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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마이 라이프

2022.6.10 포항.호미곶 해맞이광장 탐방

답사일자: 2022.6.10

코스: 호미곶 해맞이광장 일대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대중교통 이용)

부산 개금집에서 노포동.동부시외버스터미널으로~

포항行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방향/버스정류장에서 포항900번 버스타고 구룡포항 일본인가옥거리/버스정류장에 하차,

다시 포항9000번 버스 환승하여 호미곶해맞이광장/버스정류장에 하차한다.

 

 

해파랑길 포항15코스 답사를 위해, 도착지인 호미곶.해맞이광장 버스정류장에 도착, 

'호미곶 해맞이 광장' 안으로 들어간다.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호미곶 해맞이 광장' 일대 볼거리를 간략하게 둘러 본 내용을 정리한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 

 

 

 

호미곶 해맞이 광장은 새 천년 한민족 해맞이 축전 개최 장소로 약 48,000㎡의 부지에 새 천년기념관,

상생의 손,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세오녀상, 햇빛 채화기, 공연장, 주차장 등이 있으며, 광장 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 단지에는 매년 4월~5월경에 만개하는 유채꽃밭의 노란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광장 중앙 멀리에 상생의 손 두 개가 보이고, 좌측 편에 고래 형상의 공연 무대와 그 앞으로

26m 높이의 호미곶 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호미곶(虎尾串)

한반도의 최동단,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장기곶(長鬐串)'이

2001년 12월 29일 '호미곶(虎尾串)'으로 공식 변경됐다.  

'곶'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리 모양의 육지다.

16세기 조선 명종 때 천문과 역학 및 풍수지리학자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산수 비록(山水秘錄)'의

'영남 명승 명당 비기'에서 당시 장기현의 끄트머리인 오늘날의 포항 호미곶을 장기고을(장기현)의

명승 명당으로 '호미등(虎尾嶝)'으로 기록하면서 이곳이 '호미(虎尾)'로 불리는 단초가 되었다.

그는 한반도를 앞발을 치켜든 호랑이 형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 백두산은 코에 해당하며 운제산맥 동쪽 끝인 호미곶은 꼬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꼬리 부분을 국운이 상승하는 명당으로 친 것은 호랑이는 꼬리를 축으로 삼아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한반도 호랑이가 만주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의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 작가 미상)'가 제작되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조선상식' 지리 편에서 이곳의 일출을

'조선십경(朝鮮十景)'으로 선정하였으며, 우리나라가 연해주를 향해 앞발을 치켜들고 발톱을 세운 채

포효하는 위풍당당한 호랑이 형상으로 한반도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른바 '맹호형국론'이다.

호미곶은 조선 철종 때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고, '달배곶[冬乙背串]'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18년 '장기갑(長鬐岬)'으로 바꾸면서 토끼 꼬리로 낮춰 불렀다.

정부는 1995년 일본식 표기를 바꾼다는 취지에서 장기곶으로 변경하였다가, 2001년 다시 호미곶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포항시는 2010년 조례를 통해 행정 명칭도 '대보면'에서 '호미곶면'으로 변경했다. 

 

 

한반도가 토끼 모습을 닮았다는 말은 일제가 퍼뜨렸다.

1905년 조선통감부가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지리학자의 '산맥 체계론'을 교과서에 실으면서

조선인을 나약한 민족으로 깎아내리려고 한반도 모양을 연약한 토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양을 토끼로 묘사한 고토 분지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이태리는 외형이 장화(長靴)와 같고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에서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된다.

조선인 사이에는 자신의 나라 외형(外形)에 대해 가상(假想)의 모습이 있다.

그들은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 게 마땅하다'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은 지식계급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일청전쟁(日淸戰爭) 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호미곶의 아픈 역사

조선시대에는 호미곶을 포함한 호미반도(虎尾半島) 전체가 장기현(長鬐縣, 옛 포항시의 지명)에 속했다.

