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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여행

2015.7.19 문경.가은/ 봉암사

2015.7.19

 

가은읍 상괴리에서 봉암사로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희양산

 

출입을 통제하는 입구를 지나 산문안으로 들어간다.

 

봉암용곡이 시작되는가?

 

 

 

봉암사(鳳巖寺) 일주문(一柱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1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 편액

 

내부에는 용 무늬를 화려하게 그려놓았다.

 

일주문 뒤쪽에는봉황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남무아미타불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바위

 

 

계곡을 건너가는 시멘트 다리가 나타나고

 

속세를 벗어나 불국(佛國)으로 들어서는 피안교인가?

 

침류교

 

다리에는 龍湫洞天(용추동천)이라고 쓰여 있다.

 

침류교를 건너니 2층 누문(樓門) 형식의 남훈루(南薰樓)이다.

 

대부분 절집의 누각이 오르막 지형에 누문을 두어 그 아래로 올라서는 형국으로

금당으로 가게끔 되어있는데 이곳은 평지에 울타리처럼 세워진 모습이다.

남훈루의 뜻은 알수 없지만 추측을 하자면부처님의 법향이 풍기는 남쪽의 문이 아닐까???

 

봉암사(鳳巖寺)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전통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問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헌강왕 5)당나라로 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 뒤 935(고려 태조18)에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 1431(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헌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申和)가 중건하였고,

1703(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이 걸려있지 않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이 있는데,

창건연도는 미상이나 1871(고종 8)에 유겸이 중수 하였다.

 

제일 먼저 대웅보전으로 가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대웅보전(大雄寶殿) 내부

 

봉암사의 중심법당이다.

내외 벽에는 화엄변상도 벽화가 잘 장엄되어 있고,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 대세지보살입상이 협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후불탱과 신중탱은 목각탱이다.

대웅보전에 모셔놓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입상,

후발탱은 목각탱으로 8대보살 10대 제자 등이 도열하고 계신다.

제일 상단 좌우 끝에는 사천왕상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좌우로 2. 밤에 관솔불을 밝히는 노주석이 있는데

 

제법 오래된 석물이다.

 

보림당(寶林堂)

 

주지실과 선방이 있다.

 

 

보림당 건너 편에 대칭으로 마주하는 건물은 역시 승방인 성적당(惺寂堂)이다.

봉암사의 전각들을 보면 높이에 따라 대략 3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낮은 위치인 하단(下段)에는 남향루를 중심으로 설선당과 해회당 등의

선방과 요사가 있고, 중단(中段)에는  보림당과 성적당, 조실스님의 거처인 동방장,

그리고 봉암사 삼층석탑과 범종각이 있으며, 가장 높은 위치의 상단(上段)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 조사당과 태고선원 등이 있다.

 

극락전(極樂殿)

 

신라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왔을 때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전각으로, 각연 결구수법이 독특한 건축물이다.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국내에 현존하는 단 2개의 목탑형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수차례에 걸친 봉암사의 대화재 속에서도 소실을 면하였으며,

다른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린 임진왜란의 병화 속에서도

이 극락전만이 건재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다른 사찰 건물들을 다 태운 왜병들이 극락전에 불을 붙이기 위하여

불타는 장작개비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더니 장작개비만 그냥 타버릴 뿐

신기하게도 극락전에는 불이 붙지 않아 왜병들이 극락전 소각을 단념하였다는 것이다.

내부에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붕을 수리했는지 망와에 소화(昭和) 16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1991 3 2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5호로 지정 되었다가

2008 9 3일 보물 제1574호로 변경되었다.

봉암사에서는 가장 오랜 건물이다.

 

비비추

 

지증대사 적조탑과 적조탑비

 

지증대사 적조탑

 

보물 제137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서 신라 헌강왕 8(882)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식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된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38

이 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서

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두는 1개의 뿔을 장식한 용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앙련과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특이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성기의 석비이다.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으며,

비의 높이는 2.73m 너비는 1.64m이다.

 

지증대사(824~882)

경주김씨로 17세에 부석사의 경의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말년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헌강왕 7(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동왕 8(882)에 입적하였다.

왕은 시호를 지증, 탑호는 적조라 내렸다.

 

금색전(金色殿)

 

금색전이란 금색인을 모시는 집이며 금색인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색전은 불타 없어진 것을 1955년에 다시 세운 전각이다.

불상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수염을 휘날리며 호위하고 있고 위에는 지혜의

문수보살과 실천행의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코끼리와 사자가 올라 앉아 있다.

