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9.22
코스: 삼척. 죽서루 (해파랑길 삼척~동해 32구간 후반부 진행중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대중교통 이용)
전날 부산 개금집에서 노포동.동부시외버스터미널으로~
심야버스 이용하여 강릉시외터미널로 이동하고~
다시 삼척行 시외버스를 타고 삼척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도보로 지난 32구간 스톱한 해파랑길/ 오십천교에 접속후 진행이다.
(해파랑길 삼척~동해 32구간 후반부 진행중에 해파랑길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죽서루' 주위을 간략하게 둘러보고 그 내용을 정리한다.)
'삼척문화예술회관' 앞 '엑스포 광장'에서 우회전하여 '죽서교'를 건너고~
좌측 오십천변 건너편 깎아지른 벼랑위에 '죽서루'가 위치하고 있다.
'죽서교'를 건너 '엑스포로'를 따라 약간 더 내려서고~
'진주집' 앞에서 좌회전 하여 들어서면 '죽서루' 주차장이다.
'죽서루' 주차장
'죽서루' 정문인 삼문 좌측의 '죽서루' 안내판을 먼저 살펴보고~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보물 제213호-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명종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는 것으로 봐서 12세기 후반에 창건됐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한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원종 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죽서루는 적어도 126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성· 김구용· 정추 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남긴 것으로 봐서 죽서루는
14말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죽서루는 버려졌다가,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되거나 단청되었으며, 증축되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둘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 제1루(關東第一樓)」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정면이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기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죽서루란 명칭은 누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는 데서 명명되었다고 전하며,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전한다.
누각의 전면에 게시한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 제1루)」 현판은
177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누각 내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글씨이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현재 누정 내에는 부사 허목이 지은 「죽서루기(竹西樓記)」,
당성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 등 기문과 일중 김충현이 쓴
율곡 이이의 「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 정조의 어제 시 시판 등
모두 26개의 현판이 게판 되어 있다.
죽서루 출입문인 '삼문' 전면에 일중 글씨의 '죽서루'현판이 걸려있다.
그런데 허걱!!! '죽서루' 탐방시간이 오전9시부터다.
현재시간은 8시10분, 금쪽같은 시간 50분을 더 기다려야 되는데~
관리인에게 통사정(ㅎ)을 하여 사진 몇 장만 찍고 나온다는 조건으로
출입허락을 받고 신속하게 입장이다.
삼문을 들어서서 돌계단을 올라 겹처마 팔작지붕의 멋진 '죽서루' 전경을 바라보고~
177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쓴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 제1루)」 현판이 기품을 더하고 있다.
이후 좌측 돌계단을 올라 '죽서루'의 남쪽 방향으로 들어서고~
'죽서루' 편액을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죽서루」 및 그 별호(別號)를 새긴 편액이 5개,
시를 쓴 편액이 17개, 기문(記文)을 쓴 편액이 6개이다.
이 밖에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및 기부금방명기(寄附金芳名記)를 쓴 편액이 1개씩 있다.
비록 시를 쓴 편액은 17개이지만 그 안에는 28편의 시가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정조와 이이(李珥)·이구(李球)의 시는 1992년에 일중 김충현(金忠顯)이 쓴 글씨를 새겼고,
정철의 시는 1992년에 일죽 홍태의가 쓴 글씨를 새겼다.
또 강징(姜澂)의 시를 쓴 편액은 2003년에 다시 제작하여 게첩(揭帖)한 것이다.
'죽서루' 현판
대부분의 현판 글씨는 알려져 있지만, 이 죽서루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작자미상이라고 한다.
좌측부터 율곡 이이의 '죽서루차운' 시를 김충현의 글씨로, 중앙에는 이승휴의 시,
우측에는 이구(李球)가 지은 죽서루를 김충현의 글씨 편액이 걸려있다.
