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10.29
코스: 부산역.광장(시점)-부산역풍물거리-세관삼거리-부산대교-봉래교차로-봉래골그린공원.입구
-봉래산둘레길-BMC와치공원-영도어울림문화공원.입구-중리초등학교-와치로.절영로사거리
-중리상가횟집촌.입구-중리해변-공사중.우회-75광장-흰여울해안터널-영도절영해안산책로
-영도절영해안산책로.입구-남항브리지수변테마공원-남항방파제주차장-깡깡이예술마을거리박물관
-현인.노래비-영도대교-영도대교.버스정류장(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6.29km (두루누비기준 14.5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45분
▶ 갈때 : 경남.사송집에서 부산.노포동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1호선 타고 부산역에서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같은날 부산3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2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남파랑길 부산2구간 궤적'
'부산역 6번출구'로 나오고~
'부산역 광장' 국제 로터리 클럽에서 세운 '생명이 출렁이는 부산' 표지석
'부산역 광장' 우측 '두리발 전용 승강장' 뒷편에 세워져 있는 '남파랑길 부산02코스 안내판'
(06:50) 두루누비&트랭글 앱켜고 남파랑길 2구간 시작이다.
'부산역 풍물거리'로 들어서고~
이후 '부산역' 선로 우측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동구 초량동' 뒷골목을 따라 진행하고~
(06:55) '영주 고가교' 밑을 지나면~
'동구 초량동'에서 '중구 중앙동'으로 행정계가 바뀐다.
'한국선원센터' 건물을 지나고~
(07:15) '세관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서, 세관을 좌측에 끼고 계속 직진 방향으로 진행이다.
세관 벽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길게 그려져 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
(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 ·일 양국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여,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조선통신사 행렬도(朝鮮通信使行列圖)
일본에 파견한 조선의 외교사절인 조선 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행렬의 순서나 의장(儀仗)의 형색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반차도(班次圖)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 통신사들을 매우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본의 사절단이 부산에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선 통신사 일행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대마도까지 안내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는 대마도 영주가 안내하였다.
즉, 대마도에서 성대한 영접 행사가 끝나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여러 작은 섬을 거쳐
일본의 본토에 상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일본 각 지역의 영주들과 에도에서 파견된
영접 책임자와 호위 무사들이 통신사 일행을 영접하였다.
조선 통신사들이 머무르는 곳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통신사를 만나보려고 했다.
조선 통신사의 인물 구성은 정사, 부사, 종사관과 통역, 군관과 병사, 의원, 화가, 인쇄공,
악공 등으로 하고, 일본인들은 사절단, 대마도 영주, 각 지역의 영주, 호위 무사,
그 밖의 인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림을 보면, 조선 사절단 1명당 5-10명가량의 일본인들이 수행하고,
큰 깃발을 날리며 행차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 사절단을 얼마나 환대했으며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인 수행원들이 짊어진 많은 짐들을 볼 때,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할 때,
상당한 양의 선진문물을 전달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항 연안여객 터미널'을 지나고~
(07:21) '부산 항만공사'의 남쪽 출입구를 지난다.
'부산 항만공사' 부두 바라보고~
'동해안 국토 자전거길' 안내판
'동해안 국토 자전거길' 안내판 옆 계단길을 올라 '부산대교'로 올라간다.
(07:27) '부산대교' 좌측 갓길로 이어지는 보행로를 따라 '부산대교'를 건너고~
앞쪽으로 '영도 봉래산'을 바라보고~
'부산대교' 위에서 좌측으로 바라본 '부산항'~
'부산대교 / 준공 1980년 1월 30일' 머릿돌 앞에서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길 따라 내려간다.
'부산대교'에서 내려서면 행정구역은 '영도구'다.
이후 '부산대교'와 나란히 이어지는 보행자 도로를 따라서 진행하고~
(07:40) '봉래 교차로'에 도착하고~
'영도구 방문을 환영합니다'란 반원형 조형물이 인사를 한다.
이후 '봉래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영도 고가교' 좌측 밑으로 진행하고,
'교통순찰대' 버스정류장 앞에서 우측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횡단보도를 건넌후 좌측으로 진행하여, '영도 고가교' 메인 도로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봉래 언덕길' 오르막길을 따라 도로 우측 편으로 '영도센트럴 에일린의뜰' 아파트 정문을 지난다.
