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진종(龍城 震鐘 1864~1940)선사
1864년 5월8일 전북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相奎)이며,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9세 때부터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고 한다.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느낀바 있어 남원 교룡산성(鮫龍山城)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으로 찾아가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79년 16세 되던 해에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극락암(極樂庵)에서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상허혜조율사(相虛慧造律師)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경북 의성 고운사(孤雲寺)에서 수월선사(水月禪師)로 부터 첫번째 깨우침을 받고,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서 무융선사(無融禪師)로 부터 두번째 깨우침을 받았다.
21세가 되던 1884년 스님은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칠불암(七佛庵) 대은율사(大隱律師)의 맥을 이었다.
그 뒤 지리산 금강대(金剛臺)와 순천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庵)에서
『전등록(傳燈錄)』을 보다가 세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23세 되던 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선산 모례정 근처에서
용맹결사 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金烏千秋月 (금오천추월)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洛東萬里波 (낙동만리파)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漁舟何處去 (어주하처거)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依舊宿蘆花 (의구숙로화)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그 후 전국의 명승(名勝) 대찰(大刹)을 두루 찾아 다니며 수행 정진하면서 불법을 깨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등록』·『기신론(起信論)』·『화엄경(華嚴經)』·『선요(禪要)』·
『범망경(梵網經)』 등 불경을 고루 섭렵하였다.
그렇게 스님은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수행법을 행하면서 불법을 깨우치고,
또 고승(高僧) 대덕(大德)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국 불교의 종맥을 확고하게 다져 갔다.
1903년 묘향산 상비로암에서 처음으로 수선회(修禪會)를 개설하고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할 때 였다.
강백인 금봉(錦峰)스님이 용성스님에게 물었다.
“남전선사가 고양이 목을 자른 말을 하면서 조주선사에게 물었더니
조주선사는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남전선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있었더라면
오늘 고양이 목을 베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스님의 뜻은 어떠하시오.”
용성스님이 답했다.
“문 앞에 선 한 그루 소나무에 까마귀가 날아가자 까치가 와서 앉았습니다.”
그러자 금봉스님은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이후 용성스님은 혜월(慧月). 만공(滿空)스님 등과 법담(法談)을 나누며
선열(禪悅)의 기쁨을 같이 나눴다.
서산 천장암을 거쳐 덕숭산 정혜사에서 혜월스님을 만난 후 두 스님이 주고 받은 문답이다.
혜월스님이 물었다.
“선사는 어디로부터 오셨습니까?”
“천장암에서 왔습니다.”
혜월스님이 목침을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말했다.
“목침입니다.”
혜월스님이 목침을 한쪽으로 밀쳐놓고는 다시 물었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소.”
“모든 부처님이 광명을 놓은 곳입니다.”
범부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지만 두 선지식은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공부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44세 때인 1907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가 약 2년 동안 중국의 5대 명산과
북경 관음사· 통주 화엄사· 숭산 소림사· 조계산 남하사 등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고승들을 만나 문답하며 견문을 넓혔다.
1910년 합방의 경술국치를 당하자 지리산에서 나와 서울에 선종교당을 짓고
본격적인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지금까지는 개인적 수행과 산중에서의 참선을 통하여 득도에 힘써 왔으나,
이 때부터는 속세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한
중생구제에 나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민족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또 그를 위한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인식한 까닭으로 보인다.
1911년 상경하여 우선 신도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 해 4월 스님은 종로구 복익동(鳳翼洞)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여
본격적으로 대각교 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스님이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 대각교 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
는 것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삶의 문제와 괴리된 채
산중(山中) 불교화되고, 또 개항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왜색화(倭色化)되고 있던
기존 불교를 개혁하여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각교 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장이었고, 만해 한용운(韓龍雲)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생과 상의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당시 천도교의 최린(崔麟),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3·1운동을
앞장서 추진하던 만해 한용운은 2월 25일경 용성스님을 뵈러 대각사로 찾아왔다.
그는 스님에게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니 참여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평소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중생구제의 일환으로 여겨오던 스님은
흔쾌히 승낙하고는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날인할 인장을 꺼리김없이 내주었다.
그리고, 3.1 운동 당시 태극기 사용을 제안한 것도 용성스님이다.
만해스님이 “흰 바탕에 푸른색의 대한 반도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천도교와 기독교장로회측에서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용성스님은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서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고 역설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한 배경에는 스님의 이 같은 뜻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천도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계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이로 인해 스님을 비롯해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를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에도 스님은 일본인 판사가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이 취지에 찬성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떳떳하게 대답하였으며, 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스님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스님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을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와 같이 경무총감부에서던, 법정에서던 조금도 조국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호국불교의 신념을 표출하였다.
때문에 스님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에도 선생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실현하며,
그를 통해 어떻게 중생구제와 민족 독립의 역량을 쌓아갈까 고심하였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용성스님이 얻은 결론은 불경의 한글화 작업이었다.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가 가을 됨을 아는 것이니,
세계 인류는 생존 경쟁을 하고, 경제의 파탄은 극도로 되어 가는 시대에
누가 한문에 뇌를 썩이어 수십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공부하리오.
비롯 수십년을 공부할지라도 한문을 다 알고 죽는 자는 없을 것이며,
다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장래에는 무용의 학문이 될 것이니 무엇에 쓰리오.
