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전체구간-
남파랑길은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을 잇는 코리아 둘레길의 남해안 구간으로,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연결된 총 90개 구간의 1,463km의 걷기 여행길이다.
‘남쪽의 쪽빛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2016년에 개통한 해파랑길에 이어
두 번째로 2020년 10월 31일 개통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2017년 노선 조사를 시작으로 2018년 노선안 확정,
남파랑길 명칭과 상징물 확정, 2019년 안내체계 정비, 2020년 최종 점검을 거쳐 남파랑길을 개통했다.
남파랑길은 광역 지방자치단체 3곳과 기초 지방자치단체 23곳에 걸쳐 있다.
남파랑길은 구간별 특성을 담아 ‘남도문화길’과 ‘남도낭만길’ 등 5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돼 있다.
남도문화길은 장흥에서 강진, 완도, 해남으로 이어진 구간으로 남도 유배문화와
다양한 순례 자원을 체험할 수 있다.
남도낭만길은 여수에서 순천, 보성, 고흥으로 이어진 길로 지역의 독특한 생태환경과
다도해의 낭만을 체험할 수 있다.
한편,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 여행안내 ‘두루누비’ 누리집(www.durunubi.kr)과
‘두루누비’ 응용프로그램에서 남파랑길 전체 90개 구간에 대한 상세 내용과
위치정보시스템(GPS) 기반 노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요 관광안내소에는 걷기 여행자들의 편의성과 지역 관광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역의 맛집과 카페 정보 등을 포함해 제작한 지도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남파랑길은 구간별 특징을 고려한 5가지 주제로,
부산·경남·전남 지역 90개 코스, 1,463km 거리를 걷는 길이다-
▲ '한류길'(부산∼경남.창원) : 영화와 한류의 도시, 대도시와 자연의 반전 매력을 보유한 길.
▲ '한려길'(고성,통영,거제,사천,남해) :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해안 경관이 아름다운 길.
▲ '섬진강 꽃길'(하동∼광양) : 섬진강과 꽃 경관이 아름다운 길.
▲ '남도 낭만길'(전남.여수,순천,보성,고흥) : 독특한 생태환경과 다도해를 따라 낭만을 체험할 수 있는 길.
▲ '남도 순례길'(장흥,강진,완도,해남) : 남도 유배문화와 다양한 순례 자원을 체험할 수 있는 길.
답사일자: 2022.9.16
코스: 오륙도해맞이공원(1코스 시점)-무제등소공원.입구-무제등/170m-무제등소공원.입구
-UN참전기념거리-평화공원-유엔기념공원-감만동교차로-우암동교차로-성지고등학교
-우암2주택재개발단지-문현동.곱창골목-부산진시장-정공단-안용복기념관-증산.전망대
-장승조각공원.입구-구봉산 치유숲길.입구-유치환 우체통-부산역 광장(1코스 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21.86km (두루누비기준 18.8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7시간20분
▶ 갈때 : 개금집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부경대,경성대역에서 하차,
5번출구로 나와 남구2 마을버스 환승하여 오륙도선착장 정류장(종점)에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부산역광장.버스정류장에서 67번 시내버스타고 개금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부산1구간 궤적'
현재 이런저런 이유로 해파랑길 진행이 자꾸 지체되고~
그러든차에 2020년 개통된 남파랑길도 언제가는 진행할 계획을 하고 있는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것이 좋을듯하여, 하루 시간을 내어 '오륙도'로 향해 출발이다.
개금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부경대,경성대역에서 하차,
5번출구로 나와 남구2 마을버스 환승하여 오륙도선착장 정류장(종점)에 하차,
동해와 남해가 갈리는 코리아둘레길 시작 지점에 도착이다.
동해와 남해 갈림 표지 동판석
'오륙도' 바라보고~
답사준비를 마치고 (08:10) '남파랑길' 대단원의 첫 발을 내딛는다.
남파랑길 출발지를 나서 오륙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 방향으로 오르고~
'스카이워크'전망대 입구는 자물쇠로 꽁꽁 묶어놓았다.
아직도 공사중인가???
'해파랑길' 바라보고~
'해파랑길 관광안내소'는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문이 잠겨있다.
'코리아 둘레길' 해파랑길 1코스와 스탬프 박스, 남파랑길 1코스 안내도
(08:15) 해파랑길과 남파랑길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좌측 남파랑길로 진행이다.
남파랑길 1코스 중 '부산진시장'까지는 '갈맷길 3-1' 코스와 동일한 코스로 진행하게 되는데~
'갈맷길'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사포 지향(바다, 강, 산, 온천)인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어 바닷가를 걷다 보면 어느덧 산속이고, 산을 벗어나면 강이 있고,
몸이 노곤하면 온천이 반겨주는 부산에만 있는 길로 소개하고 있다.
우측 도로건너편으로 '오륙도SK 뷰' 아파트 정문을 지나고~
뒤돌아본 '오륙도'~
오륙도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24호로 지정되었다.
올망졸망 모인 6개의 섬이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5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라고
이름 붙여 졌는데, 방패섬과 솔섬의 중허리가 밀물 때 물이 들면 두섬이 나눠져 6개의 섬이 되고,
썰물 일때는 하나로 붙여져 5개의 섬으로 보인다.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山川條)에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한
나란히 서있는 섬들이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사 되어
오륙도라 한다’고 기록된 것에서 비롯된다는데~
육지에서 가까운 섬으로 세찬 바람과 파도를 막아준다는 방패섬,
섬의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솔섬,
갈매기를 노려 독수리들이 모여들었다는 수리섬, 작고 모양이 뾰족하게 생긴 송곳섬,
가장 큰 섬으로 커다란 굴이 있어 천정에서 흐르는 물이 능히 한사람 몫의 음료수로 충분하다는 굴섬,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고 평탄하여 밭섬 이라고도 하였다는 등대섬으로 나뉜다.
등대섬은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불리어졌으며, 오륙도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기도 하다.
