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전 금오(太田 金烏 1896~1968)선사
1896년 7월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동래 정씨인 부친
용보(用甫)와 모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號)는 금오(金烏), 휘(諱)는 태전(太田)이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았지만 뜻이 다른 데 있어 공부에는 열성이 없었다.
금오스님이 태어났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격동의 연속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개혁으로 온 나라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억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반봉건체제 하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야욕은
조선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유년시절을 보내며 16세 되던 해에 형으로부터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꾸지람과 함께 매를 맞고는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하느냐.”며 집을 나와
강원도 금강산 마하연선원(摩訶衍禪院)에서 도암긍현(道庵亘玄)선사를
은사 및 계사로 모시고 출가를 하였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산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덕사의 보월(寶月)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금오스님은, 보월선사에게 그 동안 공부한 경계(境界),
즉 득처(得處)와 견처(見處)를 다음의「게송」을 통해 여실히 털어놓았다.
透出十方界 (투출십방계) 시방세계 투철하고 나니
無無無亦無 (무무무역무) 없고 없는 게 없는 것 또한 없구나
個個只此爾 (개개지차이)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覓本亦無無 (멱본역무무)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
그러자 금오스님에게 이미 경계가 있음을 한 눈에 간파한 보월선사는
그 자리에서 인가한 후 사법제자(嗣法弟子), 즉 자신의 법을 이은
상수제자(上首弟子)로 삼았다.
그 후 2년간 만덕사(萬德寺)에서 확철대오를 위한 정진을 거듭하며 엄격한
지도를 받던 중, 스승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부법제자(付法弟子)의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되자, 문손(門孫)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만공선사가
제자 보월선사을 대신해 친히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보월선사의
사법(嗣法)임을 증명하는 건당식(建幢式)을 봉행했다.
德崇山脈下 (덕숭산맥하) 덕숭산맥 아래
今付無文印 (금부무문인) 무늬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寶月下桂樹 (보월하계수) 보월은 계수나무 아래 내리고
金烏徹天飛 (금오철천비) 금오(金烏)는 하늘 끝까지 날으네.
그 때부터 10여 년간 깨달음의 경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보임의 운수행에 들어간
금오스님은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법거래를 나누고 때로는 승속의 경계를 넘나들며
확철대오를 위한 만행을 걸림없이 감행했다.
이후에도 금오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는데,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는데, 그 세계에서
신분이 노출된 금오스님을 일컬어 사람들은 “움막중”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40세 때인 1935년 김천 직지사(直指寺) 조실을 맡아 전법의 회상을 여니
전국의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며, 그 후에도 안변 석왕사(釋王寺),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칠불선원(七佛禪院),
동화사(桐華寺) 선학원(禪學院) 등 전국 유수의 선방에서 조실로 주석하며
상당법문(上堂法文)과 격외법어(格外法語)로 후학을 제접했는데,
납자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엄격하기가 추상과 같아 “호랑이 보다 무섭다”는
평판이 자자할 만큼 칼날 같은 수행력으로 불조의 심인을 전했다.
금오선사는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오로지 참선 정진과 선풍 진작을 본분으로 삼았던 금오선사 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승단의 문제에도 외면하지 않아 1954년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시작되자,
분연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전국 비구승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
승단 재건에 참여했으며,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부처님 법에 승단은 청정한 것인데 대처승이 생겨 승단이 없어졌다.
이것을 제불보살과 역대 조사 앞에서 항상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 부끄러움을 면하자는 것이 정화불사(淨化佛事)이다.
또 승단을 재건, 이 나라 불교를 정화해서 참다운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구현해 보자는 것이다.
이번 정화불사에 실패하면 무슨 면목으로 세인이 보는데 머리 깎고 승복차림을 하고 다닐 것인가.
잘되면 떳떳이 승단재건에 진력하고, 그렇지 못하면 세상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가서
다시는 세상을 보지 말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참선공부만 하자.”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청계사(淸溪寺)에 머물며 석장을 놓았던 금오선사는 입적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1967년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로 주석처를 옮긴 후, 이듬해 1968년 10월 8일
월산(月山), 탄성(呑星), 월성(月性), 월고(月古) 등 문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는
상수제자인 월산(月山)에게 제반사를 맡긴다는 부촉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
는 말을 남기고 세수 73세ㆍ법랍 5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1975년 법주사에 금오선사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금오선사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는데,
“선리가 없다면 불법의 명맥이 끊기는 것이며,
참선하지 않는 자는 중이 아니다”이란 믿음 아래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또 금오선사는 철저한 무소유로 일관하셨는데
‘수행(修行)은 마음의 가난에 이르는 길이며, 수행자는 물질적 가난을 먼저 실천해야 한다.
