 독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운문암에서의 함명(涵溟) · 경붕(景鵬) · 경운(擎雲) 세 스승과의
만남은 스님의 시 “비 속에 눈발 속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庚寅春已暮 雲門訪幻師 (경인춘이모 운문방환사)
一夏讀棱楞 不下雙溪陲 (일하독릉릉 불하쌍계수)
八月渡曹溪 三老坐參差 (팔월도조계 삼노좌삼차)
擎雲當座主 俊七列墨池 (경운당좌주 준칠열묵지)
霽峰對錦峰 在敏及贊儀 (제봉대금봉 재민급찬의)
以爲法筵首 文質彬一時 (이위법연수 문질빈일시)
경인(庚寅)년 봄도 저물어, 운문(雲門)을 찾아가 환응(幻應)스님 만났네.
한 여름 능엄경을 읽노라고, 쌍계언덕을 내려갈 줄을 몰랐네.
8월에 조계를 건넜는데, 세 노인이 한가하게 앉아 있더군.
경운스님이 웃어른으로, 먹 글씨를 한참들 쓰고 있는데.
제봉(霽峰)과 금봉(錦峰)스님이 마주보고 있고,
재민(在敏)과 찬의(贊儀)스님이 훤출 하더군.
쓴 글발이 번지르르 뛰어나더군. (이하 생략)
정호스님은 당시에 세 스승을 만나 ≪능엄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고, 붓글씨에도 관심을 두었던 모양이다.
스님의 어록에 실린 글씨 또한 글발이 번지르르 막힘 없이 뛰어나다.
선교일치(禪敎一致)와 3백여 편이 넘는 시를 통해 보여 준
선시일여(禪詩一如)의 기초를 이때 마련한 듯하다.
그렇게 정호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서 승려로서의 기초 교육을 마치고,
1892년 순천(順天)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擎雲)화상에게 대교과를 이수한 뒤
석왕사, 건봉사, 산계사 등지를 돌며 참선 정진했다.
1895년 스님은 백양사 인근의 구암사에 주석하던 설유 처명(雪乳處明)스님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전법제자가 된다.
스승 설유선사는 조선 후기 선교양종(禪敎兩宗)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 亘琁,1767~1852)선사의 법맥을 계승한 제자인데,
설유(雪乳)선사로 부터 영호(映湖)라는 법호를 받고 개당하니
법맥으로는 서산대사의 17세, 백파선사의 8세 법손이다.
백파스님이 동시대의 석학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서신으로 오고 간
삼종선(三種禪)에 대한 논쟁은 이후 1백여 년 동안
불교계 공통의 화두가 되기도 하였다.
백파스님 문하의 선교일치(禪敎一致) 가풍은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종(宗)으로 삼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은
친히 조사(祖師)께서 말한 바가 아니라 선가의 한 유파(流派)의 공안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무식한 무리들의 호신부(護身符)가 되고 졸렬함을 감추는
큰 일산(日傘)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역대 조사나 선사들도 한동안 경전을 탐독하였다 하여
선 일변도의 수행풍토를 엄중하게 경계하신 것이다.
그후 스님은 교학을 기반으로 전주 대원사를 비롯해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해인사, 범어사, 법주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불법을 강론하셨다.
그러다가 한일합방을 2년 앞둔 1908년에는 불교 유신과 민족 자주의
뜻을 품고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불교유신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이회광(李晦光) 등 일부 친일 승려들이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결탁해 조선불교를 예속시키려는 목적에서 “원종(圓宗)”을 추진하자,
1911년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송만암(宋曼庵 : 1876~1956),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진진응(陳震應), 오성월(吳惺月 : 1866~1943)
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다.