(07:52) '봉래 언덕길'에서 'T자' 도로가 지나는 '하나길'에 올라서고~
도로를 건너, 직진 방향의 '산유화길' 동네 계단길로 올라간다.
그렇게 '산유화길' 좁은 골목 오르막길을 지나 '동백꽃길' 도로에 올라서고~
'봉래 치안센터'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유림아파트 방향으로 몇 발자국 진행하여,
(07:56) 좌측의 '봉래골 공원' 입구 골목길로 올라간다.
'봉래골 그린공원' 안내판
이후 급경사 오르막 골목길을 올라서서 '봉래골 그린공원 입구 일주문을 통과하고~
봉래산 둘레길 안내판
(08:00) '봉래산 약수터' 쉼터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하며 잠시 쉬었다 간다.
휴식후 다시 출발!!!
약수터 쉼터 돌탑2기를 지나고~
테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항'~
애매한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남파랑길 화살표시~
(08:09) '봉래산 둘레길' 팻말이 붙어있는 펜스 옆 탐방로를 따르고~
이어지는 남파랑길은 '해돋이 전망대' 방향이다.
(08:12) '주막집' 앞을 지나고~
생각 같으면 막걸리 한잔하고 가고싶지만 갈 길이 멀어 입맛만 다시고 간다.
(08:15) '청학마루 해돋이 전망대'
갈림길 이정표에서 '청봉 약수터' 방향으로 간다.
(08:20) '청봉 약수터'를 지나고~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남파랑길 화살방향 표시를 따라 우회전하여 산으로 올라간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직진 방향의 '고구마 시배지인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으로
남파랑길은 가지 않는다.
급경사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08:30) '봉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임도 '벚꽃길'에 올라서고~
이곳에서 남파랑길은 좌측 아래로 내려선다.
우측 임도 오르막길은 봉래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룰루랄라~
임도 좌우로 '털머위'가 노란 꽃을 활짝 피웠다.
(08:35) '해련사'를 지나고~
입구에는 '해련사'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지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해련사 동래부 인상'과 '해련사 장엄의식구'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08:36) 임도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리는 갈림길에서, 남파랑길은 우측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과 '영도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이
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 후일 남파랑길 숙제로 남긴다.
이후 우측으로 진행하여, 펜스 사잇길을 따르다 산불초소 앞에서 우측 펜스 문을 통해 나간다.
큰 바위 옆 테크길을 따라 진행하고~
너덜 지대 낙석방지용 펜스를 지난다.
(08:46) '고신대학교' 갈림 이정표 앞에서 남파랑길은 '함지골청소년수련관' 방향이다.
'고신대학교 로뎀관' (행복기숙사)을 지나고~
(08:54) 삼거리갈림길 이정표에서 남파랑길은 좌측 'BMC와치공원' 방향으로 내려선다.
또 다른 삼거리갈림길 이정표에서 남파랑길은 좌측 'BMC와치공원' 방향이다.
(09:01) 부산도시공사(BMC) 와치공원 입구
와치공원
2012년에 부산도시공사(BMC) 소유의 임야인 동삼동 510번지 일원에 조성된
소규모 공원으로, 이전에는 쓰레기 무단투기와 우범지역으로 방치돼 왔던 곳인데,
영도구에서 새롭게 초화와 나무를 심고 운동기구와 공원 벤치 등을 갖추어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와치 종합사회복지관'
(09:04) '영도 어울림 문화공원' 입구를 지나고~
(09:10) '중리 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난다.
(09:14) 부산역/ 태종대/ 송도로 갈리는 사거리
('절영로'와 '와치로'가 갈리는 사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우측이다.
(예전의 남파랑길은 이곳에서 직진하여 '하리선착장'을 지나 '태종대'까지 둘러가는
코스인데 중리산 공사로 인한 통제구간이라서 경로가 많이 단축됐다.)
이후 남파랑길은 '절영로'를 따라 '중리 해변'으로 이어진다.
(09:16) '중리북로'와 갈리는 삼거리에 '대형 말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09:24) '113번 버스 종점'을 지나고~
(09:27) '중리상가 횟집촌' 입구
'중리항' 방파제 등대
(09:30) '해양경찰 중리 출장소' 앞을 지나고~
'중리 해변' 중리노을전망대를 지난다.