竹西樓 次韻(죽서루 차운) - 栗谷(율곡) 李珥(이이)
誰將天奧敞華樓(수장천오창화루) 누가 하늘을 도와 이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石老星移不記秋(석로성이불기추) 그 지나온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野外千鬟浮遠岫(야외천환부원수) 들판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감푸른 빛 서려 있고
沙邊一帶湛寒流(사변일대담한류) 강변 모래 가에는 맑고 찬물이 흐르네
騷人自是多幽恨(소인자시다유한) 시인과 묵객은 본래 남모를 한이 많다 하지만
淸境何須惹客愁(청경하수야객수) 깨끗한 이곳에서 어찌 나그네 근심이 일리요
會撥萬緣携籊籊(회발만연휴적적) 온갖 인연 모두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서
碧崖西畔弄眠鷗(벽애서반롱면구) 푸른 강변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
陪安集使兵部陳侍郞(諱子俟)登眞珠府西樓次板上韻[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 - 안집사 병부시랑 진자사(陳子俟)를 모시고 진주부 서루에 올라 판상의 시를 차운하다.
半空金碧駕崢嶸(반공금벽가쟁영)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掩映雲端舞棟楹(엄영운단무동영) 햇빛 가린 구름 조각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는구나
斜倚翠岩看鵠擧(사의취암간곡거)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고
俯臨丹檻數魚行(부림단함수어행) 붉은 난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보네
山圍平野圓成界(산위평야원성계) 산은 들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縣爲高樓別有名(현위고루별유명)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便欲投簪聊送老(편욕투잠료송로) 문득 벼슬을 버리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庶將螢燭助君明(서장형촉조군명)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 임금이 현명해지기를 바라네
- 李承休(이승휴, 1224~1330) 고려 말 정치가, 학자로 민족의 대서사인 '제왕운기'를 저술함.
竹西樓 - 李球(이구)
三陟官樓是竹西(삼척관루시죽서) 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인데
樓中佳客沈中書(누중가객심중서) 누중의 가객은 심중서로다
如今白首能詩酒(여금백수능시주)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시와 술에 의탁하여
暇日相遊爲說余(가일상유위설여) 한가한 날 나를 위해 즐거운 자리 베풀었네
憶沈東老(억심동로)
鳳池司諫臥仙槎(봉지사간와선사) 봉지에서 사간을 지낸 이 선사 땅에 누워
早和滄浪漁父歌(조화창랑어부가) 일찍이 창랑에서 어부사를 읊는 뜻을 알았네
爲說鹽梅時所急(위설염매시소급) 말하노니 바른 정사를 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는가
天廚鼎味待君和(천주정미대군화) 조정에서 선정 묘책을 논의함에 임금은 그대를 기다린다네
憶崔卜河(억최복하)
※ 삼척 죽서루 게판에 세칭 關東二君子詩(관동이군자시)로 유명한 이구의 시 두 편이 있으니
당시 동료인 中書(중서) 沈東老(심동노)와 司諫(사간) 崔卜河(최복하) 두 사람에게 증시한 시문이다.
이구(李球)는 고려 충렬왕 8년 1283년 원 나라에 들어가 약관 18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환국 후
고려 조정에 중용되어 禮賓卿(예빈경)에 이르렀고, 당대에 문명을 날렸으며 특히 詩文(시문)에 능하였다.
이구의 시에 나오는 중서는 심동노이다.
심동노는 고려 공민왕 10년 1361년 집현전 학사를 역임하고, 임금의 만루에도 부모 공경을 위해
삼척으로 낙향하여 날마다 죽서루와 추암 해암정을 오가며 시를 썼다.
동노는 동쪽으로 가는 노인네라고 임금이 붙여준 호다.
최복하는 고려 말 한성부윤(漢城府尹),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한 후 사직하여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목 2리 무령현(武靈峴)에 은거하였다.
은거 당시 상국(相國) 이구(李玖)가 관동이군(關東二君)에게 보낸 위의 시에서 조선에 참여할 것을
권하여였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을 뜻을 나타내었다.
해파랑길 28코스의 울진군 북면 고목 2리 마을에 '최복하 선생 유허비'가 있다.