법당에는 통견차림으로 지권인을 한 화엄경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금색전 건물의 뒷편에는 대웅전이라는 멋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색전이 이전에 대웅전이었다는 걸 짐작 할 수 있는데,

언제부터 대웅보전이란 건물에게 지위를 넘겨 주었는지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169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범종루

 

희양산문태고선원(曦陽山門太古禪院)

 

진공문(眞空門)

 

양 기둥의 주련에는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고 적혀 있는데

이 문 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知解)를 간직하지 말라.

이 말은 『전등록』 제9권에 전하고 있는 중국 평전보안(平田普岸)선사의 설법인데,

선승들의 법문에 많이 인용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다.

보안선사가 말하는 이 문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집으로 되돌아 가는

깨달음의 문을 말하고 있는데, 각자 본래심의 깨달음 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알음알이나 사량 분별심이 없도록 하라는 법문이다.

한 마디로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莫妄想)는 말이다.

 

태고선원의 동문인 묘유문(妙有門)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면서 존재하는 문인가???

 

봉암사결사(鳳巖寺結社)”

1947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향곡 월산 종수 보경 혜암 도우 성수 법전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규약(共住規約: 선원 청규)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1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선맥을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온 명찰로서 과거의 화려했던 선풍(禪風)

진작(振作)하기 위해 지금도 백여 명 눈 푸른 선납(靑眼禪納) 대중이 상주하며

용맹정진하고 있는 동방제일의 수행성지(修行聖地)이다.

鳳巖曦陽選佛場 (봉암희양선불장봉암사 희양선원 선불장에

靑衲何關作向上 (청납하관작향상청납은 어느 공안에 향상일구를 짓는가?

月峰寒泉飄梅香 (월봉한천표매향월봉의 시린 샘에 매화 향기 흩날릴 때

歸鄕當牛報劫恩 (귀향당우보겁은고향에 돌아가 소가 되어 시은에 보답하리.

하루 4차례에 걸쳐 12시간 참선수행이 이뤄지는 서당(西堂:태고선원)의 결사(結社) 

새벽 1시 기상, 오후 11시 취침(2시간 수면)하는 일과로 이루어 진다.

새벽 2시 입선(入禪)을 시작해 오전 5시 방선(放禪), 오전 8시 입선,

11시 방선, 오후 2시 입선, 4시 방선 및 청소, 오후 6시 예불 입선,

10시 방선으로 진행되는 치열하고도 극한의 한계를 넘나드는 참선수행이다.

결제는 3개월을 정진기간으로 정하고 있으나 서당의 결사는

10개월을 특별정진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태고선원 합각면에 그려진 하얀 코끼리는 대행보현보살의

실천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백두대간 구왕봉

 

산 전체가 통바위로 되어 있는 희양산

 

희양산 산정에는 40m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요사채

 

 

동방장(東方丈)

 

동방장은 조실스님이나 노장, 대덕스님들이 머무는 처소인 염화실이다.

이곳에는 봉암사 수좌이신 적명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적명스님은 출가한 지 50여 년이 되어가는 선풍높은 구참수좌다.

봉암사 조실 스님의 직책을 한사코 사양하고 수좌로만 남아 있겠다고 했다 한다.

스님은 50여 년의 출가생활 중 한 번도 주지 소임을 맡지 않았을 만큼

선수행에만 전념하고 계신 분이다.

 

한국불교의 선풍을 드날리며 정신적 지주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제일의 선원,

그 선원의 최고 어른이 계시는 동방장의 주련은 측면에 3개 정면에 5개가 걸려있는데

吾住此庵吾寞識 (오주차암오막식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몰라라

深深密密無壅塞 (심심밀밀무옹색깊고 은밀하나 옹색하지 않구나

函盖坤乾沒向背 (함개곤건몰향배천지를 모두 가두어 앞뒤가 없이

不住東西與南北 (불주동서여남북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대한불교조계종 종조(宗祖)로 모시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19대 적손이다.

중국 원나라때 임제정맥의 18대 적손이었던 호주 하무산(湖州 霞霧山)

석옥(石屋)청공선사(淸珙禪師)는 고려국 제자 태고 보우가 이별할 때,

이 시()를 내놓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인가하고, 임제의 법맥을 부촉(咐囑)하였다.

석옥은 제자가 내민 태고암가(太古庵歌)에 다음 같이 답글을 남겼다.

先有此庵方有世界 (선유치암방유세계이 암자가 생긴 뒤에 비로소 세계가 생겼으니

世界壞時此庵不壞 (세계괴시차암불괴)  세계가 무너질 때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庵中主人無在不在 (암중주인무재부재)  암자 안의 주인이야 있고 없고 관계없이

月照長空風生萬 (월조장공풍생만뢰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네.