그때의 장기는 나라에 필요한 말들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을 뿐 풍토가 사납고 거칠며 기후마저 불순하여

‘샛바람에 말이 얼어 죽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몹쓸 땅이었고, 구만리(九萬里)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정치와 문화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에겐 구만리처럼 멀게 느껴지는 변방이었다.

이런 땅이 왕조시대에 쓰이는 길은 단 하나, 유배지로서였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이웃 고을 영덕과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한 바 있으며, 흔히 다산 선생의 유배지라면

강진(康津)을 떠올리지만 그분이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시작한 곳도 바로 여기 장기현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1800년 정조가 죽자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老論 僻派:

정조의 탕평책에 반대한 파벌)는 1801년의 신유교옥(辛酉敎獄, 천주교 탄압 사건)을 빌미로

남인계 시파(詩派)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하게 되었고, 다산은 그 숙청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귀양길에 올라 3월 9일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터진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강진으로 이배(移配) 되니, 그는 여덟 달 가까이 장기에서 유형의 시간을 보낸 셈이다.

호미곶에서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인물이 또 한 사람 있는데,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이다.

그는 호미곶과 죽변곶(竹邊串, 경북 울진 죽변항) 두 곳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동해로 튀어나왔는지를 재려고

죽변과 장기 사이를 일곱 차례나 오갔다고 한다.

그 결과가 대동여지도에 정확히 반영되어 호미곶이 더 튀어나오게 그려졌음은 물론이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두 번 죽임을 당하였다.

1894년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 대한 제국의 '황실파' 관료)에 의해 피살된 뒤 그 시체가

청국 정부에 의해  국내로 송환되어 양화진(楊花津,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안(北岸)에 있던 나루터)에서

다시 온몸이 여섯 토막 나는 능지처참을 당하여 전국에 효시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왼팔이 버려진 곳도 여기 호미곶 앞바다였다.

이유는 동해로 튀어나온 호미곶의 지세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씁쓸한 역사다. 

 

 

 

돌문어 조형물 

 

 

 

호미곶의 대표 특산물인 돌문어를 형상화한 조형물로, 야간에는 광섬유를 활용한

화려한 조명으로 관광객들에게 포토존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호미곶 새천년기념관 

 

 

 

호미곶 새천년기념관은 새 천년 국가 지정 일출 행사 개최를 기념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통일 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2009년 12월 28일 개관하였다.

지하 층과 1, 2, 3층 및 옥상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전시실로 ‘창조도시 포항’의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변천사를 다양한 영상과 사진 패널 모형 디오라마를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2층은 ‘포항바다화석 박물관’으로 수만 년 전 지질시대 바다에 살았던 생물체의 화석 2천여 점을 현생대와

과거시대를 비교해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하여 놓았는데, 전시장 안은 사진촬영 금지구역이다.

3층은 ‘한국 수석 포항 박물관’으로 다양하고 신비로운 대자연의 예술품 수석들을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옥상 전망대는 호미곶의 장엄한 일출과 탁 트인 동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동해안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고, 개관시간은 09:00 ~ 18:00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 

 

 

 

지름 3.3m, 깊이 1.2m, 둘레 10.3m로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 축전 행사 관광객들에게

새해 아침 떡국 대접을 위해 특수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솥이다.

떡국을 끓이는데 사용할 연료로 장작 8톤 정도로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해 불을 때고

직접 떡국을 저어 보는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포스코에서 제작 설치한 '영일만 친구들' 작품 

 

 

 

직사각형의 대형 철판에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군상(群像) 모습을 파내거나 그려 넣은 조형물로,

행복한 일상과 건강한 삶으로 충만한 '영일만 친구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 모습을 파낸 곳에 관광객들이 들어서서 동일한 모습의 포즈를 취한 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포토존(photo zone)이다. 