홍백련의 죽서루 중건기
홍종범의 중건 상량문(단기 4304)
이학규 중수기
竹西樓 敬次/ 栗谷先生 韻(죽서루 경차/율곡 선생은) - 梁廷虎(양정호)
竹西樓 敬次 / 栗谷先生 韻(죽서루 경차/ 율곡선생운)
蒼崖陡起架飛樓(창애두기가비루) 푸른 이끼 낀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높은 누각
三伏炎蒸爽似秋(삼복염증상사추) 삼복의 찌는 더위에도 시원하기가 가을 같구나
遠峀浮嵐濃淡態(원수부람농담태) 먼 산 푸르스름한 기운 짙고 엷은 형상 이루었고
晴川芳草淺深流(청천방초천심류) 비 갠 날 맑은 냇물 아름다운 풀 사이로 얕고 깊게 흐르는데
雕欄物色添詩料(조란물색첨시료) 조각한 난간의 형상은 시 짓는 재료를 더해주고
錦席絃歌散客愁(금석현가산객수) 비단 방석에서 거문고 타며 읊는 시 나그네 근심 흩날리는구나
吏隱名區翻自愧(이은명구번자괴) 은거하고 싶은 벼슬길 좋은 경치 도리어 내 자신에게 부끄럽고
江湖一約負沙鷗(강호일약부사구) 강호에 살기로 한 굳은 약속 모래 위 갈매기에게 부끄럽구나
- 戊申流金日(무신류금일) 知府梁廷虎稿(지부양정호고)
- 무신년(1728) 몹시 더운 날 부사 양정호(梁廷虎)가 쓰다.
강원도 관찰사 안성의 시
상단: 정조 어제 , 하단 : 강원도 관찰사 강징(姜澂)의 시
正祖御製(정조 어제)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 다듬고 절벽 쪼아 세운 누각 하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앞은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노니네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루의 태수는 누구 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워 뱃놀이하는구나
- 金忠顯(김충현) 謹錄(근록)
※ 조선 숙종과 정조는 관동의 아름다운 경관에 푹 빠졌다.
왕들은 화원이 그려온 죽서루의 그림을 보고 흥취에 겨워 어제 시를 지었다.
정자에는 숙종의 어제 시판과 정조의 어제 시판이 걸려있다.
정조는 김홍도를 시켜 금강산 일대 4개군의 명승지를 그리게 했는데
이 그림첩이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다.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 월송정에서
북으로 안변 가학정, 그리고 금강산 접경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 화첩에 죽서루가 있다.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죽서루의 그림을 보고 시를 남겼던 것이다.
次(차운하다)
仙閣岧嶢揷高城(선각초요삽고성) 신선 사는 누각 높다란 성에 세웠는데
客來登眺動愁情(객래등조동수정) 나그네 올라 보니 서글픈 마음 치미네
十分歸思雲邊盡(십분귀사운변진) 고향 돌아갈 생각 구름 같이 사라지고
萬丈虹光醉裏成(만장홍광취리성) 높이 뜬 무지개 취한 김에 아른거리네
大野雄風吹海立(대야웅풍취해립) 너른 벌판에 부는 바람은 바다로 불고
千重巨浪殷雷行(천중거랑은뢰행) 거센 물결 우뢰 같이 세차게 몰려오네
夜深歌吹喧喧地(야심가취훤훤지) 깊은 밤 떠들썩 들려오는 노래와 연주
人在瑤臺倚月明(인재요대의월명) 사람들 달빛에 기대 요대에 앉아 있네
東來物色入新年(동래물색입신년) 동에서 온 물색 새로운 해로 접어드니
鄕思悠悠寄海天(향사유유기해천) 고향 생각은 유유히 바다 멀리 보내네
兩部笙歌供夜醉(양부생가공야취) 생황 불고 노래하며 밤 늦도록 취하자
雙淸雪月到梅邊(쌍청설월도매변) 눈과 달의 밝은 빛이 매화나무 비치네
窓中几席迎紅旭(창중궤석영홍욱) 창안의 궤석은 아침의 붉은 해를 맞고
樓上簾旌拂紫煙(누상렴정불자연) 누각의 발과 깃발 안개 속에 나부끼네
物外眞遊如可得(물외진유여가득) 세상밖에서 참 즐거움 얻을 수 있을까
欲審蓬島覓神仙(욕심봉도멱신선) 봉래산 찾아가 신선을 찾아 불까 하네
- 觀察使姜澂(관찰사강징)
※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소재(少齋) 강징(姜澂, 1466∼1536)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죽서루를 찾아 '次(차)'를 지었다.
