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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마이 라이프

2022.10.1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탐방

전날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아들네 집에가서 하루를 보내고~

2022.10.1 am05:50 아들네 집에서 출발.

경부고속도로, 상주영천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극락암'에 상주하고 계신 '석장 스님' 친견하고~

잠깐 시간을 내어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 주차장 입구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문수성지 표지석

'상원사' 입구 '관대걸이'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줄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요."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 동자상이며, 목욕을 할 때 관대를 걸어두었던

그곳이 지금의 관대걸이다』

오대산 '선재길'로 진행하면...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다.

'오대산 상원사'

'상원사 문수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산록에 자리한 '상원사'는 목조 문수동자좌상을

모신 주 전각 '문수전'에 딸린 '영산전'과 '청량선원', '범종각' 정도가 고작인 소박한 사찰이다.

가람의 규모가 작은 탓에 흔히 '월정사'의 산내 암자 쯤으로 인식되지만 숱한 고승을 배출해온

1200년 신라 고찰이자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겐 ‘한국 최고의 범종’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으로 인해 잘 알려진 사찰이다.

불교계에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에,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문수신앙이 보태져 수행하는 운수납자(雲水衲子)와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지이다.

원래 오대산의 산명(山名)은 처음 산문을 연 개산조인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꿈속 게송을 받고 돌아와 절을 창건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자장 스님'은 중국 오대산에서 한 노 스님으로부터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 땅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말과 함께 가사와 발우 한벌, 부처님 정골사리를

받고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귀국해 '월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상원사'는 한참 후인 성덕왕 4년(705)에 두 왕자인 보천·효명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진여원(眞如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당시 오대산은 오류성중(五類聖衆),

즉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삼국유사)

당시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보천태자에게 신문왕의 후계를 권했지만 보천태자가 한사코

거부해 결국 효명태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여러 모습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세운 것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사'다.

이 설화를 뒷받침하듯 지금도 오대산에는 '상원사'를 중심으로 '중대 사자암', '동대 관음암',

'서대 염불암', '남대 지장암', '북대 상두암(미륵암)'이 포진해 있다.

이 오대 중에서 '상원사'가 있는 중대는 바로 오만 보살신앙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상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적멸보궁'과 '상원사동종'.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란 뜻.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한다.

국내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 모두 다섯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는데 불교계는 '상원사'의 '적멸보궁'을 가장 먼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는 ‘천하의 명당’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정식 사리탑은 없고 최근 증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 뒤쪽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상징물이 서 있다.

문수전 앞 마당 작은 건물 안에 달려 있는 '상원사동종'은 종소리와 청동 합금, 주조기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종의 모범.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비천상을 비롯한 의장(意匠)과 우아한 문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종의 마멸과 훼손을 막기 위해 타종을 중단해 지금은 아쉽게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윤2월조와 경북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 6권´에 따르면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5년(725년)에 제작되어 안동의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조선 예종1년(1469년)에

이곳 '상원사'로 옮겨왔다.

죽령을 넘을 무렵 종이 너무 무거워 애를 먹던 중 종유(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돌려보내자

종이 수월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원래 종의 동서남북 사방 면에는 각각 9개씩 36개의 종유를 만들었는데 1개가 없어진 35개만

남아 있어 흥미롭다.

'상원사'에서 특이한 것은 불교 중흥기인 고려대엔 사찰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오히려 숭유억불책을 썼던 조선조에 왕실의 각별한 비호와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던 태종은 만년에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을 정도였다.

특히 세조와 관련된 흔적은 사찰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서울에서 '상원사'까지는 달포나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세조는 재위기간 중 3차례나

'상원사'를 찾았다고 한다.

'상원사' 주차장 앞에는 세조가 몸을 씻기 위해 의관을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가 지금도 서있다.

단종을 죽인 세조는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뒤 온 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병에 걸리자 오대산을 다니며 기도를 올려 병이 낫도록 발원했다고 한다.

어느날 오대산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우연히 지나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동자승이 등을 밀어준 뒤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격한 세조가 화원을 불러 그 동자승의 화상을 그리게 했는데 지금 문수전 오른쪽 외벽에

그 모습을 재현한 벽화가 걸려 있다.

문수전 안의 목조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도 그런 연유에서 조성해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3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조의 왕사인 신미 스님이 복을 빌기 위해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세조가 채색· 쌀· 무명·

베와 철재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적었다는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도 왕실과 '상원사'의

관계를 짐작게 한다.

세조가 대(大)시주자로 앞장서자 왕비를 비롯한 궁인, 종실, 조정 신료와 전국의 수령방백들이

앞다투어 시주에 나섰던 사실을 보여준다.

문수전 앞 두마리의 고양이가 나란히 선 석조상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는 자신의 옷소매를 물고 늘어진 것을 수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 좌대 밑에 칼을 품고 숨은 자객을 찾아냈다고 한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의 고양이를 잘 보살피라는

뜻으로 묘전(猫田)을 하사해 '상원사'는 사방 80리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조의 원찰이 되었던 '상원사'는 안타깝게도 1946년 선원 뒤의 조실(祖室)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지금의 문수전과 청량선원 등 대부분의 전각은 모두 그 이후 복원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상원사 동종'

국보 제 36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 725년(성덕왕 24)에 주성되어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범종(梵鐘)으로서, 음향이 맑고 깨끗하다.

'상원사 봉황보당'

보당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당간에 내거는 의례용의 깃발을

높여서 부르는 용어이며, 당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과거 '상원사'에는 세조가 행차했을 당시 왕의 상징인 '어룡기(御龍旗)'를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주가 남아 있었는데 '상원사' 주지인 '인광 스님'의 발원에 의해 ​왕(세조)을

상징하는 황금빛 봉황으로 보당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탄허 스님'의 초서 글씨 현판이 걸려있는 상원사(上院寺) 입구

『오대산의 상원사는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성덕왕 4년(705년)에

보천ㆍ효명 두 왕자가 중창하여 진여원으로 불렸다.

이 절에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든 높이 1.67m, 지름 91㎝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

(국보 제36호)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세조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문수동자상,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

세조가 쓴 친필어첩인 중창권선문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상원사는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성덕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는 이 곳에서

수행한 선덕왕이 705년에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사찰로, 세조가 이 곳에서 문수보살을 만났으며

병을 나았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세조는 직접 권선문을 작정하고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 때 상원사라 이름을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적멸보궁' 갈림길

내일 '오대산 비로봉'으로 갈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ㅎ

오늘은 여기까지 '주마간산'식으로 탐방을 마치고~

극락암으로 되돌아 내려간다.

오대산 국립공원 깃대종 (긴점박이올빼미) 올바기

상원사 버스정류장 시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