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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여행

2017.5.21 금정산/하늘릿지

일자: 2017.5.21

산행코스: 호포역~희망공원~임도~하늘릿지~고당봉~금샘~북문~금성동

인원: 홀로

GPS거리: 9.85  널 널/4시간30

 

지하철2호선 호포역 2번출구로 나와 호포새마을로 향하는 지하도를 따른다.


호포2반 새마을 갈림길에서 좌측이다.


금호사(金湖詞)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연안이씨 사당이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중시조(中始祖) 판소부감공(判小府監公) 이현려(李賢呂) 15세손인,

금호공(琴湖公) 이수생(李秀生)의 향사를 봉행하기 위하여 1810(순조 10) 연안이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1810년 건립된 후 1860년 금산리로 이축하여 향사를 올려왔으나,

당시 전국적으로 서원, 향사에 대한 철폐가 확산되자 잠정적으로 철향하였다.

1945년 문중의 결의에 의하여 다시 향사를 봉행하게 되었으나,

1993년 사당 부지가 도로 확장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1994 2월 가산리에 이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지칭개


찔레꽃


꿀풀


등로는 호포마을희망공원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큰금계국


멍석딸기


이후 등로는 계곡을 우측에 두고 이어진다.



오월의 신록   -천 상병-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노루발풀


씀바귀


금정산둘레길 임도에 오르고~


우측으로 10m가량 진행하면 하늘릿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좌측으로 계곡을 끼고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후 계곡을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이 바위를 우측에 두고 오르고~


이 바위는 좌측으로 우회한다.


로프가 걸린 큰 바위지대


올라서니 다시 떨어지고~

지나온 바위지대는 직접 오르지 말고 우측으로 우회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여래입상갈림길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바위전망대


낙동강. 백두산. 신어산. 무척산


물금신도시. 오봉산. 토곡산


일명. 통천문


하늘릿지가 열리는 문이다.


기암



바위눈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저런 구멍이 뚫어질까???


바위구멍이 등로다.


좁은 바위구멍을 통과하면 좌우측으로 큰 바위군이 계속된다.


기암


잠시후 산죽길로 내려서고~

다시 올라서면 들쑥날쑥한 바위군을 만나는데, 이러한 길이 몇 차례 반복된다.


로프지대


로프를 잡고 몸을 바짝 당긴후 엉덩이를 바위틈에 올리면 쉽게 올라설 수 있다.


올라와서 바라본~


지나온 하늘릿지…


금정산 산사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기암괴석들이 멋진데~


“천구만별”(千龜萬鼈·천 마리의 거북이와 만 마리의 자라)으로 불리는 기암괴석이다.


팥배나무


기암



일명. 개뼉따귀바위


하늘릿지 정상부


금정산 고당봉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이 음각된 벼랑


땡겨보고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 높이 12m.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윤곽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둥글고 봉긋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희미하다.

눈썹은 깊이 새겨 뚜렷하게 남아있으나 눈은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코는 큰 편이며 입은 작고,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어깨는 약간 각지게 나타내었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 어깨로 가로지르는

한 단의 옷섶이 비교적 둥근 사선을 그리기 때문에 가슴이 많이 드러나 보인다.

무릎 아래쯤에는 두 줄의 완만한 V형을 그리는 법의 끝단이 남아있으나

불상을 표현한 각선(刻線) 매우 얕고 가는데다 마모가 심하고 바위 여러 곳에 균열까지 있어

천의(天衣)의 형태나 세부 주름 표현을 자세히 알아 볼 수 없다.

수인(手印) 또한 명확히 알아볼 수 없는데 오른손은 가슴부근까지 들어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린 표현으로 짐작된다.

광배(光背)는 알아볼 수 없으나 대좌는 단판의 꽃잎을 선각한 연화대좌로 추정된다.

표현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부분이 거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여 분명히 알아볼 수는 없으나

상호의 표현이나 각진 어깨선 그리고 거구의 신체에 생략된 선들과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표현들에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영남알프스땡겨보고~


낙동정맥 주능선이다.


족도리풀


병꽃나무


금정산 고당봉이 지척이다.


금정산은 부산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산세지만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이 이루어져 있어,

부산시민들의 모태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했던 탓인지 곳곳에 기암절벽이 절묘하고, 크고 작은 금정의 봉우리들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곳에는 넓은 분지를 형성해 자리한 금정산성 마을이 있다.

산성마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금정산성안 촌락으로 산 정상에 서서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왜 국내 최대규모의 산성을 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 하류 대저 땅과 북의 양산지계까지 내려다 보이고,

동으로 수영강과 회동저수지, 온천천, 동래읍성지역 등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탓에

왜구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 있었으니 금정산성과 마을의 역사와 전설은

곧 호국의 이념으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암




금정산 고당봉


시민의 모금으로 건립된 새로운 정상석이다.


금정산 북릉일대. 그리고 천성산…


사방으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조망을 충분히 즐기고~

금샘을 보러 되돌아 내려간다.


금샘오름길


금샘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범어사 창건설화가 시작된 곳이다.


금샘


금정산은 곳곳이 불교와 관련된 기도터로서 불교성지이다.

금정산 이름도 금샘과 관련이 있고 금샘은 범어사 창건 유래와 관련이 있다.

신라 흥덕왕 때,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왕이 근심하고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華嚴神衆祈禱)를 하면 왜인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이 그에 따라 하였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왕은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범어사의 사찰명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구체적으로 나오며,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巖)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에 샘이 있으며 그 물빛은 금색에다 물속에 범천의 고기가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당봉


장군봉


계명봉…


원효봉


고당샘


고당봉 옛 정상석


1994.12.23 금정산 고당봉에 건립된 정상석인데, 2016.8.1 천동.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시

낙뢰로 파손된 것을 이곳 금정산 탐방관리소 공터에 옮겨 보전하고 있다.


대중가요. 금정산


금정산성 북문


고당봉 뒤로 뭔가 떨어지는 것 같다.


솜방망이


미나리아재비



금정산성 [金井山城]


사적 제215. 둘레 1 7,336m, 높이 1.5~3.2m.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으로서, 지금은 4㎞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처음으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금정산성은 조선시대에 중축한 것이다.

1703(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 있는 동래부의 방비를 위해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둘레 9,011,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4문이 있는 산성을 쌓았다.

그 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둘레 5,643의 중성(中城)을 쌓고, 시설을 보강했다.

1806(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서·남·북 문루를 다시 쌓으니, 그 길이가 32리였다.

산성의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고, 수구문. 보루. 암문 등이 설치되었다.

성 안에 국청사(國淸寺). 해월사(海月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국청사만 남아 있다.

1972년에 동문과 남문,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망루가 복원되었다.


멍석딸기



파류봉(파리봉)…


금정산막걸리공장


금성동 산성마을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부산교육원 자리에 아문리(亞門里)라는 마을이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산성리(山城里), 영조 16(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각면각리원근정도조에,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18()라 하였고, 순조 32(1832)에 나온

<동래부읍지>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라 하였다.

1914년의 부군(府郡) 폐합 때 산성리를 금성리(金城里)로 개칭한 듯하다.

이는 1899년에 발간된 <동래부읍지> 방리조에 ‘北面 山城里 距官門十八里’라 기록된 것이,

1937년에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 읍면동리조에는 구포면 금성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행마무리를 하고

근처 식당에 계모임이 있어 그곳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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