강징의 '차' 다음에는 그의 6대손 설죽당(雪竹堂) 강재숙(姜再淑, 1677~1758)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발문(跋文), 17대손 강신소(姜信昭)의 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글씨는 정항교(鄭亢敎)가 썼다.
'第一溪亭: 시냇가의 첫째 가는 정자' - 현종 대 삼척부사 허목(許穆)의 글씨
第一溪亭(시냇가에 있는 첫째 가는 정자) 글씨는 현종 3년(1662)에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68세 때 쓴 글씨로, 미수는 ‘미전(眉篆)’으로 통하는 독특한 전서체 글씨로 유명하다.
미수는 곳곳에 많은 편액 글씨를 남겼는데, 거의 모두가 전서체 글씨다.
‘제일계정’처럼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글씨) 글씨로 남긴 편액은 이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
호쾌하게 쓴 것으로 누구나 좋아할, 시원하고 유려한 글씨다.
(徐渻(서성)의 오십천 시 5편.
전 삼척군수 윤승로의 시
상단은 숙종 어제 시 , 하단은 이준민과 그의 후손들이 쓴 시다.
御製
硉兀層崖百尺樓(율올층애백척루) 위태로운 벼랑 위에 높이 솟은 백 척 누각
朝雲夕月影淸流(조운석월영청류) 아침 구름 저녁 달 그림자 맑은 물에 드리우고
粼粼波裡魚浮沒(린린파리어부몰) 반짝이는 물결 속에는 물고기 뛰노는데
無事憑欄狎白鷗(무사빙란압백구) 한가로이 난간에 기대어 갈매기를 희롱하네
※ 숙종이 쓴 어제시를, 1721년(경종 1) 삼척부사 이상성(相成)이
죽서루에 걸게 된 사연이 함께 쓰여 있다.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바다 신선이 노니는 곳)’
헌종 3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 글씨다.
'허목'의 '죽서루기' (본인이 찍은 사진이 많이 흔들려 네이버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한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 남쪽 경계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에 부사 김효종 (金孝宗)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 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 현종 3)
임인년(壬寅年) 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글 중에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죽서루기>가 단연 압권이다.
조선 중후기의 명재상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은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며 또 서예가로서
헌종 3년(1662) 이곳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관동지방에 8경이 있으며 그 중 죽서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둘째 죽서루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큰 시내와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죽서루의 역사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조선 태조 3년(1403) 부사 김효종이
폐허 위에 누를 세웠고 세종 7년(1425) 부사 조관이 단청을 해 올렸다.
그런데 삼척시에서 나온 자료에는 허목이 김효손(金孝孫)을 김효종(金孝宗)으로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김효손이 태종 2년(1402) 정월에 삼척부사로 부임해서 태종 4년(1404) 2월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서루는 누각 아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죽서루' '송강 정철'
竹西樓 松江 鄭澈
關東仙界陟州樓(관동선계척주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虛檻憑危夏亦秋(허함빙위하역추) 빈 난간에 위태로이 기대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天上玉京隣北左(천상옥경인북좌) 하늘 위 옥황상제 궁전이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고
夢中銀潢聽西流(몽중은황청서류) 꿈속에서 은하수 서쪽으로 흐르는 소리 들리네
疏簾欲捲露華濕(소렴욕권로화습) 성긴 주렴 걷으려 하니 영롱한 이슬에 젖어있고
一鳥不飛江色愁(일조불비강색수) 새 한 마리 날지 않으니 강물 빛은 수심에 잠겼네
欄下孤舟將入海(난하고주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 하는데
釣竿應拂鬱陵鷗(조간응불울릉구) 낚싯대 던지니 놀란 갈매기 울릉도로 날아가네
- 1992년 10월 9일 一竹 洪泰義 書刻
만포 최달식의 시
'삼척부사 심영경'의 죽서루 판상의 시 한편을 차운하여 쓴 시
죽서루 중수 기부금 방명기
죽서루는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라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활용됐다.