옛날 오륙도는 육지에서 이어진 하나의 작은 반도였으나, 오랜 세월은 거치는 동안
거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이것은 육지인 승두말과 방패섬, 솔섬의 지질구성이 동일한데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항을 드나드는 각종 선박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오륙도는 대한민국의 관문이며, 부산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08:28) '오륙도 중학교' 정문 앞을 지난다.
오륙도 중학교는 약 3,000세대의 오륙도 SK 뷰 아파트를 건축· 분양하면서,
SK건설이 부산광역시 교육청으로부터 건설공사비 일부를 지원받아
2009년 3월 1일 완공하여 부산교육청에 기부하였다는 안내 동판이 정문 기둥에 박혀있다.
(08:37) '용소 삼거리' (실제는 사거리) 로터리 갈림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백운포'가 나온다.
백운포(白雲浦)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로, 동쪽 해안 절경지의 바다에
흰 구름[白雲]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백운포(白雲浦)라 불렀다고 한다.
개항기에 용호동의 분개(盆浦) 마을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여
백운포까지 거주지가 확대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처음에는 분개 마을 사패(四牌)[분개 마을을 4개로 나누며 네 번째라는 의미]로 불렸으나,
언젠가부터 포구[신선대와 용호 2동 승두말 사이의 포구]의 이름을 따서 백운포 마을이 되었다.
백운포 마을의 북서쪽에는 용당동과 용호동의 경계에 있는 용마산이 있으며,
북동쪽에는 장산봉이 있다.
마을은 두 산지 사이의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다.
앞바다는 기반암이 나출되어 있고, 주먹만 한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 해안으로
자갈돌이 울면 비바람이 많이 친다고도 하였다.
현재는 매립되며 사라져 과거의 형태를 찾을 수 없고, 현재는 바다와 접한
해안 경사지에 10여 곳의 횟집만이 남아 있다.
골짜기 해안가는 매립되어 백운포 체육공원이 조성되었고, 앞쪽 방파제는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용마산 남쪽 산자락에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도로를 건너 정면의 '늘빛 교회'를 우측에 끼고 직진 방향으로 진행이다.
좌측아래로 '백운포'를 바라보고~
우측 도로건너편의 '용호동 천주교 묘지'를 보면서 진행이다.
'무제등(170m)' 바라보고~
(08:49) '무제등 소공원' 입구에 남파랑길 부산 01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무제등 소공원' 입구에 도착하고~
목이 말라 자판기에서 션한 사이다 1캔 뽑아 한방에 갈증을 날려버린다.
무제등 소공원은 2005년 쓰레기 소각장 운영이 종료되면서 공터로 방치되던
볼품없는 도심 공터인 용당동 신선대 유원지 일원 4,955㎡ 부지에 총 17억 원을 투입해
사유지 매입, 전망테크·쉼터 조성, 수목식재 등을 완료하여, 아기자기한 미니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신선대 일대의 난개발을 방지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존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무제등 소공원' 입구에서 '남파랑길' 표시 따라 '신선대' 입구로 들어서고~
갈맷길 안내판은 '신선대'를 돌아 나오도록 안내하고 있는 반면,
남파랑길은 '신선대'를 생략하고 바로 우측으로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예전에 갈맷길을 진행할때 올라가봤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와보겠나라는 생각에 '신선대'를 다녀오기로 한다.
룰루랄라~
'오륙도' 바라보고~
(09:09) 능선 갈림길의 '일신정' 앞을 지난다.
일신정(日新亭)의 '일신'은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으로,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표현으로도 자주 쓰인다.
이는 은나라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의 반명(盤銘: 대야에 새겨 놓고 좌우명으로 삼은 문장)에
새겨져 있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이란 글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선대
황령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형성된 우암 반도의 남단에 해당하며,
화산암질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절벽과 해식동굴로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남구 용당동 해변의 좌안에 위치한 바닷가 절벽과 산정(山頂)을 총칭하여 말한다.
부산 지정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 오는데, 신선대를 절단하여 도랑을 만들 때 사토에서
혈흔이 나왔다고 전하며, 가야진이라는 사람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며,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유람한 곳이라고도 한다.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1797년(정조 21년)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영국의 탐사선 프로비던스 호의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 함장과 선원들은 북태평양 탐사 항해 중 식수와 나무 연료 부족으로
정박지를 찾아 표류하다 신선대 일원 용당포에 도착하여 주민들과 접촉했다고 하며,
해방 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해수욕장과 위락시설이 운영되어 잠시 번성하였으나,
동명목재가 들어서면서 공장지대로 변모하였고 현재는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군사작전지역으로 변모하였으나, 신선대 정상에 서면 오륙도(五六島), 영도, 조도(朝島),
부산 내항과 맑은 날에는 쓰시마섬[對馬島]도 관망할 수 있으며,
한·영 첫 만남 200주년 기념비도 세워져 있는 부산의 역사적인 명승지다.
일신정을 지난후 또 다른 갈림길에서 우측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서서
(09:16) '무제등(170m)' 표지목과 삼각점(부 87)이 있는 '무제등' 정상에 도착이다.
빛바랜 전망대 안내판
'백운포 일자방파제'와 '태종대' 바라보고~
'용당포 신선대 부두'와 '영도' 바라보고~
그렇게 조망을 즐긴후 올라섰던 방향 좌측으로 내려서서
(09:22) '한·영 첫 만남 200주년 기념비'가 있는 소공원 도착이다.
[앞면]
1797년 10월, 윌리엄 브라우턴 함장과 승무원들은 영국 해군 소속 '프로비던스'호의 부속선을 타고
이곳 용당포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을 가졌던 최초의 영국인들이었다.
이 기념비는 윌리엄 브라우턴 함장의 부산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부산항을 정밀하게
측량 관측했던 지점에 건립되었다.