고려 남경(南京) 중흥 만수선사(中興 萬壽禪師) 장로의 휘()는 보우(普愚)이며 호는 태고(太古)이다.

그는 일찍이 큰 일에 뜻을 세우고 고생해서 공부하여 안목이 뛰어났다.

마음의 움직임이 끊어지고 생각을 벗어난 그 경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는 숨어살기 위해 삼각산에 암자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그 현판을 "태고"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스스로 도를 즐기고 산수의 경치에 마음을 놓아 태고가(太古歌) 한 편을 지었다.

병술년 봄에 고국을 떠나 이곳 大都에 이르러 먼 길의 고생도 꺼리지 않고 자취를 찾아오다가

정해년 7월에 나의 돌 많은 암자에 이르러서는 고요히 서로를 잊은 듯 반 달동안 이야기 하였다.

그의 행동을 보면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을 들으면 분명하고 진실하였다.

이별할 때가 되어서 전에 지었던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내 보였는데,

나는 그것을 밝은 창 앞에서 펴 보고는 늙은 눈이 한층 밝아졌다.

그 노래를 읊어보면 순박하고 무거우며 그 글귀를 음미해 보면 한가하고 맑았다.

이는 참으로 공겁(空劫)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서 날카롭기만 하고 의미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요즘의 글에 비할 것이 아니었으니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오랬동안 화답하는 일을 끊고 지내왔는데 붓이 갑자기 날뛰어

모르는 결에 종이 끝에 쓰고 아울러 노래를 짓는다.

이렇듯 동방장의 주련은 제자 태고와 스승 석옥이 주고 받은 글을 걸어 놓은 것이다.

 

설선당(說禪堂)

 

점심 공양

 

計功多少 量彼來處(계공다소 량피래처)

忖己德行 全缺應供(촌기덕행 전결응공)

防心離過 貪等爲宗(방심이과 탐등위종)

正思良藥 爲療形枯(정사양약 위료형고)

爲成道業 應受此食(위성도업 응수차식)

-오관게(五觀偈)-

이 공양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로움이 배어있는가를 헤아리고,

자신의 덕행이 공양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마음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허물을 여의는 것은 탐 삼독을 버리는 것이 으뜸이니,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육신의 고달픔을 치료하여

불도를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미리 연락된 님을 친견하고, 마애보살좌상을 참배하러 올라간다.

 

계곡 물빛이 참 맑은 곳이다.

 

노루오줌

 

원추리 형제

 

등로주위에 오래된 나무뿌리들이 연륜을 말해준.

 

꿩의다리

 

보는 관점에 따라서 요상하게 보이는 바위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

이 불상은 환적의천선사의 원불이라고 전해 오며 연대는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를 겸하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불두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얇게 처리하여

불두의 조각수법과 다르게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말기의 양식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마애불로 귀엽고 친숙한 인상이다.

근처에 관세음보살상이라 새겨진 글씨가 있지만 자세나 상호로 보아 여래상이다.

 

마애불 우측으로 돌아가면 여러 개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 白雲臺(백운대)라고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인 최치원의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고 보면 이곳 봉암사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가 있는 곳으로

매우 다양한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행도량의 무게는 잘 전해오지 않으나

그 안에 담겨진 문화재와 그들이 안고 있는 역사와 문화,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고 소중한 법이다.

 

이계곡을 다른말로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고도 하는데

 

 

지증대사는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차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어 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하며 경탄했다고 하는 곳이다.

 

올라온 방향 반대편으로 계곡을 건너고...

 

봉암사로 연결되는 임도수준의 등로를 따라 다시 봉암사로 내려간다.

 

등골나물

 

타래난초

 

개망초

 

봉암사 해우소/ 화장실 소변기 앞의 문구다.

 

진일보 (한발짝만 앞으로…)

 

해우소 옆에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승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혼자 같으면 가보겠으나 일행이 있어 후일로 미룬다.

 

일 년에 정식으로 단 한 번, 초파일 하루만 개방해주는 봉암사

평상시에 외부인이 찾지 않는 곳이라 하여도 절집을 설명하는 배치도와

요소마다 안내간판, 표지판 등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보 1점과 보물 4점을 갖고 있는 봉암사인데...

물론 문화재청이나 해당 관청에서도 관심을 가져 협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 문외한 이래서인지, 수행도량이라 하여 일 년 내내

방문객을 막는 일이 꼭 좋아만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 방문했는데도 그다지 신비로워 보이지도 않고,

잘 정비된 다른 절보다도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다만 봉암사 측의 진지한 답사객 출입을 허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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