지나온 '중리 해변' 뒤돌아보고~
아니 뭐야???
태풍 흰남로 피해로 절영해안산책로 출입을 통제한다고~ ㅠㅠㅠ
일단 가는데까지 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되돌아나와 우회하기로하고 GO GO GO~
(09:36) 85광장 & 절영전망대 갈림길 이정표
절영 쉼터인가???
주위 나무에 가려져 전망은 별로다.
장미없는 '장미터널'을 지나고~
해안으로 내려서서, 철계단길을 올라간다.
(09:46) '해안 누리길 절영전망대'
'생도(주전자바위)' 땡겨보고~
예전 낚시에 빠져있을때 밤낚시 자주갔던 '목도(나무섬)'도 땡겨보고~
다음 남파랑길 3구간에 지나야할 '암남공원 & 두도' 바라보고~
아! 여기서부터는 아니다.
우회길을 따라 '75광장'으로 올라간다.
(09:52) '사자정(獅子亭)'이란 2층 누각이 있는 '75 광장'으로 올라서고~
'75광장'은 목장원 앞 해안 쪽으로 돌출된 곳에 조성된 광장으로,
1975년에 조성되었다 하여 75광장으로 이름 붙여졌다.
'사자정(獅子亭)' 2층 누각도 정비중이라 출입금지다.
(09:53) '목장원'을 지나고~
다시 해안길로 이어지는 계단길을 따라 내려간다.
해안가로 내려서니 태풍 흰남로 피해로 해안 탐방길은 엉망이다.
저 갯바위로 낚시꾼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10:00) '대마도 전망대'
태풍 흰남로 피해로 엉망이 된 해안 탐방길을 조심조심 진행하고~
'남항 어촌계' 해녀촌 축대도 완전히 파손되었다.
뒤돌아본 해안누리길
(10:13) '흰 여울 해안 터널'
과거 이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우측의 돌계단으로 올라 '이송도 전망대'를 지나
터널 입구 옆 '피아노계단'으로 내려가도록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흰 여울 해안 터널
절영해안산책로 근처 피아노계단과 파도광장 사이 급경사 계단 구간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약자들의 보행 편의 제공을 위해, 해안 암벽에 약 70m 터널을 뚫어 2018년 12월
흰 여울 해안 터널을 개통하게 되었다.
터널 내부에 인조암 시공, 광섬유 판석 조명, 포토존 등을 설치하여 구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방문하기 좋은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후 '흰 여울 해안 터널' 안으로 들어서서 진행하면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10:16) 터널 반대편 출구로 나가고~
흰 여울 해안 터널은 영도구민의 염원을 모아 방문객들이 절영해안 산책로를 보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총 사업비 39억 6천만 원으로 2017년 8월에 길이 70m의
암벽 굴착공사에 착수하여 2018년 12월 준공, 개통하였습니다.
절영해안 산책로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과 함께, 터널 내부의 인조암을 타고 흐르는 조명과
사랑의 포토존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2019. 3. 11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
예전 '흰여울 해안 터널' 개통 전 오르내렸던 '피아노 계단' 바라보고~
시간만 있으면 '피아노 계단'으로 올라가 '영도의 명소'인 '흰여울 문화마을'을 탐방했을텐데
다음에 별도로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더 들러 보아야겠다.
계속해서 '절영해안 산책로'를 따라 진행이다.
(10:30) '영도 절영해안산책로' 입구 갈맷길 안내판 & 절영해안 산책로 종합안내판
이후 남파랑길은 '절영 해안산책로'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남항 방파제' 방향으로 간다.
(10:32) '남항방파제' 위로 올라서서, 남항대교를 향해 진행하고~
지나온 '절영 해안산책로'를 다시 한번 더 뒤돌아보고~
'남항대교' 밑을 통과하여, '브리지 수변 테마공원' 옆 방파제 길을 따라서 진행이다.
적색 등대가 서 있는 '부산 남항 방파제'
(10:45) 남항 방파제 끝에서 우회전하여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남항 방파제 주차장'을 지난다.
(10:50) '국제선 용품 유통센터' 건물 앞을 지나고~
(11:00) 남파랑길은 '깡깡이 마을' 갈림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진행이다.