 

 

 

 

연오랑세오녀상(延烏郞細烏女像)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에 동해 가에 연오랑세오녀라는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 고장의 해와 달 설화의 주인공이며 금슬 좋은 부부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높이 8m의 연오랑세오녀 청동상(靑銅像)’이 해맞이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두 사람이 정답게 마주 보며 딛고 있는 좌대는 두 사람을 일본에 싣고 간 바위를 암시하고,

바닥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하며,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을,

그리고 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한 선진문물인 비단을 의미한다고 한다.

 

 

신라 제8대(第八代)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초(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가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세기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의 소왕이고 진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 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요.」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상생의 손 & 새 천년의 빛  & 불씨함 

 

 

 

‘상생의 손’은 새 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19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 만인 그해 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 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이 있으며,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하는데, 새 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로서 화해와 상쇄의 기념 정신을 담고 있다.

 

 

상생의 손 앞으로 '새 천년의 빛' 성화대 조형물과 그 앞의 세 개의 불씨함.

불씨함 뒤편으로 '햇빛 채화기'가 자리하고 있다.

 

 

불씨함

새 천년 준비 위원회는 1999년 12월 31일 서해안 변산반도에서 마지막 일몰 때 채화된 ‘마지막 불씨’와

2000년 1월 1일 포항 호미곶의 일출 시에 채화한 '시작의 불씨’, 2000년 1월 1일 독도 해상과 날짜 변경선이

통과하는 남태평양 피지에서 채화한 ‘지구의 불씨’를 합화(合火)한 ‘영원의 불씨’를 이곳 해맞이 광장

불씨함에 보관하고 있다.

 

 

좌측(남쪽)에 변산반도 불씨, 중앙에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씨, 맨 우측(북쪽)에 독도 불씨와

남태평양 피지섬 불씨가 합해진 불씨함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새 천년의 빛

영일만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돋는 곳입니다.

여기 이 「영원의 횃불」은 새 천년이 시작된 2000년 1월 1일 이곳 영일만 호미곶의 첫 햇빛으로 채화하였습니다.

이 불은 변산반도에서 채화한 지난 천년의 마지막 일몰 불과, 남태평양의 피지섬에서 채화한 새 천년의 일출 불과

함께 조국의 평화통일과 사해동포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불로 존치될 것입니다.

조형물의 형태는 묵은 천년을 나타내는 아랫부분의 사각뿔과 새 천년을 상징하는 윗부분의 역사각뿔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영원과 화합을 뜻하는 원형의 고리로 연결됨으로써 지난 천년과 새 천년의 연속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횃불의 화반(火盤)은 이와 같은 새 천년의 빛과 정신을 사방으로 확산하는 태양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장의 왼손과 동쪽 바다의 오른손은 전쟁과 갈등과 배타적인 지난 천년의 「한 손의 시대」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과 번영으로 온 인류가 화해하고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새 천년의 「두 손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조형물은 300만 경북도민과 52만 포항시민의 여망을 담아 이의근 경북지사와 정장식 포항 시장의 제안으로

조각가 영남대학교 김승국 교수가 제작하였고 이어령 새 천년 준비 위원회 위원장의 적극적인 지원과

대구은행의 협찬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 1월 1일 아침 -안내 표지석 내용-

 

 

 

 

햇빛 채화기 

 

 

 

새 천년 준비 위원회가 과기부 Sun-Shine 21팀과 공동 기획하고 선문대학교

차세대반도체연구소에 의뢰하여 제작한 4개의 체화기 중 하나이다.

반도체가 내장된 고감도 센서가 해넘이ㆍ해돋이 때 미세한 햇빛의 적외선을 감지하여

이를 열로 변환시키는 세계 최초의 채화기이다. 

 

 

 

 

해맞이 광장 끝 바닷가의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조형물 

 

 

 

2009년 1월 1일 시 승격 60주년을 기념해 호미곶 광장에 호랑이 모형의 조형물을 설치되었다.