[뒷면]
2001년 4월 20일 영국 해군 중령 요오크 공작에 의해 제막되었고 부산광역시청 및 남구청의 협력과
왕상은 부산 주재 영국 명예영사의 후원을 받아 건립되었다.
"이른 아침 낯선 우리 배를 보기 위해 호기심에 찬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가득 실은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그들은 누볐거나 이중천으로 된 흰 무명천의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크고 헐렁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속바지 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남녀 모두가 흰 무명 버선과
볏짚으로 만든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어 상투를 틀었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모으고 말아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배에서 가까운 남쪽에 있는 산(신선대)으로 올라가 방위각을 재기 위하여 뭍으로 나갔다.
정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는 매우 넓었고 항구의 모든 부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이 산의 강한 자력으로 인해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항상 북쪽이 아닌 동쪽을 가리키므로 방위각 측정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가파르며 높고 튀어나온 이 산이 우리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지도상에 이 산의 이름을 '자석의 머리'라고 표기하였다"
-브로우턴 함장의 항해 일기 중에서-
정조 20년 음력 1797년 9월 6일 임신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이
달려와서 다음과 같이 적어 올렸다.
"이상한 나라의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동해 용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습니다.
그들에게 국호와 표류하여 닿게 된 연유를 한나라, 청나라, 왜국,
몽고의 언어로 물어보았으나 모두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붓을 주어 글로 써 보라고 하였더니 글자의 모습이 구름이 핀 산과 같았고
그림을 그려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일신정' 정자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로 되돌아나온후 우측 '백운포'로 내려서는 길이 아닌
좌측의 비포장 탐방로로 진행하여 신선대 주차장 방향으로 나간다.
(09:32) 신선대 주차장 입구로 내려서서 '무제등 소공원' 위를 가로질러 나간다.
무제등 소공원 안에는 신선대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10장생(해, 달, 산, 물, 사슴, 거북, 학, 대나무, 소나무, 불로초)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설치하여 놓았다고 하며, 과거 1995 ~ 2005년까지 쓰레기 소각장이 운영되어 각종 쓰레기를
태움으로써 매연을 내뿜는 혐오지역에서 주민들이 휴식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신선대 산북로' 대로로 들어서면, 갈맷길 이정표와 남파랑길 표지판이 보이고~
도로 좌측 아래로 '용당포 신선대 부두'가 넓게 펼쳐진다.
전방으로 용호동 뒷산인 '봉오리산(173.3m)'을 바라보며 진행하고~
좌측으로 '국가 지정 검사소'를 지나~
(09:51) 용호동이 갈리는 로타리형 '용당동 삼거리'에서 계속 직진이다.
우측 도로건너편의 '동명대학교' 후문을 지나고~
좌측으로 '남부 자동차 매매 단지'를 끼고 나가서 '동명 공고' 앞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다.
(10:00) '동명 오거리'에서,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고~
'동명빌딩' 앞에서 '유엔기념공원 0.7km' 방향으로 진행하기 위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넌후,
부산은행 건물을 지나 '동명대 정문 정류장' 앞을 지나간다.
(10:09) 'UN 참전기념 거리' 입간판 앞을 지나고~
'평화공원' 입구에 남파랑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후 남파랑길 진행길을 살펴보면, '평화공원'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평화공원'으로 들어서서
'시계탑' 앞을 지나고, 우회전하여 끝까지 나가서 좌회전하여 '6.25 참전 기념비'를 지나고,
'UN 조각공원'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영연방 위령탑'을 지나 우측의 주 묘역으로 진행하여
'UN공원' 정문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다.
(10:12) '평화공원'으로 들어서고~
'UN 평화문화특구' 안내판 앞에서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부산 남구 UN 평화문화특구는 UN기념공원 일원(574,147㎡)을 UN에서 명칭 사용 승인을 얻어
2010년 5월 19일 정부로부터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부산 남구에서는 UN 평화문화특구를 UN기념공원, 부산문화회관, 부산박물관과 연계하여
UN 평화기념관 건립, 일제 강제 동원 역사기념관 건립, 테마거리 조성, 평화축제 개최 등으로
명실 상부한 평화문화도시로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안내판 내용-
평화공원 '중앙 분수'를 지나고~
(10:18) '평화공원' 끝에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10:20) '6.25 참전 기념비'인 '환생의 문(정진윤 작)'을 지나고~
이 기념비 앞에는 비명, 헌시와 함께 참전 유공자 1,04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분 묵념시간을 갖고~)
'갈맷길 3코스 안내도'를 지나~
(10:24) 'UN 조각 공원'으로 진행이다.
한국/ 김정명, '신의 의자'
'UN 기념공원'을 세계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되는 국제적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해 조성한
'UN 조각 공원'은 한국전쟁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개최된 UN기념공원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6.25 참전 21개국의 조각가들이 제작한 34점의 조각품을 기증받아 조성하였다.
(10:28) '재 한국 국제연합 기념공원' 동문으로 들어서고~
'도은트(Daunt) 수로'
이 수로 이름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17세) 사망자인
호주 병사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유엔기념공원'
유엔군 위령탑은 1978년 한국 정부가 건립하였고, 2007년 재정비 한 위령탑으로
정면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엔군 위령탑' 한글 휘호가 새겨져 있다.
벽면에는 각국별 전투 지원 내역과 전사자 숫자가 동판에 새겨져 있고,
내부 공간에는 원래 유엔군 전사자 명부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2007년 9월 '제2 기념관'으로 개조 안장자 관련 사진 및 자료를 전시 중이다.
유엔군 위령탑 남쪽으로 '무명용사의 길'이 나 있고,
길 좌우로 11단의 계단식 수로(水路) 2개가 펼쳐져 있다.
수로 위쪽에는 11개의 분수대가 각각 물을 뿜고 있고,
수로 가에는 11그루의 소나무가 늘어서 있다.
이것은 유엔 기념 공원에 유해가 안장된 11개국을 의미한다.