오늘날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을 가지고 수십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문명발달의 장애만 될 것이며, 설사 수십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서
큰 문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중국 사람들은 중국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글이 적당할 것이니
남녀 상중하가 보면 즉시 아는 것이라 보급되기 편리하리니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평소 스님은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를 확대하고,
나아가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과 호국불교의 전통을 발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역량을 증대할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3월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스님은 이 시기 사원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우리들이 안일에 취하고 게으름에 빠져 도덕을 닦지 아니하고
개인의 이익만 얻고자 하여 시주(施主)에게 아부하니 막중한 성전이
무도장(舞蹈場)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보면 경솔하고 거만한 마음이 일어나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료라 아편독과 다름없다 하니
우리 불교가 과연 이러한 것인가.
나는 조석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바이다.
오늘날 불공이나 시식을 하여 먹고 생활하고자 하나 천하대세가 달라졌다.
이것은 몇 년이 못되어 끊어질 것이니 하루 빨리 깨달을 지어다.”
스님은 이 같은 사원경제의 난맥상을 청산하고, 나아가 일제하 우리 민족과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기 위해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불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갔다.
1922년 중국 만주의 간도성 연길현 명월촌(明月村)과 봉녕촌(鳳寧村)에
각각 70정보의 농지를 마련하여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스님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이주하거나, 혹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에 시달리다가 남부여대(南負女戴)하여 이주한 우리 동포들을
불러 모아 농사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에서 유랑 걸식하던 우리 동포들의 생활의 기초를 세워주고,
이들에게 불교의 포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면서 조국 광복의 초석을 놓아 갔다.
국내에서도 스님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白雲山)에
임야 300여 정보를 확보하고, 그 주변의 전답을 구입하여 화과원(華果圓)을 개설하였다.
여기에 수 만주의 과수를 심게하여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일하는
선농일치의 불교운동을 벌여 갔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힘겨운 사원경제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민족경제의 회복과 독립운동 자금의 조성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4년부터 박한영(朴漢永) 등과 함께 『불일(佛日)』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행하고,
여러 도시에 포교당과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수시로 선회(禪會)를 열어
불교 대중화운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해 갔다.
특히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요(日曜)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들에 대한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당시 범람하고 있던 외래 종교와 진종(眞宗), 일련종(日蓮宗), 조동종(曺洞宗) 등
일본 불교로부터 어린이들을 보호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립케 하고,
또 한국 불교의 전통을 전파함으로써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열어 가려는
스님의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때 스님은 모든 불교 의식과 염불을 우리말로 하고, 모두 함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불가(讚佛歌)도 직접 작사·작곡하여 손수 풍금을 연주하면서 포교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포교 방식의 현대화에도 힘썼다.
이 시기 일제는 일선(日鮮) 동화 정책과 민족문화말살책의 일환으로
한국 불교에 대한 왜색화 작업을 가속화시켜 갔다.
즉 일제는 승려들의 대처식육(帶妻食肉)과 음주솔가(飮酒率家)를 암암리에 조장하고,
나아가 주지 자격에 비구계(比丘戒)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뜻을 같이 하는 비구승들과 함께 1926년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스님은 조국과 민족에서 동떨어진 산중(山中)불교가 아니라, 그와 아픔을 같이 하는
현실 불교를 추구하였는데 그 실마리를 대중불교와 호국불교의 전통을 지닌 한국 불교에서 찾았다.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양산 내원사 만일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옮겼다.
또 ‘왕생가’라는 제목의 한글 찬불가도 만들었다.
“불타님의 자비원력 남무아미타불,
도우시고 증명하사 남무아미타불,
일심으로 염불공덕 남무아미타불,
극락인도 하옵소서 남무아미타불”
조선의 독립은 교육과 교화(敎化)를 통해 민족이 깨쳐야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 용성스님 생각이었다.
1935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면서 살신성인을 당부했다.
해방 후 대각사를 찾아 스님 진영에 예를 올린 김구 선생은
“큰스님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어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1940년 음력 1월21일 용성스님이 대각사에서 제자 동헌스님을 찾았다.
“이제 절단 나버렸구나. 쇠에서 녹이 슬어 쇠가 상하게 되었구나”
스님은 같은 해 2월23일 동헌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내일 새벽 관음재일에 가련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구나. 더욱더 수고해 다오.”
2월 24일 스님은 목욕제계(沐浴齊戒)한 뒤, 제자들을 불러 놓고
“수법제자여, 시자여, 대중이여, 그 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미소를 보이며 원적에 들었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諸行之無常 (제행지무상)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萬法之俱寂 (만법지구적)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匏花穿籬出 (포화천리출)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閑臥麻田上 (한와마전상)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이 때 스님의 나이는 77세요 법랍은 62세였다.
만해스님이 찬(撰)한 사리탑이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있다.
정부에서는 용성스님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1990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저서로 <용성선사어록> <귀원정종> 등이 있다.
스님은 생전 동산(東山), 동암(東庵), 동헌(東軒), 인곡(仁谷), 운암(雲庵),
혜암(慧菴), 소천(韶天), 고암(古庵), 자운(慈雲)스님 등 ‘용성문하 구제(九弟)’라 불리는
제자를 두었는데, 모두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룬 선지식들이다.
용성스님은 망국시대를 산 불교적 선각자였다.
그런 만큼 스님의 전 생애는 망국의 민족 속에 펼쳐진 '각'이라고 하는
한 글자의 광휘(光輝)로 시종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불교운동이 조직력을 통하여 사회적 힘으로 작용될 수 있음을 안 까닭에
대각교라는 독립된 교단을 세워 각성의 조직적 발휘를 기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교단의 조직화 내지 발전은 큰 성과를 거두려는 직전에 입적하였다.
스님의 대각운동이 교단적 조직으로 몇 가지 이유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어도
용성스님이 지향한 불교운동의 방향은 길이 불교교단의 한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일정치하 종교시책에서 대처승이 용납되고 파계승이 종단을 점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용성스님의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은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으로 다시 불붙어
허다한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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