당시 석전스님은 “이 땅에서 태를 받고 비와 이슬을 받아 자란 몸이니
아무리 출가사문이라고 한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을 저버릴 수 있느냐”며
친일승들의 매종역조(賣宗易祖)를 민족적 차원에서 단죄하고자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고 본산제를 실시해 그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이회광 등 친일승려들이 재차 일본 임제종과 결탁해 한국 불교의
왜색화를 꾀하자 석전스님은 보다 대중적인 불교 유신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라는 잡지를 인수해 “해동불보(海東佛報)”로
제호를 바꾸고 창간호를 내는 등 적극적인 집필 활동에 나섰다.
석전스님은 “해동불보” 창간호에서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해동불보”를 왜 발간하는가.
우리나라 불교가 날로 쇠퇴함을 염려해 세계를 향해 그 빛을 떨치고자 함이라.
석전스님의 필치가 워낙 신랄하여 “당신의 직언을 받아들일 자가 현재의
암흑 불교계에는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유신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개진해 오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더 노력해야 한다면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민족 불교를 살리는 일은 오직 종교인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에서 그는 동국대학의 전신인 불교고등강숙의 숙사(塾師),
중앙학림의 교장으로 일하는 등 교육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매사에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이었던 만해(卍海)화상도 석전스님에게는
자문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3ㆍ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명단에
실수로 석전스님의 이름을 누락시킨 것을 늘 송구스러워 했다.
석전스님은 1919년 4월 23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전국 13도 대표가 모여
노령, 상해에 이오 한성에 임시정부를 출범시킬 때 지암화상(이종욱) 등과
동참하여 민족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기개를 두고 만해화상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서문을 굳이 석전스님에게 부탁하는 등, 그를 각별히 대접했다.
만해의 석전에 대한 흠모는 그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一天明君君何在 (일천명군군하재) 맑은 달 같으신 당신 어디 계시뇨
滿地丹楓我獨來 (만지단풍아독래) 단풍 가득한 숲 속에 나 홀로 있네
明月丹楓雖相亡 (명월단풍수상망) 맑은 달과 단풍 설령 잊는다 해도
唯有我心共排徊 (유유아심공배회) 내 마음은 항상 그대 그릴 뿐이네
석전스님의, 속명은 박한영(朴漢永)이다.
석전이라는 아호는 추사 김정희가 지어서 백파선사에게 건네주며
앞으로 크게 될 후손에게 전하라고 한 3개의 아호 중 하나이다.
스님은 주로 아호인 석전으로 불렸는데, 당대 석학들의 태두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전스님은 불교에 대한 강설은 물론, 시문과 경사자집(經史子集),
노장학, 서법에서도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자연 세간의 학자나 석학들도 석전을 따르고 존경했다.
위당 정인보는 일찍이 그를 가리켜 「시문에는 깊은 사상이 깃들여 있고,
참선 하실 땐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시다.
또한 한번 설렵하신 바는 하나도 열거치 못하는 바가 없으니 놀라울 뿐이다」
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도 「스님의 햅가하심은 내외전(內外典 : 불교와 그 이외의 학문)을
뀌뚫어 내가 감히 미칠 바가 못된다」고 흠모했다.
스님과 가까이 교제한 석학 중에는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안재홍 등이 있고,
가르침을 받은 인물은 청담, 운허, 청우, 운기, 경보 등 부지기수에 이르며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조종현 등도 모두 그의 후학에 해당한다.
석전스님은 몸담고 있던 중앙학림이 1922년 승격 문제로 휴교하는 사태에 이르자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법석을 차리고 유싱 교육의 고삐를 다시 조였다.
중앙학림리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호 승격되자
석전스님은 다시 교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에는 새로 발족된 조선 불교의 교정으로 추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 불교계 최고의 지도자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님은 늘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당시 그의 사회적 위상에 구애받지 않고 늘 구차한 행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루는 석전스님이 위당 정인보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에 들러 묵기를 청했다.
석전스님의 의상이 하도 남루하여 걸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 였기에
지객(知客 : 손님을 맞이하고 보살피는 자리) 소임을 보던 승려는
다른 곳으로 가보라며 문전박대를 했다.