수로 위쪽의 분수대는 좌우로 11개씩 모두 22개인데,
이는 한국을 포함한 6·25 전쟁에 참전한 22개국을 의미한다.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는 한국 전쟁(6.25동란) 중 세계 평화와 자유라는 대의 아래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자를
영구히 추모하고자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10월에 건립되었다.
우주를 뜻하는 원형 수반에는 전몰 영혼들이 머무는 하늘과 명비 그리고 보는 이들이 담겨 있으며
수반 안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철모가 맞은편에서 평화로운 연꽃으로 승화하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색 명비에는 참전 각국에서 제공한 40,896명의 전사자(실종자 포함)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국가별, 개인별)로 새겨져 있으며, 이곳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몰자는
이름 뒤에 ◇로 구분 표시하였다.
한국 전쟁 중 유엔군 참전국은 전투 지원국 16개국(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국, 터키, 영국, 미국)과
의료 지원국 6개국(덴마크, 독일,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총 22개국이었고,
전사자 수가 많은 국가로 미국 36,492명, 영국 1,177명, 터키 1,005명, 캐나다 516명,
호주 346명 순이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1964년에 건립된 '추모관'
추모관에서는 한국전쟁 및 유엔기념공원 소개 다큐멘터리 영화 12분짜리가 상영된다.
그렇게 '유엔 기념공원'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10:37) 정문으로 나간다.
'유엔 기념공원' 정문으로 나가 우측의 '유엔 평화로' 터널 우측 계단길로 올라서고~
터널 위에서 좌회전하여, 부산문화회관 산책로를 따라 회관 방향으로 올라간다.
(10:40) '부산 문화회관' 앞 중앙광장
문화의 전당에서 울려 퍼지는 하모니가 '첼로와 새의 형상'을 통해
시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전달되기를 희망하는 '소리의 여정'이란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대극장 뒤편으로 나가, 공공 연습 공간인 '다듬채'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나간다.
'(10:52) 석포 초등학교'앞 횡단보도를 건너고~
(10:55) 'T자' 갈림길인 '석포로'를 만난후에는 좌회전이다.
친절한 이정표
(11:00) '남광시장'전 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고~
구.부산외국어대학교(2014년도에 우암동 캠퍼스에서 남산동 캠퍼스로 이전) 정문을 지난다.
(11:10) 홈플러스가 있는 '감만동교차로'에서는 우회전하고~
'감만동교차로' 곡각지점에 남파랑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1:15) '우암동교차로'에서도 우회전하고~
이후 '유엔로'를 따라 '뉴서울아파트'와 '우암자유아파트'를 지나고~
'예종음악학원'을 지난후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다.
(11:20) '부산 성지고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하고~
(11:21) '우암2 주택 재개발 단지'가 시작된다.
(11:27) 고갯마루에 있는 '신연초등학교'를 지나고~
재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이곳의 남파랑길도 많이 바뀌겠다는 생각이다.
'동제당로191번길'을 따라서 간다.
'동제당로195번길~192번길' 갈림길에서 좌회전이다.
(11:36) '우암동 도시숲 달빛마실길' 사거리갈림길에 도착하고~
예전 부산 갈맷길 3-1구간 이정표와 안내 표지판이 제거되지 않은채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 남파랑길은 우회전하여 산으로 올라 '문현4동 동네체육시설'이 있는곳으로 간다.
룰루랄라~ 아스팔트길이 아닌 흙길을 걸으니 살것같다. ㅎ~
(11:40) '정자쉼터'를 만나고~
배낭을 내리고 10분간 휴식이다.
(얼려서 준비해온 서걱서걱 거리는 캔커피와 도넛1개는 정말 꿀맛~ ㅎ)
(11:51) '우암묘목장'을 지나고~
(11:55) '문현4동 동네체육시설'이 있는곳에 도착이다.
체육시설이 있는 화단에 보기좋은 '꽃범의꼬리'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이제 하산길이다.
'문현4동'으로 내려서고~
(12:04) '세영맨션아파트'를 우측에 끼고 진행이다.
(12:08) '문현동 곱창골목' 안내판
'문현 4치안 센터' 앞 직진 방향에, 영화 '친구' 촬영 장소로 유명한 '칠성 식당'이 있다.
칠성 식당(七星食堂)은 부산광역시 남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인
문현동 곱창 골목의 원조로 60년 전통의 곱창 전문점이다.
1952년 개업 당시 문현동 일대에는 대선 소주 공장과 스테인리스 공장 등 여러 개의 공장들이 있었다.
인근 공장들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종류의 안주와 소주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출발하였다.
안주들 가운데 돼지 곱창을 양념하여 구이로 판매하는 곱창 메뉴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점차 전문적으로 곱창 요리를 판매하게 되었다.
당시 곱창은 1인분에 15원 정도였고, 소주는 병으로 판매한 것이 아니라 인근 대선 소주 공장에서
독으로 받아다가 사이다 병에 넣어서 판매하였다.
1990년대부터 골목에 여러 곱창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문현동 곱창 골목을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에 네 곳에 불과하던 곱창 식당은 10곳으로 늘어났고, 2001년 제작·상영된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가 되면서 곱창 골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문현 곱창골목'을 지나 도로 우측의 '문현 4치안 센터' 앞 삼거리에서
'갈맷길 3코스' 안내도의 표지대로 우측 '문현역' 방향으로 나간다.
.
(12:11) '문현 교차로'
이후 '문현 교차로' 횡단보도를 차례로 건너, 서편 '골프존 파크' 방향으로 나가서
(12:13) '동서 고가로' 아래의 '범일교'를 통해 동천을 건넌다.
'동천'을 바라보고~
동천(東川)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선암사 계곡에서 발원해 동구 범일동 북항으로
이어지는 총길이 8.77㎞의 하천이다.
