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은 산에서 죽어야 하는가?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산에서 조난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접할 때 이야기다.
그런데 근자에 지방에서 간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서, 얼마 뒤에는 또 다른 팀이 K2에서
그야말로 세계1, 2위 최고봉에서 공교롭게 3명씩 조난사를 당했다고 한다.
어째서 산악인들이 이렇게 그 고소에서 죽어야 했는지 새삼 그 문제를 되새기게 된다.
히말라야는 5~6월이 프레 몬순기로 기상이 비교적 안정되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등반대가 몰린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영광과 비극의 명암이 교차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인류 최초로 8000m 고도를 넘어선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비롯해서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와 독일의 낭가파르바트 등의 역사적 초등은 모두 이 무렵의 일이다.
그들은 다행이 인명피해 없이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6년 K2에 운집한 9개 등반대에서 13명이나 희생자를 낸 일이나,
1996년 에베레스트에서 이른바 상업등반대가 대장 이하 8명의 사망자를 낸 일들은
히말라야 등반사에 기록적인 조난사로 남게 됐다.
이렇게 히말라야 고산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까닭은 어디 있는가?
등반에서 불상사는 그토록 불가항력적인 것일까?
적어도 히말라야 고소를 겨냥하는 등반대에는 저마다 대비와 각오가 되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정을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모두 사전에 검토되고 충당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새삼 그들에게 어떤 부실한 점을 따지고 문제 삼기는 어렵고 불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원정에서의 인명피해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를테면 등산의 특수성,등산 세계의 논리와 윤리는 특별한 것이며 따로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문제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등산의 특수성은 한 마디로 고도 지향성에 있다.
산악인은 높이를 추구하는데, 따라서 어려움이나 위험과 싸우고 이를 극복하는데 오직 보람을 느낀다.
이것은 사실 상 등산의 본질로 등산 초창기부터 등산가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온 것이지만,
고산군에서 미답봉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등산에서 영광을 차지하는 일은 등산 무대가 미지의 세계였을 때 이야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로 가는 등반대의 대열은 끊일 줄 모른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노리며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그 세계에 뛰어들 것인가?
히말라야는 산악인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산악인이라면 누군가 한번 가보고 싶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향수가 짙은 곳이다.
한국 산악계에 히말라야 러시가 시작된 지도 20여 년이나 되고 그 동안 지구 중의 오지,
오지 중의 오지를 체험한 자 수천에 달한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 산악인들이 선배의 뒤를 따르고 그들 자신 또한 등산가로서의
캐리어를 풍족하게 장식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히말라야는 그만큼 그들에게 매력적인 존재다.
이번에 조난을 당한 대구와 포스코의 히말라야 등반대도 그러한 시류를 탄 패기 있는 젊은 세대였다.
결국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추구는 종교인들의 성지 순례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지구상에는 더 이상 공백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말라야에는 태초의 공백지대나 다름없는 곳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세계는 등산 정보가 제 아무리 풍부했고 등산기술을 비롯해서 관련 장비와 식량 들이
크게 개량 개선됐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로 불가침적인 대자연이다.
말을 바꾸면 히말라야 고산지대는 특유의 논리와 윤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점이 등산 세계의 특수성이며 매력이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초등을 성취한 영국 원정대를 무조건 높이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은 그들 앞에 길을 닦아준 32년에 걸친 선구자들의 희생과 노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원정대를 이끌었던 존 헌트 대장은 히말라야 등반의 어려움을 세가지로 보았다.
즉 기상과 고도와 등반 자체의 어려움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세월과 문명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오로지 산악인들이 고산을 보는 안식과 이에 대처하는 지혜가 더욱 중요하다.
이번에 보도된 에베레스트와 K2에서 우리 등반대의 조난사건은
한 팀의 등반대장과 부대장이 희생된 점에서 더욱 애통을 금할 수 가 없다.
그런데 그들 조난의 직접적인 원인을 알 길 없지만 대체로 히말라야 고도에서는
등정시간이 늦어도 눈앞의 목표를 놓칠수가 없어 등행을 계속하다 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
1996년 상업등반대 대참사의 직접적 원인은 무조건 돌아서서 하산하도록 원칙을 지킨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지난날 안나푸르나 정상등정하고 소식 끊긴 지현옥의 경우와
1979년 고상돈 일행이 매킨리 하산길에 추락사한 일을 잊지 못한다.
이 모두가 정상만 집착한 나머지 등행 시간에 차질을 빚은데 원인이 있었나 보다.
히말라야 에서의 조난은 그 유형이 눈사태와 고산병 그리고 활락사 등이지만
이것들보다 가슴 아픈건, 정상을 눈앞에 두고 빚어진 경우들이다.
여기에는 특히 근년에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고산논리가 있는데,
그것이 `고도보다는 태도'라는 등산정신이다.
이 논리가 비중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에베레스트와 매킨리 각각 초등40주년과
80주년을 맞으며 전자의 경우 그 정상에 하루 45명이오르고 후자에서는 그 등반 시즌에
15명이 죽는 일찍이 없었던 희희비비 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드디어 고도 지향성에 대한반성과 새로운 평가의 필요성이 제고됐다.
그러나 1996년 에베레스트 대참사 주역의 한 사람인 피셔 대장이 사람들에게
에베레스트 행차를 권유하며 "it is not the altitude that`s important, it`s your attitude"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고도보다 태도'라는 말의 뜻은 전혀 다르다.
이 때 피셔는 고산 경험이 부족해서 망설이는 사람에게 고도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니 에베레스트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고도보다 태도'라는 말의 원래의 논리에는 고도 추구를 생명으로 하는 알피니즘이
이제는 등정보다 그 과정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새로운 등산 의식이 있다.
높이 2000m도 안 되는 산악지대에서 자란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는 만년설에 덮힌
고고하고 웅대한 히말라야 산악지대가 한없이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의 히말라야 개척의 역사도 벌써 40년 가까운 장년기를 맞고 있으니
우리가 고산을 보는 시야와 고산을 보는 태도도 옛날 같을 수는 없다.
기어코 정상에 올라 태극기와 단체기를 높이 들고 쾌재를 부르던 지난날에서 이제는
장엄한 태고적 자연성을 간직한 세계에서 평지와 다른 체험을 통해 자기 인생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하는데 히말라야를 찾은 보람을 느껴야 할 것이다.
산은 결코 도망가지 않는다.
이번에 등정 기회를 놓쳤다면 다시 기회가 있으리라는 산악인다운 비전과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
자연은 영원하고 인생 또한 길게 보자는 이야기다.
아무리 산악인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산보다 인생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산에 간다.
-글 김 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이 글은 mountain지 산악칼럼에서 퍼왔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분의 글이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몇 년 전의 칼럼이지만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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