석전스님은 그렇다면 노숙이라도 해야겠다고 하자, 이를 보다 못한 위당이
「이분이 누구신 줄 아시오. 바로 조선 불교의 교정(敎正)이자 중앙불전의 박한영 교장이시오.」
라고 밝히자 승려들은 당황하여 백배사죄하고 부랴부랴 영접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석전스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스님의 암루한 행색이 의도적 행동이나 무애행 따위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그의 성정에서 비롯된 일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진속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했지만 한시도 계율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하루도 좌정하여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날이 없었던 대선사였던 것이다.
석전스님은 불교인의 시대적 자각을 특히 강조했다.
나라가 기울고 불교가 노후하게 된 원인은 모두 교단 내의 교육이 참되지 못하여
그 역할을 제대로 봇했기 때문이라는 지론을 펼쳤다.
궁실을 드나들며 집권자와 가까이해 그 혜택을 입으려고 정신을 팔아온
역사가 불교를 망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스님은 이렇게 잘못되어 있는 불교를 유신시키는 방법은,
첫째 참다운 계정혜(戒定慧,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3학이라고 함)를 갖추고,
둘째 이타행을 실천하며,
셋째 학교 설립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넷째 포교 방법의 현대화를 꾀하며,
다섯째 얻어먹는 불교에서 생상 불교로 전환하고,
여섯째 임민에 대한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올바른 포교의 방향에 대해서도 미신 포교를 지신(智信) 포교로,
이론 포교를 실천 포교로, 과장 포교를 실질 포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0년대, 석전스님은 조선불교계의 가장 높은 어른이신 교정(敎正)을 맡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종정(宗正)스님이신 셈이었다.
또한 스님은 대원불교강원 강주스님이셨고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前身)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석전스님은 당신이 대원불교강원에서 가르친 젊은이들 가운데 학업을 계속 시킬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제자들의 학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이 당시만 해도 학생이 부업을 할 만한 업소도 없었거니와 막노동할 자리도 별로 없었다.
석전스님은 생각 끝에 제자 몇 사람을 데리고 효자골 최남선의 도서관 일남각을 찾아갔다.
육당 최남선이 깍듯이 모셔들였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 하셨습니까요, 스님?”
“육당에게 복 짓는 기회를 좀 만들어 주려고 그래서 일부러 왔지.”
“어이구 스님, 저를 위해서 일부러 오셨다구요?”
“그래. 자네, 이 아이들 일을 좀 시키고 학비를 좀 대주시게나.”
“일을 시키고 학비를 대 주어라, 그런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그래. 이 아이들 책을 베껴 쓰는 일을 시키면 아주 똑 부러지게 잘 할 걸세.”
“아 예 잘 알겠습니다요 스님.”
이 무렵, 육당 최남선의 사설 도서관 일남각에는 귀중한 옛 책을
빌리러 오는 선비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책을 복사할 수 있는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필요한 책은
일일이 사람 손으로 베껴 쓰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도서관 일남각에서는 책을 베껴주는 서생이 몇 명 일하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아르바이트생인 셈이었다.
책 한 페이지를 철필로 베껴 주면 1전이요, 책 한 페이지를 붓으로 베껴주면 3전을 주었다.
석전스님은 바로 이 아르바이트 일을 제자들에게 구해 주고 그 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의 일자리를 구해 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일자리 구해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스님은 또 생각다 못해 쓸만한 젊은이 한명씩을 데리고 직접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석전스님은 이재복 학인을 데리고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법륜사로 대륜스님을 찾아 갔다.
“아이구, 교정스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큰걸음을 하셨습니까?”
“아 이 서울 장안에서 큰 일 한 가지를 부탁하려면 대륜스님 밖에 더 있겠소이까?”
“원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을요. 그래 큰일이시라면?”
“좋은 일에 돈을 좀 쓰십시오.”
“좋은 일이라 하시면…?”
“저 아이, 장차 쓸만한 물건인데 스님께서 학비를 좀 대주셨으면 해서 데려 왔습니다.”
“예? 하, 학비 말씀이십니까?”