당감천이 포함된 동천 본류 외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
구 성지곡 수원지에서 흘러 영광도서 앞을 지나 동천 본류와 합류하는 부전천[4.19㎞],
금용산에서 발원해 화지언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면서 연지동과 범전동을 지나
전포동 옛 제일제당 부근[서면 CGV]에서 합류하는 전포천[2.6㎞],
엄광산에서 시작돼 부산 도시 철도 부암역 인근에서 합류하는 가야천[3.2㎞],
동구 수정동 안창 마을 상류에서 발원해 현대 백화점 뒤편으로 흘러내리는 호계천[1.7㎞] 등이
동천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현재 동천의 상류 쪽과 4개 지류는 많은 구간이 복개돼 옛 모습을 찾기 어렵고,
당감천과 부전천의 합류 지점인 광무교에서 부산항으로 유입되는 구간까지
약 3㎞는 복개가 되지 않았지만 오·폐수 유입으로 오염이 심한 상태이다.
동천은 부산의 도시화·산업화에 따라 사라진 대표적인 도심 하천이다.
도심부를 관통해 흘러 도로 개설을 위해 복개되고 직강화되었으며 각종 오·폐수가
유입되어 한때 똥천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천에 대한 관심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본격화되었으며
현재는 동천 재생 4.0 캠페인으로 계속되고 있다.
2013년 현재 매일 3만 톤의 해수를 끌어와서 광무교 아래에 방류함으로써
당장에 악취를 줄이는 효과는 얻고 있으며, 다각도에서 동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범일 교차로'를 건너기 위해 좌측에 있는 육교를 이용하여
(12:18) 도로를 건너고~ (육교 위에서 바라본 '범일 교차로')
육교를 내려서고~
(12:20) '재봉틀거리'를 따라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12:22) '자성대공원 북문 입구'를 지나고~
공원 입구에는 '부산진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부산진성(釜山鎭城, 지방기념물 제7호)
부산진은 조선 태종 7년(1407)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상좌도 수군 사령부가
주둔하던 군사적 요충지로, 성종 21년(1490)에는 많은 병선과 수군, 그리고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증산(甑山) 아래 부산진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무토가 부산진성을 파괴하고,
산 정상에 본성인 증산 왜성을,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동남쪽 해안가에는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을 쌓았다.
난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진을 지성으로 옮겨 이를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부산진성의 둘레는 약 2.25km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진동문, 금루관, 진남문,
구장루라는 문을 만들고 문루를 두었다.
성내 정상부에 있던 자성대에는 정유래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추모하는
만공단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는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나
1974년 부산진성 정화 사업 때 동문인 건춘문(옛날 진동문)과 서문인 금루관,
장대인 진남대를 복원하였다.
부산진성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킨 선열들과 조선 수군의 5백 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해 조선 후기에 쌓은 수군 진성을
연구할 수 있어 자료 사적 가치 또한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12:24) '부산진시장' 앞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후 직진이다.
부산진시장
부산을 대표하는 전국3대 재래시장으로 조선영조46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전하는 조선통신사가 영가대(永嘉臺)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다는데,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부산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산진성 서문 밖에 있는 미곡과 건어물의 집산지로 4일과 9일장을 열었다” 는
기록이 있어 부산진시장의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음을 알수있다.
1913년 상설시장으로 개장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백년의 전통을 간직한
혼수.의류 특화 전문시장이다.
(12:28) '경부선 철도'를 건너가기 위해 '부산진시장 지하보도'로 내려서고~
(12:32) 다시 횡단보도를 통해 '좌천동 가구거리' 도로를 건넌다.
'일신기독병원'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12:36) '일신기독병원' 앞을 지나간다.
일신기독병원(日新基督病院)은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헬렌 펄 메켄지(한국명 매혜란)'에 의하여 일신 부인 병원으로 개원하였다.
산부인과 진료와 함께 조산 간호원 및 여의사에 대한 전문교육을 병행함으로써 당시 부족하였던
모자보건 분야의 전문 요원 양성에 주력하였다.
(12:37) 정공단
정공단(鄭公壇)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영조 42년(1766) 부산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부산진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기리려고
그들이 순국한 장소인 이곳, 옛 부산진성 남문 터에 제단(祭壇)을 쌓았다.
이후 부산 첨사들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 장군의 비, 서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의 비,
동쪽에는 정발의 첩 열녀 애향(愛香)의 비가 있다,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시는 비석이 있고, 남쪽 계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龍月)의 단이 있다.
1895년 첨절제사(僉節制使: 벼슬의 이름 중 하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그 뒤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된 향사계(享祀契)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1907년 순종(純宗)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하사금을 내려 정공단(鄭公壇)을 유지하고 향사를 계속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민족혼을 일깨운다는 이유로 정공단에 대해 박해를 가하여 1942년
향사계는 해산당하고 제단은 폐쇄되었으며, 관련 유물과 비품 등도 몰수당하였다.
그러다 1945년 11월에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었고 옛 비석도 세워지고 향사도 계속되었다.
1948년 제단을 새로 만들면서 뒤쪽으로 별단을 쌓아 옛 비석을 두었고, 2009년에 옛 비석을
땅에 묻고 제단을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鄭公壇保存會)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향을 주관한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 장군의 비,
서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였던 '증좌승지' 이정헌(李庭憲)의 비,
동쪽에는 정발의 첩 열녀 애향(愛香)의 비가 있다,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시는 '전망제공비'가 있고,
남쪽 계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龍月)의 비가 있다.
정공단에서 내려다 본 중앙의 외삼문 좌측의 비각
외삼문 옆 비각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충장공정발전망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761년(영조 37)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세운 것이다.
원래 영가대(永嘉臺)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전찻길 개설로 비를 옮겨 온 것이다.
'정공단'을 나서, 우측 125m 떨어져 있는 '안용복기념 부산포 개항기념관' 갈림길 좌측에
독립운동가 '정오연 생가터'가 있고, 길 우측에는 '왕길지 기념관'이 있다.