'깡깡이 예술마을'의 독특한 벤치
배 표면에 슨 녹이나 조개같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깡깡거린다고 하여 붙여진 '깡깡이마을'은 대평동의 조선소 지역을 일컫는다.
억척스런 대평동의 '깡깡이 아지매'의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듯 어수선한 조선소 골목길이 이어진다.
(11:10) '깡깡이 예술마을 공작소'
'한눈에 보는 배의 구조' 설명판 벽면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 거리 박물관' 벽보 조형물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 거리 박물관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 어선들은 조선의 해안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았고,
영도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폭풍을 피하거나 기다리기 적합했던 대풍포(待風浦, 깡깡이 마을의 옛 이름)를
어선을 수리하고 식수를 공급받는 곳으로 이용하면서 깡깡이 마을에는 조선소나
선박수리 관련 업체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887년 고베 출신 일본인 조선사업자인 '다나카 와카지로(田中若次郞)'는 자갈치 해안에서
목선 제조업으로 출발하여 1912년 현재 영도 대평 초등학교 자리에 목선을 만드는
'다나카 조선소'를 설립했고, 대퐁포 일대가 매축된 후 현 우리조선(주)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다나카 조선소를 대한민국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로 보는 이유는 바람이나 증기로
추진력을 얻는 방식이 아닌 엔진으로 동력을 얻는 선박을 최초로 개발하고 보급한 곳이기 때문이다.
다나카 조선소 자리는 《대양조선철공》, 《구일조선》, 《남양조선》, 《유진조선》, 《에스엔케이조선》
으로 사업자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가 현재는 《우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오고 있다.
해방 이후 다나카 조선소를 비롯해 대평동에 있던 조선소를 불하 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깡깡이 마을을 7~8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성장시켰다.
(11:16) '영도 대풍포'
'깡깡이 안내센터'를 지난다.
깡깡이 안내센터 - 신기한 선박 체험관
19세기 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선소가 세워졌던 영도 대평동(남항동)은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로서 다양한 근대산업유산과 생활문화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녹슨 배의 표면을 벗겨내는 망치질 소리에서 유해하여 '깡깡이 마을'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과 독특한
산업현장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기한 선박 체험관은 깡깡이 마을의 물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인선을 활용하여
다양한 예술가들의 상상이 더해진 입체적인 선박체험공간이다.
선박 안과 밖의 조경 '바다정원(Floating Garden)'은 녹지가 부족한 마을에 생기를 더하는
선상 휴게공간이기도 하다.
(11:21) '영도 대풍포 매립지' 표지석
영도 대풍포 매립공사(影島待風浦埋立工事)
원래 「바람이 기운차게 일어나는 포구」라는 의미로 풍발포(風發浦)라고도 불렸던 대풍포는
1900년대 초부터 일본 어선들이 몰려들면서 변화하게 되었다.
3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어선들이 큰 풍랑을 피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영도 대풍포는 배를 정박하기 좋았고 왜관이 가까이 있어 급수나 선박의 수리가 용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곳은 자연적인 만의 형성으로 풍랑을 피할 수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포(待風浦)라는 지명이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부산 주재 일본 영사는 한국 정부의 고관에게 대풍포 일대 사용을 요청하였고,
그 고관은 토지의 소유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구두로 사용을 허가하였다.
이에 이 지역 한국인 소유자가 동래부에서 대풍포 일대의 토지 소유 증명서를 발급받아
한양으로 올라가 정부 당국에 소원하였으나 정부에서는 모두가 모른다는 핑계로 일관하였다.
결국 대풍포 일대의 개인 소유 토지는 일본인 전관 거류민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 일본인 시무라[志村]라는 인물이 대풍포를 매립하려고 일본 거류민단의 승낙을 얻어
매립권을 가지고 최초로 매립을 시도했으나 매축 공사를 시작하지 못했고, 또 다른 일본인
오사와[大澤]라는 사람이 매립권을 양도받아 1916년 매축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6월 준공하였다.
10년에 걸친 장기 공사였지만 구체적인 공사 진행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영도 대풍포 매립 공사에서 총 132,660㎡가 매립되었다.
현재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대교동, 남항동에 포함되는 이 일대는 대풍포 매축 공사의
완성과 이후 1930년대 식민지 공업화에 편승하여 여러 개의 조선소들이 들어서는 등
공업지대로 변신하였다.