높이 6m, 폭 3.5m의 이 호랑이 조형물은 한반도를 형상화하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으로,

시 승격 60년을 의미하는 60마리의 호랑이 군상도 12m의 받침대 위에 함께 설치되었다.

호랑이 조형물의 재질은 스테인리스로 낮에는 백호의 이미지, 밤에는 컬러 조명을 활용해 훨씬 화려해진다. 

 

 

 

 

호미곶 등대 -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 

 

 

 

이 등대는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일본 선박이 대보리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 것을 계기로 세워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1908년 12월에 준공되었다.

높이 26.4m의 팔각형으로 서구식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기초에서부터 등탑의 중간 부분까지 곡선을 그리면서 폭이 점차 좁아지는 형태이며, 다른 고층 건물과는 달리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은 것이 특징이다.

등대 내부는 6층으로 각 층의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李花]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거꾸로 가는 시계 

 

 

 

'거꾸로 가는 시계'는 현재 시간에서 다음 해 1월 1일 호미곶 일출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초(秒) 단위로 알려주어 '되돌아 봄'과 '나아감'을 제시하는 시계라 한다.

 

 

 

 

바다쪽의 오른쪽 상생의 손 

 

 

 

'해돋이 전망대' 

 

 

 

호미곶 돌문어 

 

 

 

2008년에 시작된 호미곶 문어 축제는 이곳의 문어 어획량을 대변한다.

2011년 국내 위판 물량 10,421톤 가운데 12%인 1,242톤이 포항에서 잡혔고, 대보항에서 500여 톤의 문어가 잡혔다.

특히 대보항의 문어는 거의가 참문어 중에서도 해안가 갯바위에서 잡히는 돌문어들이다.

대보항 주변 바다는 암초와 갯바위가 많은데, 수심 1m의 바닷속 갯바위에 돌문어들이 수두룩하다.

대보에서는 돌문어라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왜문어다. 지역에 따라 참문어라 부르기도 한다.

깊은 물속에 사는 커다란 문어와 다른 종이다.

대보항의 문어잡이는 해안가에서는 12월부터 다음 해 6, 7월까지 진행된다.

수온이 20도 정도로 오르는 6, 7월이 되면 돌문어는 깊은 바다로 서식지를 옮긴다.

20도 정도의 수온에서 서식하는 오두발이가 대보항 주변에 나타나면 어민들은 해안의 돌문어 잡이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오두발이는 이곳에서 약문어로 부르는데, 곶감이나 대추를 넣고 삶아 먹으면 중풍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다.

주로 해녀들이 4~5m 바닷속의 갯바위에 서식하는 것을 손으로 잡는다.

7월 이후부터 11월까지 문어가 깊은 바다로 이동하면 큰 배들은 문어를 쫓아 먼바다로 나간다.

연안에서의 조업은 주로 통발을 이용하며 정어리를 미끼로 사용한다.

정어리 냄새를 맡은 작은 문어들이 통발로 들어오고, 그 후 큰 문어가 정어리나 그 작은 문어를 먹기 위해 들어온다.

‘문어는 문어를 가장 좋아한다’는데, 힘센 문어가 다른 문어나 생선을 먹을 때 내장부터 먹는 습성이 있다.

거기가 가장 연약하고 치명적인 부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동지철에 나는 문어를 ‘약’이라 부를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겨울 문어를 최고로 친다.

돌문어는 15도 이하의 온도를 좋아한다.

갑자기 물이 차가워지면 바위틈에서 나오지 않고 배가 고프면 제 다리를 뜯어먹으며 버틴다.

‘문어 제 다리 뜯어먹는다’는 말은 실제로 문어의 습성이다.

돌문어를 잡아보면 다리가 짧은 놈들은 다 자기 다리를 뜯어먹은 것들이다.

문어의 다리는 다시 자란다.

 

 

 

테크다리 끝에 넓고 둥근 '희망의 해돋이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나침판과 어린이 동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이가 가르키는 손 방향이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