왕길지는 독일명 엥겔 목사로 1900년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 경남 동부지역에서
장로교 지역 전도와 교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남파랑길은 '청와대' 식당 앞에서 우측 골목길을 따라 올라서고~
(12:45) '부산진 교회' 앞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교회를 우측에 끼고 올라간다.
(12:47)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지나고~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부산진 일신여학교는 호주장로교선교회 여자전도부 소속 맨지스와 페리 선교사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위해 1895년 10월15일 좌천동의 한 초가에 3년 과정의 소학교를 설치하므로 시작되었다.
(1905년 4월 15일에 현재의 현대식건물을 준공하였다.)
여성이 공적 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절, 초대 교장이었던 맨지스(B. Menzies, 1856-1935
(1891-1924:한국체류))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의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신념으로 버려진 아이 3명을 데리고 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신여학교는 민족과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일꾼을 키우고 자주, 자립의 자세를
키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종교적 색채를 띤 덕분으로 일제가 식민지 교육을 강화했던 1915년까지 일제의 강력한 통제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연스레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정신을 일깨우며 항일 운동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건물은 서양식으로서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례가 드물고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례와 균형미가 돋보이는 휼륭한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초기 학교 건물로는
손꼽을 만큼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으로서, 그 동안 이 건물이 교육시설로서 맡아 온
역할과 기독교의 전래과정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교육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동구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다.'
축대 벽면에는 '동구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다'란 슬로건 하에, 부산·경남지역에서 최초 3·1운동의
시발점인 동구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및 역사적인 장소를 탐방·체험하고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소로 조성하였다는 안내문이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그 좌측 편에는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3월에는 부산 초량 객주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설명판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 내용이 게시되어 있고, 그 좌측 편에는 일신여학교에서 1919년 3월 11일 만세시위운동이 개시되어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설명문이 게시되어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독립 선언서 전문이 게시되어 있고~
독립운동가 박제혁(1895~1921), 최천택(1897~1962), 장건상(1882~1974)의
독립운동 활약상 게시판을 지난다.
산복도로에 오르면 맞은편 벽면에 동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초상과
'동래 부산포 고지도'가 걸려있다.
(12:54)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 앞에 도착하고~
안용복(安龍福)은 동래부(현재의 부산진구 좌천동) 출신으로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였다.
당시 좌천동에는 초량 왜관으로 이주하기 전의 왜관인 '두모포 왜관'이 있었는데,
이러한 주거 환경 덕분에 안용복은 일찍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 좌수영의 수군 능로군(能櫓軍)으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로 40여 명의 어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기에 고기잡이하러 나온 일본 어부들과 조우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다투었다.
이에 일본 어부들은 일본어를 할 수 있던 안용복과 울산 어부 박어둔 등 두 명을
일본 돗토리번으로 납치해 갔다.
일본 영토라고 생각한 울릉도와 독도에 조선 어부들이 잘못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증거로서 두 사람을 데려간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일본 관료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는 하루 만에 도착하는 거리지만
일본에서는 닷새가 걸리므로 조선 영토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鬱陵島非日本界(울릉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란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일본 측 자료인 <인부연표>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2명, 요리사 3명,
병졸 5명 등을 딸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서 50일 동안
구금된 뒤 일본 사신 타다 요자에몽(多田與左衛門, 조선 기록에는 귤진중(橘眞重)으로 표기)을 따라
부산 왜관으로 송환되어 9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왜관에서도 40일 넘게 갇혀 있다가 12월에야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 중요한 영토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온 그에게 내려진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그와 박어둔은 허가 없이 월경(越境, 국경을 넘는 일) 한 죄목으로 각각 곤장 100대와 80대를 맞았다.
안용복에게 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동래부 동헌으로 넘기면서 항의를 한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 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조선 태종 때도 대마도 주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선은 대마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바다로 들어오면
말썽이 생긴다는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도 정책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일본 막부가 오타니 가문에 도해 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 지배하의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일본국과 국교를 고려하여 안용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양국 간에 불씨를 만든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장희빈이 축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소론은 노론과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계를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대한
도해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대마도주는 막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우리 조정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안용복이 다시 나섰다.
그는 '鬱陵于山兩道監稅官(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10여 명의 조선 어부들을 인솔하여 그 길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막부를 찾아가 강력한 항의 끝에 다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는
확약을 얻어낸 안용복은 다시 대마도주를 찾아가 항의했다.
대마도주가 말을 듣지 않자, 막부가 우리 조정으로 보내는 물자들을 대마도주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도주로부터 완전 굴복을 얻어냈다.
<번례집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헌에서 대마도주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뱃길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다.
그러나, 조정은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 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었다는 범경죄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신여철(申汝哲)과 남구만 등 몇몇 신하들이 나서서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그의 공적을 변호해 주어서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안용복의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나 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언제 죽어 어디에 묻혔는지 역사는 말이 없다.
후에 나온 <고암집>에도 그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천민 출신의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문서화하는 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안용복 이후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2년에 한 차례씩 순시하도록 하였다.
<성호사설>은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만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殃禍- 재난)를 이루 말하겠는가.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서 그쳤겠는가.』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 울릉도-
안용복은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현대에 와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1967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國土守護, 其功不滅(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
이라는 휘호를 기증했고, 같은 해 10월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부산 수영사적공원
(지금 수영구 수영동으로 안용복이 근처에 살았던 경상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안에
그의 충혼탑을 세웠다.
(12:55) 경사형 엘리베이터인 '모노레일'을 타고 '증산 공원'으로 올라간다.
잠시후 '좌천 체육공원'과 '문화 아파트' 앞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니, '증산 공원' 방향으로
또 다른 엘리베이터 승강장이 있다.
예전에는 160개 계단길을 고스란히 걸어서 올라야 했지만, 지금은 경사형 엘리베이터 1호기과
2호기가 설치됨으로써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다.
'문화 아파트' 담장의 '안용복'이 2차 도일 때 사칭하였다는 '조울양도감세장' 표시를 살펴보고~
중간 기착지에서 상단으로 오르는 경사형 엘리베이터인 '모노레일'을 타고
다시 '증산 공원'으로 올라간다.
