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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한시.법어

괴정에서 우연히 읊다(槐亭偶吟)

나를 위해 늦봄에 핀 꽃 / 천경대사(天鏡)

 

默對靑山坐   (묵대청산좌)

山嫌白髮來   (산혐백발래)

巖前一朶花   (암전일타화)

慰我晩春開   (위아만춘개)

 

조용히 푸른 산 마주하고 앉으니

산은 백발이 왔다고 싫어하나

바위 앞 한 떨기 꽃은

나를 위로하려 늦봄에 피었구나

 

 

"괴정에서 우연히 읊다(槐亭偶吟)"라 한 시이다.

늙은 괴목 앞에서 우연히 대하게 된 한 순간의 광경을

그저 버릇처럼 사진기를 들이대는

한 풍경화 촬영사처럼 다가가고 있다.

 

시의 소재라야 나와 청산 그리고 꽃 뿐이다.

지나던 나그네가 정자에 올랐을 때의 한 순간으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이다.

 

지금 이 시의 첫 구에서

조용히 청산을 보고 앉았다 함은 이러한 나그네의 일상성이다.

다만 조용히 앉았다 함이 의도적 묵상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조용히라는 한 마디가

이 시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전제로 아주 중요한 한 자이다.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산이다.

그저 무심인데, 이 무심을 유심의 의도로 대해 주는 청산이다.

백발이 왔다 하여 싫어한다는 것이다.

 

유정의 나는 무심이 되어 있고,

무정의 산이 오히려 유심한 주체가 되었으니

이 또한 역설의 극치다. 이런 광경을 연민스럽게

여기는 한 떨기의 꽃이 나를 위로하고 나섰다.

 

이미 봄이 다 지나 모든 꽃이 사라지는 계절인데,

철 늦음을 잊고 피어 있는 것이다.

 

꽃으로서야 늦다 이르다는 생각없이 피어 있는 것이지만,

산에게 푸대접을 받은 나로서는

이 철 늦은 꽃이 어느 때보다 반가웠고

그 반가움으로 바로 지금

이 산의 푸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저 피어 있음으로 해서 꽃일 수밖에 없는 저 무정물을

이제는 내가 나의 서글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유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괴수나무 정자라 하였으니

여기의 꽃이 괴수나무꽃일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이 꽃은 늦봄보다는 초여름에 피는 것이 당연하니

그런 점에서 이 꽃 또한 일상의 개화이다.

 

이렇듯 일상의 평범함을 순간의 유의적 각별한 순간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선사들의 평상심이 진리라는 깨우침의 자세요,

시인의 안목으로는 일상사 모든 것을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환형시키는 예술적 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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