“우리 불교계에 큰 인물이 될만한 젊은이입니다.”
“알겠습니다. 교정 스님께서 데려 오셨을 적에야 쓸만한 사람이겠지요.”
“도와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교정 스님의 높으신 뜻이신데요…”
이렇게 해서 석전은 제자 한 명, 또 한 명을 후원자에게 묶어 주어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스님 문하에서 스님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는
대전의 보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이재복을 비롯해서 시인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이광수, 오장환, 김달진, 청담, 운허, 서경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석전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스님이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인물이 바로 서정주.
가출 청년이었던 서정주는 당시 톨스토이에 흠뻑 빠져 있던 ‘톨스토이 주의자’였다.
그래서 석전스님은 서정주의 별명을 “똘스또이 청년”이라 불렀다.
일제는 중앙불전을 혜화전문으로 개칭하는 것을 기화로,
민족 자주를 내세운 석전스님을 파면 조치하고
대신 일본인 교장을 취임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석전스님은 할 수 없이 1940년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중앙불전을 떠났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해,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운사 대원암을 떠나 정읍의 내장사로 향했다.
당시 주지를 맡고 있던 매곡스님이 스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이거 큰스님께서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오셨습니까?”
“아 이 사람아, 늙은 중 오고 가는거 소리 소문 없어야 자네들이 편하지.”
“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스님.”
“잠깐만. 내 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지스님 대답부터 들어봐야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스님?”
“나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는데, 그래도 주지스님 귀찮지 않으시겠는가?”
“예에? 여기서…세상 뜨시겠다구요?”
“그래. 나 여기서 세상 떠도 괜찮으시겠는가?”
“그…그야 스님 뜻대로 하셔야지요.
아무튼 저희는 잘 모실테니 어서 안으로 드시기나 하십시오.”
“고맙네. 그럼 내 마음 편히 이 절에서 지내다 세상 뜨려네.”
그리고 스님의 뜻대로 그 해 음력 2월 스무 아흐렛날 바로 그 내장사에서
학처럼 훨훨 열반의 세계로 날아가셨다.
근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도안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으로
불교와 민족의 유신을 꾀했던 커다란 물줄기 석전스님은 마침내 그 삶의 육신을 벗었다.
이때 스님의 나이 76세였고, 법랍은 61세였다.
본명(本名)인 “박한영(朴漢永)”으로도 널리 알려진 석전스님은 후학들이
바른 불교인, 사대를 이끌어 가는 불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평생 힘을 쏟아 부었던
선지식이며, 뛰어난 지성으로 당대 석학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사(禪師),
율사(律師), 강사(講師)의 면모를 두루 출중하게 갖춘 불교계의 거목이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석전스님은 당대의 고승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웠다.
스님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현장체험하기 위해 1924년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 등의 명찰을 수차례 답사했고,
특히 한철학과 한국학의 본향인 백두산에는 일곱 번이나 올랐다.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후일 최남선이 고육지책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바로 석전 스님의 백두산 등정 강설이다.
석전스님께서 백두산에 올라 읊으신 한시(漢詩)
曉日天池浴 (효일천지욕)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해
虹霓斷復連 (홍예단복연)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 (광풍취뢰급)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 (탕파서봉연)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구나.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탐사하며 남해안 일대를 답사할 때
다도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읊으신 한시(漢詩)
多島亭亭映日斜 (다도정정영일사) 다도해 곳곳마다 노을 빛 쏟아지니
姻雲錯落似奇花 (인운착락사기화) 저문 구름 붉게 피어 한 송이 꽃처럼 지고
波光岸影隨帆轉 (파광안영수범전) 파도 빛과 뭍 그림자 돛배 따라 흐르니
身世蒼凉等落霞 (신세창량등락하) 이 내 몸 쓸쓸하여 저녁노을과 한가지네
~석전 스님이 정읍 내장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화~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아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이같이 스님은 쉬운 말로 지계(持戒)의 뜻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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