경사형 엘리베이터인 '모노레일' 상단 기착지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가서
(13:00) 테크계단길을 올라 우측으로 '수정 4동 어린이집' 앞을 지난다.
어린이집 입구에는 '증산 왜성' 표지판이 서 있다.
(13:04) '증산 전망대'에 오르고~
증산(甑山)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해발 고도 130m인 증산의 능선을 따라 조선 시대 쌓은 부산진성이 있던 곳으로,
산릉을 따라 쌓은 성의 모습이 마치 시루와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증산은 동래부 동방 2리 지점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축성한 산인데 위에 장대가 있고 아래에 성황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점거되기 시작하여 점차 산 정상까지 주거지가
확대됨에 따라 지금은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져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주변에는 1876년 개항 이후 들어선 호주 선교사 관련 유적들과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주택 등
근현대적인 역사 문화 자원들이 분포하고 있어 근현대사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산 정상에는 잘 정비된 증산 공원(甑山公園)이 1982년에 개장하여 시민들의
휴식과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증산 전망대'에 올라 '영도'를 바라보고~
이후 남파랑길은 '게이트볼장'을 지나간다.
(13:13) '증산 공원' 정문을 나서면 바로 앞쪽에 '동구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증산 공원' 정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좌측 축대 벽면에 '윤석중'의 동시 '넉 점 반'을
그림책 작가 '이영경'이 그린 그림이 벽화로 옮겨져 있다.
「넉 점 반」은 윤석중 선생의 1940년 작으로, 친근하고 깨끗한 우리말로
동시 고유의 리듬감을 잘 살렸을 뿐 아니라 독자의 허를 찌르는 재미난 반전 덕에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수작이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이라는 뜻으로 시계가 귀했던 시절, 지금 몇 시인지
알아보고 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을 놀이에 정신이 팔려 그만 잊어버리고는
해가 꼴딱 져서야 집에 돌아가 “시방 넉 점 반이래.” 외치는 능청맞은
한 아기의 행동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화가 이영경은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1993년부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인
1960년대의 농촌 마을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넉 점 반』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50년대 이전 세대의 이 '넉 점 반'은 '보릿고개'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보릿고개 시기에는 하루 세 끼를 먹을 양식이 없어 하루 두 끼로 때우기도 했는데,
아침을 희멀건 피죽으로 느지막하게 먹고, 점심은 건너 뛰고 저녁을 이른
네시 반경에 먹었기 때문에 '넉 점 반'이란 말이 생겨났다.
보릿고개는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던 음력 4∼5월의 춘궁기(春窮期)를 표현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맥령(麥嶺)이라고 한다.
농민이 추수 때 걷은 수확물 중 소작료, 빚 또는 그 이자,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대 부족하였다.
따라서 이때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등으로 끼니를 잇고 걸식이나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수많은 유랑민이 생기게 되고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황해(蝗害:메뚜기로 인한 농사 피해) 등으로 인하여 벌어졌던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며, 정약용(丁若鏞)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보릿고개가 1960년대 초까지도 이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부황증
(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지만,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넉 점 반 -윤석중
아기가 아기가 / 가겟집에 가서 /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 "넉 점 반이다."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 한참 서서 구경하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 한참 앉아 구경하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 한참 돌아 다니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 분꽃 따 물고 / 니나니 나니나 / 해가 꼴딱 져 / 돌아왔다. //
"엄마 / 시방 넉 점 반 / 이래"
'범내골 안창마을'을 바라보고~
(13:18) '성북 전통시장'을 지나간다.
산동네 주민들의 생필품이나 반찬거리를 해결해 주던 작은 시장에서
지금은 '웹툰 거리'로 탈바꿈을 하였다.
(13:23) '성북 고개'
성북 고개
수정동과 범일동을 넘던 고개로 아리랑을 부르며 올랐다고 하여 아리랑고개라고도 하는데
6. 25 전쟁 시절 타향민들의 애환이 많이 담겨 있는 한 많은 고개이다.
이후 남파랑길은 '상아 약국' 앞에서 산복도로를 따라 약 50m 정도 진행하여,
우측 '수정 동부교회' 방향으로 들어선다.
'아란야사(阿蘭若寺)' 갈림길에서 우측 계단길로 올라서고~
(13:30) 골목길 계단길을 올라서면, '동구 싱싱로드 산책길'이다.
동구 씽씽로드 산책길
부산역과 마주한 구봉산과 수정산의 숲과 도심의 경계를 따라
보광사에서 금수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동구 씽씽로드는 편백숲, 초량천 등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도심 속
하늘숲길로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걸을수 있다.
경사로가 많지 않고 전망대와 정자, 벤치 등 편의시설이
중간마다 설치되어 있어 노약자나 어린자녀도 쉬엄쉬엄 쉬어가며
걷기 좋아 가족나들이도 제격이다.
이곳에서 남파랑길은 이정표 따라 좌측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 나가면 '안창마을'로 연결된다.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하며 5분 휴식후 출발이다.)
이제부터 룰루랄라~
이후 계속해서 호젓한 산허리 탐방로를 따라 나가는데,
이정표 표시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13:41) '수성 아파트' 뒷길을 따라 진행하고~
'부산항' 일대가 잘 조망된다.
(13:47) '대한불교 조계종 황룡사'를 지나고~
흰꽃나도샤프란...
'수정해장국집'을 지나고~
영업중이면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며 쉬어갈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문을 열지 않았다.
아까비~ ㅠㅠㅠ
(13:53) 좌측 아래에 있는 '백운사'를 지나고~
우측 위 1.4km 떨어져 있는 장승조각 공원 입구에서 남파랑길은 계속 직진이다.
룰루랄라~
(13:58) '동구 등산 안내도'가 있는 갈림길에서 계속 직진이다.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리는 도로 우측 위로 조성되어 있는
'싱싱로드 산책길'인 테크 계단길로 올라선다.