물질적 가난이 전제되지 않고는 정신적 가난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수행자에게 가난은 더 없는 축복이다.’는 생각으로 출가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걸식을 했던 석가모니의 행장을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수행자가 관념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한 금오선사는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법거래를 즐기고 만행을 통해 자기 경책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만공선사와 쌍벽을 이루던 대선사 수월(水月)선사의 회상에 참석하기 위해
만주까지 구도행을 몸소 실천한 근세의 마지막 수좌이자 이 시대의 선객이다.
제자로는 불국선원의 조실인 월산(月山)스님을 비롯해서 월주(月珠)스님, 월탄(月誕),
월산(月山), 월성(月性), 노천 월하(老天 月下 :1915~2003), 월고(月古), 월조(月照) 등
‘월(月)’자로 시작하는 승려들이 모두 그의 문중(門中)에서 나온 제자(弟子)들이다.
그리고 이 분들에게서 다시 법을 이은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금오선사께서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승려라 함은 세상만사(世上萬事)를 헌신짝같이 던져 버리고 수도(修道)로써 그 목적을 삼을 뿐이요,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출가자(出家者)의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주지를 사는 것으로 장기(長技)를 삼는 주지승(住持僧)이 있는가 하면,
사무승(事務僧)이 있고, 무사방일승(無事放逸僧)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승명(僧名)이 대두되고 있다.
우리의 승려된 본지풍광을 잃어서야 그 주지의 직무와 사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승단의 수행 기풍을 바로잡고 법통을 세우려는
금오선사의 간절한 염원을 엿볼 수가 있다.
스님은 사찰 모두에서 그 절에 재직하는 스님들이, 수행 및 살림살이에서,
한국 조사 선불교의 정통 그대로, 조계가풍(曹溪家風)의 청정함을 보여줌으로서,
‘선수행’에 있어서 불교적․사회적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당위를 설파한다.
그래야만 승려 개개인, 더 나아가서 승단이 ‘세속화’, ‘타락화’ 되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에도 선(禪), 둘에도 선이며, 셋, 넷, 열, 백,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와
항하사(恒河沙)가 다할 때 까지도 선뿐임을 부처도 말했고 조사(祖師)도 말했다고…
그리고 금오선사는 조계가풍에 대한 견처(見處)를 그대로 내어 보인다.
스님에 의하면 모든 부처님과 조사는 오직 참선 수행하여 오도(悟道)하였고,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에 대한 제도도 간화선을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길을 등지고 그 진리를 말살하는 자는 불법문(佛法門) 중의
마구니이며, 불법문을 알지 못하는 이며, 중이라는 의미도 모르는 중이며,
거짓 사람인 것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한다.
이러한 스님의 철저한 간화선 일문의 가르침은, 조계종의 정체성과
작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주 간절(懇切)하고도 곡진(曲盡)하다.
또 금오선사는 평생을 통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바로 볼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진정한 선사로서의 진면목이 있다.
스님에 의하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체만법이 그 마음을 좇아 생기기도 멸하기도 한다.
따라서 마음을 관하는 자는 죽고 사는 데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관하지 않는 자는 생사에 영원히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이치가 모두 마음이 움직이는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스님에 의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역대의 모든 조사들과 천하의
납승들 모두 ‘마음의 근원’을 깨닫고자 하는 것으로 공부의 요체(要諦)로 삼았다.
심지어 팔만대장경도 마음 일자(一字)를 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공부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이 선사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러한 마음공부에 대한 견처(見處)는 문집 《꽃이 지니 바람이 부네》곳곳에서 발견된다.
금오선사에 의하면 마음은 만법의 근원이자 만화의 주체이기 때문에
마음공부 없이는 불법의 진리를 도저히 체달할 수 없다.
모든 불교의 경론(經論)과 제불제조(諸佛諸祖)의 공부도 마음을 밝히려는 것이며,
그 공부를 통한 공덕으로 마음법을 전하여 중생의 우매한 마음을 깨우쳤다.
따라서 불교 공부는 마음으로서 대종(大宗)을 삼아야 한다.
스님에 의하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해서만 창조되며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주관세계인 마음과 대상인 객관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 세계는 다만 마음이 주(主)가 되어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소유자는 만법(萬法)의 주가 되고 선악제법(善惡諸法)을 능히 창조할 수 있다.
금오선사의 이러한 입장은 순전한 정신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삼계는 마음으로 주가 되었으니 그 주인을 찾으라.
마음을 관하는 이는 해탈을 얻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는 길이 죽고 나는 세상에 빠지리라.”라는
주장이나, “삼계가 마음으로 주인이 되었으니, 일단 마음 고향에 돌아가서 주인공만 찾고 보면
지옥이 변해서 극락이 되고 육근이 변해서 육바라밀이 되고, 대지가 변해서 불국토가 되어
두두물물에서 부처님을 친견하여 수륙고혼이 일시에 성불할 것이다.”라는 등의
선사의 주장에서 더욱 그 뜻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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