또한 삼척 지방 양반 사대부와 이곳을 찾는 시인 묵객들의 정신 수양을 위한
휴식공간으로도 사용됐다.
죽서루 오른쪽으로는 진주관 자리의 큰 공간이 빈터로 남아 있고
그 옆으로 대나무들이 담장을 이루고 있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본인이 찍은 사진이 많이 흔들려 네이버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정부는 1991년 2월을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달로 정하고
기념 표석을 두 개 세웠는데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의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이다.
높이 3m의 8각 대리석으로 기단의 둘레가 2.4m인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詩碑)와는 달리 팔각형의 장재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단 8각의 각 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手決),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 등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 박물관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죽서루」와 관련된 시 중 '옥봉 이 씨'의 인연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 1544년∼1595년)의 첩이었다.
1583년∼1586년까지 삼척에서 ‘사또’ 생활을 한 남편을 따라 죽서루 누각과 오십천 옆 바윗길을 거닐고, 삼척의 바닷가와 계곡 물길이 엮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즐긴 여인이었던 것이다.
‘죽서루’의 아름다움을 풀어 낸 그녀의 시(죽서루)를 보자.
“江涵鷗夢闊, 天入雁愁長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
삼척 죽서루에는 삼척도호부 소속 관기(官妓)로 추정되는 죽선(竹仙)·화선(花仙)·
진향(眞香)·원홍(元紅) 등이 발견된다.
이곳에서는 빈객을 위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고, 악공과 기녀, 광대들이 참여했으며,
사군석(使君石), 금석(琴石) 등의 암각문은 이를 증빙하는 현장 자료이다.
죽서루 북쪽 '사군석' 암각문 옆 벼랑에 3행 종서로 암각된 언문 3행시가 발견되었는데,
작품 좌측에 한자로 ‘丁梅吉’이라는 관지를 새겼다.
『사랑이 퓌어려 ᄒᆞ리니 둥그러냐 모나니냐 /
기럿냐 자로더냐 바ᄅᆞ고냐 아차 일러라 /
하 그리 진줄은 모르냐 맘간대 몰라라』
사랑이 피려 하는데 (그 사랑이) 둥근 것이냐 모난 것이냐 /
긴 것이냐 짧은 것이냐 아하 말해라 (나는) 알 수 없구나 /
하 그렇게 진 것인 줄은 몰랐느냐 (내 마음은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구나.
丁梅吉(정매길)은 삼척도호부에 소속되었던 기녀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데,
사랑했던 어느 삼척부사가 이임한 뒤 그를 그리워하는 정을 이 시조 작품에 담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황진이ㆍ매창ㆍ옥봉과 같이 조선시대 기녀들의 시조 작품은
시조집을 통해 전하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소개되었지만,
암각문으로 전하는 한글 시조 작품은 이 정매길의 작품이 최초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송강 정철 가사의 터'를 간단히 둘러보고, 남쪽의 '용문바위'를 보러 간다.
죽서루 용문(龍門) 바위
신라 30대 문무왕이 사후 호국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 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 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 바위이다.
그 후 용문 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
용문 바위 위에 성혈 유적이 있다.
죽서루 선사 암각화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物象), 기호(記號), 성혈(性穴) 등을
그리거나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은 성혈 암각이다.
성혈은 선사 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 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 칠석날 자정에 아녀자들이 성혈 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韓紙)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성혈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 다음 원형의 돌 또는 나무로 연마, 구멍을 넓혀서 만든다.
죽서루 경내의 성혈은 죽서루 동쪽 용문 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3cm 크기이며 모두 10개이다.
죽서루 경내에는 대나무 숲과 함께 수령 350년 이상의 '회화나무' 보호수가 여러 그루 산재하고 있다.
그렇게 주마간산으로 죽서루 관람을 마치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 해파랑길 32코스 후반부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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