다음 구간 지나야할 용두산공원& 부산타워가 조망된다.
'영도대교'
(11:26) '영도대교' 직전에서 우측 계단길로 올라서고~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비와 현인 동상이 있는 소공원
'영도대교'를 건너고~
'영도대교'를 건너면 '영도구'를 지나 다시 '중구'로 행정계가 바뀐다.
(11:30) '영도대교'를 지난후 좌측 아래에 있는 '유라리광장' 들러보고~
지나온 부산의 명물 '영도대교'를 바라보고~
-영도대교의 탄생-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부산항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영도,
그 영도와 부산을 긴밀하게 이어주는 영도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유일한 도개식(跳開式) 교량이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은 영도에 조선소를 지어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그런 사유로 1931년 영도대교 건설 계획이 세워졌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해운업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부산항을 드나들던 1,000t 급 이상 선박은 돛이 다리에 걸리기 때문에 우회해야만 했던 것,
태종대를 돌아 부산항으로 오자면 1시간이 더 소요되고 그만큼 비용도 커졌다.
고심 끝에 내륙 쪽 31m 30cm를 들어 올릴 수 있게 설계, 큰 배들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시공했다.
3년간의 대공사, 용미산(옛 부산시청 자리)를 깎아 매립했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는 한국인과 중국인들로 작업 도중 바다에 떨어져 숨지는 등 희생이 잇따랐고,
산을 깎다가 산사태가 나 많은 노무자들이 비명에 가기도 했다.
그래서 다리 공사 내내 밤이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
1934년 11월 다리가 완성되었다.
당시 부산 인구는 20만 명이었는데 6만여 명이 몰려나와 개통식을 구경했다.
다음 해 2월에는 전차가 개통돼 교량 위로 다녔다.
-한국전쟁과 영도대교-
영도대교는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애환의 장소이기도 했다.
부산으로 내려오던 피난민들은 만약 헤어지게 되면 영도대교에서 만나자고 약속해
실제로 이산가족을 면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다리에서 떨어져 고단한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이후 생활고까지 겹치자 투신자살자는 더욱 늘어갔다.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는 바로 이 무렵의 영도대교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노래가 한창 유행일 때 다리 이쪽 저쪽에는 [잠깐만!]이라는 팻말이 나붙었다.
자살 방지용이었다.
하지만 큰 효과가 없자 부산시경에서는 경찰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영도대교의 재탄생-
영도대교는 완공 이후 영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량으로 육상 교통의
중추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개될 때마다 영도-내륙간 교통정체의 큰 요인으로 지목된데다
당시 20여만 명의 영도 인구에 공급할 상수도관을 다리에 부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그런 사유로 1966년 9월 1일 도개를 멈추게 되고, 급기야 다리의 노후화와
관리 비용의 부담으로 인해 철거냐 보존이냐의 양 갈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면서
영도대교는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발판을 마련했다.
-영도대교 전·후 영도의 변화-
- 주거지 확대 : 4,524가구(1932년 영도대교 개통 전) / 57,451(2013년 10월 기준)
- 인구 확대 : 20,284명(1932년 영도대교 개통 전) / 136,554명(2013년 10월 기준)
-1934년 영도대교와 2013년 영도대교의 차이-
- 다리 너비 : 18.3m(4차로) / 25.3m(6차로)
- 도개 시스템 : 50hp(유압식 전동기 2대) / 215hp(유압식 전동기 2대)
- 도개 각도 : 80° / 75° - 도개 속도 : 240초(고속 90초, 저속 240초) / 120초
- 통과 선박 : 1,000톤 / 통과 불가 - 공사비 : 360만 원(2010년 환산 360억 원) / 1,000억 원
- 도개 횟수 : 7회(오전 3회, 오후 4회) / 1회(매일 오후 2시)
(연합뉴스에서 퍼온 사진)
도개 행사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년 4개월동안 잠정 중지했다가
2022년 6월11일부터 매주 토요일 14시(오후 2시)에 재개되었다고 한다.
(11:35) '영도대교' 버스정류장 옆 '남파랑길 부산 구간 03코스' 안내판
오늘 1차로 목표했던 남파랑길 2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영도대교' 버스정류장 앞에서 '남파랑길 2코스'를 종료하고,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남파랑길 3코스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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