(14:08) 수정 4동 산림초소/ 금수사 갈림길에서 우측 계단길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길 중간에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둘러서서 가운데의 이상한 물건을 보고 있다.
다음 계단 위로 올라서보니, 아하 멍멍이의 응아로구나! ㅎ
그렇게 계단길을 올라서서 '해수관음전'을 지난다.
우측 위로 '수정 2 배수지' 정문을 지나고~
(14:13) 남파랑길은 '구봉산 치유 숲길'로 올라간다.
보기좋은 꽃 '석산'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좌측으로 진행이다.
(14:18) 목교를 통해 '초량천'을 건너고~
친절한 이정표가 연달아 나타난다.
또 다른 목교를 건너고~
(14:25) '초량6동 산림초소'를 지나간다.
보기힘든 남파랑길 표지기~
등로 우측으로 보기좋은 꽃 '석산'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14:34) 싱싱로드가 거의 끝나는 지점쯤인 '월봉사' 입구 가로등 기둥에 붙은
남파랑길 빨강 표지를 보고 좌측으로 내려선다.
화엄사를 지나고~
전방에 보이는 고층건물이 부산항 바닷가 경치를 다 망쳤다.
(14:37) '월봉사'를 지나고~
이후 급경사 계단길을 내려서서 (14:40) '망양로'에 도착하고~
도로 건너편 전망대에는 '유치환의 우체통'이 자리하고 있다.
이 우체통은 1년 뒤에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이다.
유치환(柳致環)
시인 겸 교육자이자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소령이다.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외가인 거제에서 출생하였고, 초등학교 입학 전 경남 통영군 충무읍 본가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그는 극작가 유치진의 아우이기도 하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를 발표하였다.
부산 남 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 영상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도중,
1967년 2월 13일 수정동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망양로' 산복도로를 따라 금수사 방향으로 진행이다.
그렇게 산복도로를 따르면 정면으로 '부산 중앙공원 충혼탑' 상단부가 보이고~
(14:45) 우측위로 '친환경 스카이웨이 전망대'를 지난다.
(14:48) '구봉산 금수사' 입구 앞을 지나고~
게스트 하우스인 '이바구 캠프' 안내판 앞에서 산복도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지며 이어진다.
(이곳에서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부산역으로 이어지는 갈맷길이다.)
남파랑길은 '초량이바구길'과 같이 이어진다.
초량이바구길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로 2011년 부산시에서 산복도로 르네상스
1차년도 사업으로 부산역과 초량동 산복도로 마을을 잇는 골목길에서
다양한 역사적 소재와 이야기를 담아 조성한 길이다.
산복도로 마을은 6.25전쟁 피난민들이 부산역과 가까운 초량으로 몰리면서
구봉산과 수정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다.
깎아지는 산비탈의 달동네와 세상을 연결해주던 작은 골목들이
지금의 초량 이바구 길이다.
'초량 화신 아파트' 표지석을 지나고~
(14:57) '산복도로 갤러리'가 있는 'Y자' 갈림길에서
남파랑길을 좌측 도로로 내려선다.
친절한 이바구길 벽화와 이정표
당산 갈림길
(15:03) 부산 초량 168계단 모노레일 탑승구에 도착하고~
남파랑길 1구간 종점인 부산역 뒤편으로 부산 남항이 조망된다.
경사형 엘리베이터인 모노레일
모노레일 탑승객이 많아 168계단길을 걸어서 내려간다.
계단으로 내려서니 군데군데 관광객을 위한 포토존과 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15:09) 모노레일 출구로 내려와 지나온 168계단 길을 뒤돌아보고~
예전에는 물지게를 지고 저 계단을 오르내렸다는데~
당시에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노고는 어떠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바구길 맛집 소개~ ㅎ
'초량초등학교' 담장에는 '동구 초량의 삶과 마주 보기'란
'이바구' 길 전시 패널이 걸려 있다.
먼저 부산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초량초등학교 출신 한류스타인 가수 '나훈아'와 코미디언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을 소개하고 있다.
의료보험의 아버지이자 한국의 슈바이처로 추앙받는 '장기려' 박사와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시인 김민부,
의사이자 정치가인 박기출과 청마 유치환 안내판 앞을 지나고~
초량동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허정',
여성 정치가인 '박순천',
독립운동가인 '장건상'과 '박제혁' 패널이 붙어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곳 산복도로 초량 6동에서 살기 시작하여,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산복도로 말뚝이' 강영환 시인의
시 패널도 눈길을 끈다.
초량 초등학교 담벼락 끝 '이바구 길 안내도'를 지나고~
(15:14) 역사와 전통의 '부산 초량교회'를 좌측에 끼고 좌회전이다.
초량교회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교회로서, 1893년
호주 선교사 애덤슨(Adamson,A., 孫安路)에 의하여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서현(英署峴)에 있던 서당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삼았다.
이 교회는 1925년에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부임하면서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민족정신과 신앙의 융합을 이루었으며 또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진원지 구실을 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에는 삼일 유치원(三一幼稚園)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도 큰 기여를 한 교회다.
'초량 지구대' 앞에서 우회전하여 진행하고~
(15:19) '초량 전통시장' 앞 코사마트 갈림길에서 우회전이다.
'경주 국밥' 음식점과 '디노 호텔' 사잇길로 좌회전하고~
(15:22) 일명 텍사스 거리, 'TEXAS STREET' 아치형 간판을 통과한다.
이후 '부산역' 광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가
도로를 건너 '부산역' 광장으로 들어서고~
(15:27) '부산역 광장'
(15:30) 남파랑길 2코스 안내판은 '부산역' 광장 우측
'두리발 전용승강장' 뒤편에 세워져 있다.
'남파랑길 2코스' 안내판
오늘은 여기까지~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1구간 답사 마무리를 한다.
이후 부산역광장.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고,
67번 시내버스를 타고 개금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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